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신장의 시대 흐름과 함께 발전한 여성 골프
여권 신장의 시대 흐름과 함께 발전한 여성 골프
  • 나도혜
  • 승인 2023.12.0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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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참정권을 얻는 역사는 매우 짧고 그 과정에서 치열한 참정권 운동이 전개됐다. 이러한 흐름 속에 여성 스포츠도 함께 발전했다. 여성 골프 역시 그 속에서 발전했다.

 

차별의 역사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 중 대표적인 건 선출직 공직자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 투표를 할 수 있는 참정권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일정 나이가 되면 성별과 상관없이 보장된 참정권이지만, 이 참정권이 완벽하게 보장된 역사는 의외로 길지 않다. 

과거 왕이나 일부 귀족들이 지배하는 신분제 사회에서 일반 국민의 참정권은 고려조차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산업혁명기를 거치며 경제가 발전하고 국민의 경제력이 증가하는 상황애서 국민적 권리에 대한 욕구가 커졌다. 

특히, 특정 세력들이 독점하는 권력 구조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이는 국민의 주인이 되는 나라,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혁명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희생되기도 했지만, 국민의 권리에 대한 요구는 참정권 보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참정권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았다. 참정권과 이에 기반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성인 남성들의 것이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도 여성들의 사회 활동은 크게 제한받았다. 이는 서양은 물론이고 동양도 다르지 않았다. 여성들은 교육의 기회마저 제대로 얻을 수 없었고 국민으로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했다. 

 

여성들의 권리 신장

 

이런 여성들의 차별적 상황은 제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변화했다. 전쟁 와중에 상당수 남성이 전장으로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하던 일을 대신할 노동력이 필요했고 가정에서 가사에만 집중했던 여성들이 일터로 나서야 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대부분 직업군에 여성들이 진출했고 이는 여성들이 경제권을 가지게 했다. 이는 사회적 발언권을 크게 했고 권리 확대에 대한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했다. 

여성들의 참정권은 여성들의 권리 신장에 있어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은 더디지만, 순차적으로 결실을 맺었다. 1894년 세계 최초로 뉴질랜드가 여성들의 참정권을 인정했고 1902년 호주가 뒤를 따랐다. 

민주주의 가장 먼저 발전했다는 서구 선진국들은 더 늦었다. 유럽에서 핀란드가 1906년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한 선거법 개정을 했고, 영국은 1928년에 가서야 남녀가 평등한 참정권이 주어졌다. 유럽의 대표 국가 독일도 1918년에 가서야 여성 참정권이 보장됐다. 혁명의 나라 프랑스는 이보다 더 늦어서 1946년에 법으로 차별없는 참정권이 보장됐다. 

미국 역시 1920년에 가서야 여성 참정권이 주어졌고 주별로는 그 적용이 더 늦어서 1984년 미국 미시시피주가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면서 차별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처럼 여성들의 참정권을 얻는 역사는 매우 짧고 그 과정에서 치열한 참정권 운동이 전개됐다. 이는 여성들의 권리 보장 운동이기도 했다. 

 

여성 스포츠의 발전

 

이러한 흐름 속에 여성 스포츠도 함께 발전했다.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제한되는 상황애서 중요한 사회적 활동이라 할 수 있는 스포츠를 여성들이 즐기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이루어지면서 스포츠에서도 여성들의 활동 기회가 커졌다. 

여성 골프 역시 그 속에서 발전했다. 골프는 전통적으로 신사들의 스포츠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심지어는 골프(golf)에서 영문 G가 gentleman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전통적으로 골프는 사회적 일정 지위와 경제력을 갖춘 남성들의 스포츠였다. 

이에 골프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영국에서도 여성들의 골프장 출입이 제한됐고 이는 여왕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금지를 깨며 골프를 즐겼던 것으로 알려진 1500년대 중반과 후반까지 영국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메리 여왕은 이로 인해 큰 비난을 받았다. 

이런 흐름은 사회가 발전하고 근현대 사회가 된 이후에도 여전했다. 상당수 골프장의 여성 출입 금지 정책은 유지됐다. 이런 전통 아닌 전통은 현대에 와서도 역사가 깊은 골프장에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 골프 선수들이 제대로 그 꿈을 펼치는 건 불가능했다. 

 

차별을 깨기 위한 노력

 

일부에서는 골프에서 남성들의 성역을 깨기 위한 시도도 있었다. 193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육상선수였던 베이브 자하리스는 엄청난 운동신경을 바탕으로 골프 선수에 도전했고 남성 선수 못지않은 장타력과 골프 실력을 선보였다. 그는 남성들의 골프 대회에 참가를 신청했고 이는 당시 미국과 영국, 사회에서 큰 논란이 됐다. 그 시도는 결국 실패했지만, 골프의 여성 차별과 폐쇄성에 대한 문제가 공론화되는 계기가 됐다. 

당시에는 실패했지만, 차별을 깨기 위한 노력들은 점점 골프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마침내 1950년 미국 여자 골프협회 LPGA가 창립됐다. 당시는 13명의 여성 골프 선수들로 구성된 작은 조직이었다. 하지만 LPGA는 이후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했고 이제는 PGA와 다른 나름의 정체성을 가지게 됐다. 

1950년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이 큰 호황기를 누리던 시절이었고 최강국으로 올라서던 시기였다. 그 시기부터 미국은 세계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됐다. 미국의 달러는 세계 통화의 표준이 됐고 미국의 시스템은 세계의 표준이 됐다. 

이런 호황기에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 신장에 대한 요구가 함께 커졌다. 흑인 인권 운동이 활발해지고 사회적 공감을 얻었고 여권 신장 운동 역시 더 힘을 얻었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여성들의 참여가 더 활발해질 수 있었고 그 속에서 LPGA가 등장했다. 

 

한국 여자골프의 성장

 

그리고 이 LPGA의 더 큰 발전에 한국의 역할도 있었다. 1998년부터 LPGA에 참가한 박세리의 활약 이후 한국 선수들이 대거 LPGA에 진출했고 이는 LPGA의 외연 확대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한국 선수들의 LPGA 무대에서의 활약을 견제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한국의 경제력이 커지고 이에 따른 한국 기업들의 LPGA 후원도 크게 늘어나면서 LPGA 시장 확대에 기여했다. 

한국 선수들의 활약은 미국과 유럽 외에 아시아 등 제3세계 골프 국가들의 LPGA 참가를 촉진했다. 이를 통해 LPGA는 세계 최고 여자프로골프투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고, 세계 무대에서 한국 여자골프의 위상은 한층 더 단단해질 수 있었다. 

이는 국내 여자골프에도 순기능을 발휘했다. 국제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그 위상을 높인 한국 여자골프는 전 세계적으로 매우 이례적으로 여자프로골프투어가 남자프로골프투어보다 그 규모가 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상금 규모나 대회 숫자에서 KLPGA는 KPGA를 앞서고 있다. 

KLPGA는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투어로 성장했고, 국내 투어만으로도 여자골프선수들이 큰 부와 명예 인기를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결과에는 선각자적 역할을 한 여자골프선수들의 활약이 있었고, 여성들의 권리 신장이라는 사회적 흐름도 함께 했다.  

고도 성장기를 거쳐 1990년대가 되면서 우리나라는 여자들의 사회참여가 크게 늘었고 사회적 역할도 확대됐으며, 그 속에서 여자 스포츠도 크게 발전했다. 몇몇 여자 프로스포츠는 남자 프로스포츠의 인기를 능가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여자프로골프다. 

한국 여자골프의 위상은 지금도 아주 단단하고 미래도 밝다. 다만, 이에 걸맞은 시스템과 내실이 필요하다. 

그 바탕에서 지속성을 가지도록 해야 하며, 이는 모든 구성원이 함께 풀어야 할 과제다.

 

 

GJ 나도혜 이미지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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