골프 히스토리 : 효창원골프장 속에 담긴 아픈 역사
골프 히스토리 : 효창원골프장 속에 담긴 아픈 역사
  • 나도혜
  • 승인 2023.08.1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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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를 치다보면 문득 골프는 언제 어떻게 시작된 스포츠인지, 골프룰은 언제 생겨났는지, 최초의 프로골퍼는 누구인지 등 골프 관련 역사에도 궁금증이 생기기 마련이다. 골퍼들의 호기심 해소를 위해 기초상식으로 알아두면 유용한 골프 역사에 대해 연재한다.

 

아픈 근현대사 속 한국골프

 

과거에 비해 입지와 위상이 크게 높아진 골프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그 시작은 아픈 근·현대사와 함께하고 있다. 이는 현대적인 골프장이 최초로 만들어진 배경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은 1896년 영국인들이 원산 지역에 세웠다는 설이 유력하다. 

1876년 조선이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고 쇄국정책을 버리고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대외 무역과 교류를 위해 항구를 개방했고 원산은 인천, 부산 등과 함께 대표적인 개항장이 됐다. 이후 개항장에는 조선과의 무역과 교류를 위한 다수의 외국인이 찾았고, 원산의 골프장은 이곳을 찾는 서양인들을 위한 용도였다고 전해진다. 

사진 등 사료적으로 그 모습이 전해지는 골프장은 지금의 서울 용산 효창공원에 있었다. 1921년 일제 조선 총독부 산하 철도국에서 인근 조선호텔을 찾은 투숙객들을 위한 부대시설로 골프장을 건설했다. 

 

효창원골프장의 슬픈 역사

 

문제는 이 효창원골프장이 조선의 마지막 부흥기를 이끌었던 정조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유서 깊은 역사의 장소라는 점이었다. 효창공원은 본래 효창원이라는 묘역이었다. 효창원은 정조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었던 의빈 성씨 사이에서 낳은 아들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능이 있었다. 

문효세자는 어린 나이에 이미 정조의 후계자로 지목을 받았지만, 5살 어른 나이에 전염병으로 요절했다. 의빈 성씨마저 문효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 얼마 안 돼 세상을 떠났다. 정조에게는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이었다. 이에 정조는 사대문 바로 밖 용산, 지금의 효창공원 자리에 큰 규모의 능을 조성했다. 그 규모는 지금의 효창공원 인근 지역을 모두 포함할 정도였다. 

하지만 효창원은 조선 말, 대한제국 시기 외국군의 주둔지로 이용되면서 수난의 역사가 시작됐다. 1894년 청일 전쟁 당시 일본군의 숙영지로 이용된 이후 일본군의 주둔지로 사용된 데 이어 골프장으로 그 용도가 변화했다. 골프장 건설 후 골프코스에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능이 골프 코스에 함께 자리하게 됐다. 골프장 중간에 장애물처럼 자리 잡게 된 능의 모습은 식민지가 된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상징했다. 

결국,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의 능은 이후 서울 인근의 능으로 이장됐고 효창원은 효창공원으로 불리며 그 원형을 완전히 잃었다. 

이후 효창공원은 광복 후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순국선열 묘역 그리고 시민들을 위한 공원으로 새롭게 변모했다. 지금 효창공원에는 백범 김구를 포함해 윤봉길과 이봉창, 백정기 등 애국지사들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의 가묘도 다른 순국선열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와 함께 효창공원 골프장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과거 이곳에 골프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상류층 스포츠라는 인식의 계기

 

이렇게 우리 골프 역사의 첫 골프장은 일제강점기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제의 필요성에 의해 우리 역사, 문화 전통의 훼손이라는 심각한 상황 속에서 건설됐다. 당연히 골프장 이용객은 일본인들이나 서양인들이 주류를 이뤘고 일제에 협력하며 일제강점기 상류층을 이뤘던 일부 조선인들이 포함됐다. 

이는 일반 대중들의 인식 속에서 상류층의 스포츠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소중한 유산인 능을 파괴하고 만들어진 골프장, 일제 총독부 인사들이 주로 사용하는 골프장의 풍경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비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효창원골프장은 우리 골프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아픈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역사와 함께 우리 골프의 역사가 시작됐고 이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세계 속의 한국 골프

 

이렇게 그 시작은 아름답지 못했지만, 우리 골프는 큰 발전을 했다. 과거 외국 선수들의 활약상을 부러워하며 지켜봤던 골프 팬들은 언제든 각종 미디어를 통해 해외 투어에서 활약하는 우리나라 선수들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지금도 우리나라 선수들은 해외 투어에서 큰 성과를 내고 있다. 

과거 해외 골프 투어에서 활약하는 아시아 선수들의 상당수는 일본 선수들이었다. 아시아에서 일본이 골프를 가장 먼저 활성화했고 그에 상응하는 인프라를 잘 갖춘 결과였다. 하지만 이제 그 일본 선수들의 이름을 해외 골프투어 스코어 보드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대신 그 자리의 상당 부분은 한국 선수들이 대신하고 있다. 

과거 서양인들, 일본인들이 그들의 유희를 위해 가지고 들어온 골프지만, 이제는 우리나라 문화의 중요한 브랜드라 할 수 있다. K라는 말을 붙여도 전혀 손색이 없는 한국을 대표하는 스포츠가 됐다. 

이런 발전과 함께 국내 골프 인프라가 확충되고 그 시장규모도 매우 커졌다. 세계 골프계에서 한국은 매력적인 시장이 됐다. 

세계 골프에서도 한국의 골프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영광의 시간 이면에는 아픈 역사가 함께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역사의 기반을 위해 우리 골프는 또 다른 역사를 쌓아왔고 그 역사를 발판삼아 발전을 거듭했다. 

이제는 눈부신 골프 발전의 역사 뒤편에 자리한 과거의 역사에도 눈길을 돌려보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그런 아픈 역사를 극복하고 남을 정도로 우리 골프는 강해졌기 때문이다.

 

 

GJ 나도혜 이미지 GJ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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