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민통신 이문희 회장의 인생 스토리 :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열정이었다
부민통신 이문희 회장의 인생 스토리 :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열정이었다
  • 정태식
  • 승인 2021.12.2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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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칠십 평생을 돌아보니 등산, 사진, 골프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삶을 윤택하게 가꿔온 오늘의 내가 있고, 비교적 성공한 삶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한다. 골프와 반평생을 함께 해온 그의 바람은 남은 삶도 골프와 함께 마무리하고, 한국골프의 발전을 위해 봉사와 헌신을 다하는 것이다.

 

골프는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재미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는 이문희 챔피언

 

Profile 

이문희

부민통신(주) 대표이사 회장, 서울CC 전 경기위원장

 

챔피언 전적

뉴코리아CC 1994년, 2000년, 2005년 시니어 2018년, 2019년, 2020년, 2021년

서울CC 1998년, 2013년, 2015년

블랙스톤 골프&리조트 제주 2008년, 2012년

 

어느덧 70대의 나이가 되면서 세월은 유수와도 같다는 말이 생각난다. 70 평생을 돌아보니 내 삶은 세 번 무언가에 미쳐 살아왔다.

학창 시절에는 등산에 미쳐 살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사회초년병 시절에는 사진에 미쳐 살았고, 사업을 시작한 이후에는 비즈니스를 위해 시작한 골프에 미쳐 반평생을 살아왔다. 

등산, 사진, 골프에 대한 미친(?) 열정이 있었기에 삶을 윤택하게 가꿔온 오늘의 내가 있고, 비교적 성공한 삶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학창 시절에 대한 기억

 

1952년 경북 경산에서 할아버지가 군수인 부유한 과수원 집안에 3남 1녀중 맏이로 태어나 일찍 대구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유년 시절에 대해서는 그렇게 뚜렷한 기억이 없다. 

대구에서 경찰 고위 공무원이던 엄격하신 아버님은 “너는 경주이씨 익제공파 77대 종손이니 공부 열심히 해서 국회의원이나 공무원이 되어 시골 갈 때 보기 좋게 관용차 타고 조상 산소에 가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고 그래서 아버님의 열정으로 난 초등학교 2학년부터 담임 선생님 집으로 매일 과외 공부를 다녔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내가 다니던 대구 삼덕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창설됐는데, 당시 키도 크고 덩치도 있었기에 야구부에 차출돼 1년 동안 방과 후 야구를 열심히 하다가 아버님의 반대로 그만두었다. 그때 같이 운동하던 친구들은 야구 명문 경북중, 대구중, 경북고, 대구상고를 거쳐 유명한 선수가 됐다. 이들중엔 국가대표, 삼성 라이온스 감독을 거친 천보성, 김철, 남우식, 고인이 된 야구 전설 타격의 천재 장효조 후배도 있었다. 나는 학창 시절 공부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학생이었다. 공부보다 등산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등산을 시작해 고등학교 때는 아예 산악부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등산에 입문했다. 전국의 명산을 등반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고, 전국에서 열리는 각종 암벽 타기를 비롯해 무수한 등반대회에 참가했었다.

중1까지는 공부를 잘했지만 중2때부터 등산을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부를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고, 부모님은 그런 내가 마땅치 않으셨을 것이다. 공부에 전념하기를 원했던 부친은 등산에 미쳐 다니는 아들 모습이 싫어 등산 장비를 몰래 갖다버리고, 나는 그것을 찾아 다시 주워오곤 했다.

또한, 비교적 원만한 성격이라 친구도 많고, 인기도 많았던 데다 집도 대구에서도 가장 번화가인 동성로 인근 삼덕동에 살다 보니 친구들과 어울려 노느라 공부와는 더욱 거리를 두게 되었다.

내가 다녔던 대구고는 명문고로 대부분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이 통상적이었고, 실제로 친구들 대부분이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등산에 빠진 이후 학업을 소홀히 한 나는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고3 때 정신을 좀 차려 경일대 전기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회에 나와서도 계속된 열정

 

등산에 미친 학창 시절을 보내고 대학 졸업 후 1978년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전기회사인 자동화 제어계측기를 취급하는 한국생사(주) 계기사업부 영업담당이었다. 사실 이 회사 전에 대학교에서 추천한 창원 소재 한영전기(주)(효성그룹 계열사)에서 3개월 실습을 했는데 당시만 해도 창원이 삭막하게 느껴졌고 청춘을 그곳에서 보내기 싫다는 생각이 들어 첫 직장을 서울에 잡았다.

사회초년병 시절에는 우연히 접하게 된 사진에 빠져들었다. 학창 시절 등산에 이어 사진에 미친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직장생활 첫 월급이 152,000원이었던 시절, 3개월 치 월급에 가까운 그 당시 최고 카메라였던 니콘 F-3를  사고 그 이후 하셀, 마미아 645 등을 구입했다. 

카메라, 렌즈 등 그래도 제법 괜찮은 각종 사진 장비를 들고 시간만 나면 정처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그 당시 정동 하숙집에 인화장비와 암실을 꾸몄고 장비와 필름값이 많이 들어 월급을 전부 사진에 투자해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다. 사진 공모전에도 많이 응시했지만 아쉽게도 수상은 하지 못했다. 

사진에 미쳐 보낸 시간도 거의 10여 년! 돌이켜 보니 당시 여성들에게 사진도 찍어주며 인기도 제법 많았던 편이었던 것 같다. 지금의 아내와도 사진이 인연이 되었다. 1978년 휴가때 설악산에 사진 찍으러 갔다가 친구와 여름 휴가 온 아가씨의 사진을 찍어준 것이 계기가 되어 사귀게 되었고 결혼까지 하게 됐다. 

내 성향상 등산이나 사진 같은 취미생활이 없었으면 아마 여행에 미친 여행가가 되어 전 세계를 누비고 다녔을지도 모른다. 업무상 잦은 출장과 여행의 흔적으로 현재 대한항공 100만 마일리지 탑승 실적과 더불어 유효 마일리지가 100만이 넘게 적립된 것만 봐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가끔 ‘내게 역마살이 있나?’ 생각하는데 전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6개월 만에 싱글 골퍼 되기

 

1981년 입사 동기 2명과 설립한 ㈜코닉스

 

비교적 짧은 직장생활을 뒤로하고 29세 되던 1981년초 입사 동기 2명과 야심 차게 자동제어 관련 회사인 (주)코닉스를 설립했다. 사업운이 좋아서인지 회사 설립 후 매년 100%의 성장을 거듭해 왔다. 

‘사업을 하니 비즈니스를 위해 골프를 배워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골프를 시작했던 때가 1986년초다. 처음엔 그저 비즈니스적인 용도로 잠깐만 치려고 했던 골프였는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나의 열정이 사진을 뒤로하고 골프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골프에 입문했을 땐 틈만 나면 골프연습장에서 살았다. 출근하기 전 새벽에 일어나 잠깐 연습을 하고, 얼른 점심 식사 후 볼을 치고 오고, 퇴근 후 또 연습했다. 이어 스윙이 어느 정도 잡힌 후에는 약 6개월간 매일 동서울골프장에서 새벽 4시에 캐디와 1인 라운드를 하고 바로 출근을 하곤 했다.

그렇게 골프에 빠져들다 보니 6개월 만에 여주CC에서 76타의 싱글 스코어를 기록할 정도로 실력이 붙었다. ‘골프에 완전 미쳤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 이후 지금까지 싱글스코어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갑작스런 뇌출혈 투병

 

전자자동계측기 부문 선두주자로 1985년 전자제어계측기를 개발하고, 1988년 코닉스를 상장하면서 회사가 급성장했다. 산업용 온도, 압력, 레벨, 전력 등을 제어하는 제어기기와 시스템은 물론 DVD 회로도 개발해 미국 월마트 등에 납품하는 등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다 삼성, LG 등 대기업에서 DVD 회로 분야에 진출해 대량생산을 하면서 경쟁력이 떨어져 일찌감치 손을 놓게 된 아쉬움도 있었지만 2002년 기준 매출액 600억원의 알찬 기업으로 성장해 있었다. 

일도 운동도 너무 기세 좋게 달려오던 나를 시샘한 탓일까? 2002년 초,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약 60일간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식물인간 상태로 말이다. 

가족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천만다행으로 새 빛이 스며들어 다시 의식을 되찾았다.

 

승승장구해 오던 코닉스 정리

 

하지만 석 달간의 투병 생활 끝에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아 출근하던 날 남동공단 공장에서 내가 맞닥뜨린 현실은 민주노조와의 연대 파업이었다. 기업가치, 업체 평판, 신용도, 사원 복지 등 회사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직원들이 병상을 딛고 일어난 나를 환영해 주지는 못할망정 민주노총과 결탁해 더 많은 걸 요구하며 회사에서 데모하는 장면을 보고 엄청난 실망감을 느끼고 말았다. 

임금 인상 등 여러 가지를 요구하면서 계속된 데모는 경영난으로 이어졌다. 건강을 염려한 가족들의 만류도 있었지만 큰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결국 지분과 경영권을 제3자에게 넘기고, 직원들에게 보너스 800%를 지급한 후 (주)코닉스를 정리했다. 24년 동안이나 경영해온 회사를 정리할 때의 심정은 마냥 허탈하고 서글프기만 했다.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부민통신

 

(주)코닉스를 비롯해 여러 계열사를 정리하고 자회사 중 하나인 (주)부민통신만을 가지고 나와 지금까지 경영해오고 있다. 

부민통신은 “관계사 및 관련인들 모두 부자가 돼라”는 의미로 지은 회사명이다. 이 회사는 지난 1998년 창립 이후 국내외 정보통신(ICT) 네트워크 인프라 설계·구축 분야에서 안전문화 정착을 근간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해오고 있다.

부민통신은 DMB 자동경보 수신 시스템, 비상방송 자동수신 및 경보 자동 제어방식, 방송 중 비상신호 송수신방법 등의 특허증을 보유하고 있으며, SK텔레콤 RF 중계기, Wi-Fi 시설공사, KT 와이브로 장비 시설공사, LG U+ 기지국(LTE), In-building 장비 시설공사 등을 시행하고 있는 SK, LG, KT 1군 통신사의 협력업체이다. 그리고 ICT Value Chain 내 네트워크 분야의 전기·통신 인프라 설계, 시설공사 및 유지 관리의 역량을 보유하고 있으며, 주요 건설회사와 금융권 본·지점 내 통신, 방송 관련 전송장비 설치 및 개통 등 환경개선 공사 등을 수행하고 있다. 또한, 한국 통신망을 해외 시장(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동남아 등)으로 진출시켰다. 부민통신은 현재 직원 276명에 매출액은 550억으로 서울 본사와 용인, 부천 공장으로 구성돼 있고, 2021년 대기업을 포함한 대한민국 정보통신 등록업체 13,000개중 도급랭킹 15위이다.

 

제2의 인생, 필드에서 막을 열다

 

내 인생을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골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려 한다. 비즈니스를 위해 시작한 골프에 미친 나는 골프에 입문하면서부터 집에 있을 틈 없이 틈만 나면 새벽 4시경 바람과 함께 집에서 사라지곤 했다. 

새벽 4시 반, 골프장 경비와 함께 필드 문을 열었다. 출근하는 경비들 사이에서도 유명할 정도니깐 집안에선 어떻겠는가. 그래서 가족들 사이에선 내 별명이 ‘바람’이다. 

그렇게 골프에 미쳐 산 지 10년이 안 된 1994년에 뉴코리아CC 챔피언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그리고 1998년에 서울CC 챔피언이 되었고, 2000년에 다시 뉴코리아CC 챔피언에 오르는 기쁨을 맛보았다. 

골프에 미쳤던 시절의 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사업의 성공과 골프 챔피언! 일과 취미 양쪽으로 승승장구 해오던 2002년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일이다. 

뇌출혈로 쓰러져 병상에서 가까스로 일어난 나에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무얼까. ‘자신의 몸 걱정?’ 아니었다. ‘골프’였다. 

‘골프’에 ‘ㄱ’자만 들어도 머리가 쭈뼛 서는 나에게 있어선 역시나 골프가 빠질 수 없었다. 휠체어를 타고 병원을 탈출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뉴코리아CC 1번홀이다. 탁 트인 필드 위에서 호쾌한 샷 소리를 듣는데 그제야 살 것 같았다. 그렇게 식물인간 상태에서 의식 회복 후 제2의 인생을 필드에서 막을 연 것이다.

 

역경 딛고 다시 챔피언이 되다

 

 

퇴원 후 바로 골프채를 잡기 시작한 나의 스코어는 90타대. 평균 70타대를 기록했던 예전과 비교하자면 당황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보다 몸이 쉽게 회복되지 않았고, 감각이 빨리 돌아오지 않았다. 숏게임도, 퍼팅도 되지 않았다. 점점 골프에 재미가 떨어졌다. 그렇게 계속 90타대에서 머물면서 나는 나 자신의 골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과거에 내가 쳤던 스코어를 생각하니 큰 실망감, 좌절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고 굳은 의지로 일어섰다. 일하다 잠시 여유시간이 나면 쏜살같이 골프장으로 향했다. 여러 회원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주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뉴코리아CC나 한양CC를 자주 찾았다. 근거리에 있음에도 1분 1초도 아까워 미리 식사 예약까지 해놓고 갔다.  

그렇게 일도 하면서 주어진 여건 속에서 정말 최선을 다했고, 예전의 기량을 되찾기 시작했다. 조금씩 과거의 스코어에 근접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도전 의욕이 샘솟았고, 결과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2005년 다시 한번 뉴코리아CC 챔피언 타이틀을 되찾았다. 병상에서 일어난 지 3년도 채 안돼서였다. 골프에 미치지 않고서야 이룰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지금 회고하니 감회가 새롭다. 

 

챔피언은 뒤안길로, 후배 양성하고 싶다

 

블랙스톤 챔피언 시상식

 

서울·한양 경기위원들과 함께

 

그동안 클럽챔피언은 뉴코리아 4번, 한양 1번, 서울 3번, 블랙스톤 2번 했으며, 시니어 챔피언은 뉴코리아에서 4번 했다.

처음 챔피언이 되었을 때는 자신감에 차서 내가 최고라는 자만심도 가졌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골프를 너무나 잘 치는 아마추어 고수들이 많음을 알게 되었고 한때 기고만장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게 생각됐다. 

그동안 숱한 챔피언전을 치러왔지만 내게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2013년 서울CC 챔피언전(예선 18홀, 8강 18홀, 4강 18홀, 결승 36홀)에서 아마 최강자이자 클럽챔피언 다승 1위인 후배 정 환 선수를 연장 1홀에서 물리치고 챔피언에 오른 것이다.

2015년 서울CC 챔피언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챔피언전에 출전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동안 챔피언도 많이 했고, 나이도 들었을 뿐 아니라 후배들을 생각해서였다. 

사실 뉴코리아 시니어 챔피언전에도 출전할 생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2018년 시니어 챔피언전 출전 선수가 충원되지 않자 주위에서 출전을 강력히 권해 어쩔 수 없이 참가한 경기에서 챔피언에 올랐다. 이어 디펜딩 챔피언으로 출전한 2019, 2020, 2021년 경기까지 4연패를 차지하는 영예를 안았다.  

골프 인생에서 챔피언이란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도전의식과 승부 근성은 내가 살아 숨 쉰다는 존재감을 일깨워 주었다. 앞으로도 건강을 유지하면서 오래도록 좋은 지인들과 함께 편안하게 골프를 즐기며 도전적인 삶을 추구하고 싶다. 

더불어 이젠 후배 아마추어 골퍼들을 양성하고 싶다. 위기를 잘 활용해 더 나은 스코어를 만들어온 나의 도전이 작은 아픔에도 통증을 느끼고, 소소한 시련에도 무릎을 꿇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후배들에게 자신감을 갖고 공격적으로 플레이를 하는 것이 골프의 짜릿한 맛을 더 느낄 수 있다고 조언해주고 싶다.

 

골퍼만 느낄 수 있는 골프의 마력

 

골프는 멘탈게임이기 때문에 항상 나 자신을 스스로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며 경기를 치른다. 개인적으로 샷 중 가장 신중을 기울이는 것은 어프로치샷이다. 어프로치샷은 마지막 샷으로 홀 1m 이내에 근접시키기 위해 하는 샷이기 때문이다. 

골프장마다 혹은 같은 코스라도 매일 그린 조건이 다르므로 어프로치샷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다른 샷은 바로바로 샷을 날리지만, 어프로치샷만큼은 3~4번 정도 연습 스윙을 한 후 친다. 

평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새벽에 한두 시간씩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달리기를 하며 기초체력을 점검하고, 라운드가 있는 날은 적어도 1시간 전엔 코스에 도착해 그린을 점검하고 퍼트 연습을 한다. 그리고 라운드 후에도 바로 나가지 않고, 연습장에서 문제가 되던 부분을 다시 복기하는 것으로 마무리 해왔다. 건강하던 사람도 한 번 쉬면 그 공백을 메꾼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물며 아파본 사람인 나로서는 더한 열정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골프에 임했다. 

골프는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재미있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골프를 통해서 재미를 느끼고 존재감을 느낀다. 식물인간 상태로 누워있던 병상을 털고 일어나 내게 닥친 시련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희망을 준 것이 골프기 때문이다. 

필드에 나오면 우선 자연과의 만남에서 상쾌함과 푸근함을 느낀다. 그리고 굿샷에서 느끼는 희열감과 즐거움은 나만이 누리는 기쁨이다. 골프의 마력은 골퍼만이 느낄 수 있다.

 

부단한 노력만이 답이다

 

골프 입문 초기부터 하루에 공을 1,000개씩 쳤다. 이처럼 많은 연습 과정에서 느꼈던 골프에 대한 나 자신만의 생각이 있다. 

‘골프는 감이 중요하다.’ 기초 다지기 과정에서 어느 정도 스윙이 안정되면, 그 후부턴 얼마나 골프에 대한 감각이 있느냐에 따라 결과가 판가름 나기 때문이다. 

감각이란 건 코스나 컨디션 등 여러 변수를 고려해 맞추는 것이다. 그린이 빠른데 평소 연습하던 스트로크로 치면 전부 홀을 지나친다. 다양한 상황과 변수에 맞춰 적응하는 것이 골프에 대한 감각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골프팁을 덧붙인다면 피팅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나의 경우 골프채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지금도 피팅을 직접하고 있다. 골프채를 구성하는 그립과 헤드, 샤프트의 중요도는 그립이 10%, 헤드가 20%, 샤프트가 70%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샤프트는 몇 g의 무게 차이에도 느껴보면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샤프트의 무게와 길이, 헤드의 로프트도 각 클럽에 맞게 조정해야 한다. 또 골프채의 경우 비싸다고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꼼꼼한 피팅은 신장 177㎝, 체중 80㎏으로 비교적 체구가 큰 편에 속한 내가 골프를 좀 더 잘할 수 있는 이유 또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양한 진기록과 에이지슈트

 

골프를 시작한 지 어언 35년이 넘었다. 그런 만큼 내가 가진 골프 기록도 다양하고 프로도 쉽게 이룰 수 없는 진기록도 가지고 있다. 

서울CC 신코스(2010년 8월 26일) 15번홀(파5)에서 아이언 5번으로 알바트로스를 기록했으며, 한양CC 챔피언코스(2014년 11월 10일)에서는 1라운드에 3번이나 이글을 기록하는 트리플 이글 기록을 가지고 있다. 홀인원은 3번, 6연속 버디는 2번(한양CC, 뉴코리아CC) 했다. 이글은 매년 30회 정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웬만한 수준급 아마추어 골퍼들도 동경하는 에이지슈트는 1년에 필드를 찾는 횟수의 3분의 1 정도나 기록한다. 올해도 10월까지 벌써 30여 차례나 에이지슈트를 기록했다.   

이처럼 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지만 내가 꼭 해보고 싶은 기록은 올파 기록이다. 베스트 스코어는 한양CC 구코스에서 기록한 63타이다. 

70대인 지금도 주 3~4회 정도 꾸준하게 필드를 찾는데, 가장 좋아하는 코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와 전통이 있고 회원이 주인이며 주주인 소나무가 많은 한양, 서울CC의 신코스이다. 남성적인 곳인 데다 도전적인 코스이기도 하며, 정교한 샷을 요구하고 거리도 길기 때문이다.

과거 한양CC 경기위원장 재직 시 코스 길이를 많이 늘렸다. 특히 신코스 7번홀은 경기 북부에서는 비거리가 660야드로 제일 길다. 따라서 이 홀은 모든 샷이 전략적으로 긴 비거리와 정교한 샷이 이뤄져야 하고 미스샷이 나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제주도 블랙스톤CC도 좋아한다. 골프코스도 좋은 데다가 잠자리, 음식 특히 경기 진행과 경영 등 관리적인 측면에서 가장 뛰어난 곳 중 한 곳이라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챔피언에 올랐을 때 사장을 비롯해 전 임직원이 나와 박수갈채를 보내며 환영을 해주던 모습은 챔피언으로서의 영광과 뿌듯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러한 관리와 예우는 다른 골프장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만큼 관리를 철저하게 하고 있다는 방증이고, 관리를 철저하게 한다는 것은 명문 골프장의 면모를 나타내 준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즐기는 골프를 하고 있다

 

항상 즐기는 골프를 추구하기에 골프에서의 좌우명은 말 그대로 ‘즐기자’이다. 

한국골프의 산실이자. 최고의 골프코스를 자랑하는 서울·한양CC의 경기위원장을 수행하면서 느낀 것은 스윙 자세나 기술 연습도 중요하지만 골프룰 교육과 골프 매너 준수가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과도한 노출 의상을 입고,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모습은 정말 삼가야 한다. 골프라는 운동은 신사적인 운동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배려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골프를 시작할 때의 실력이 핸디 30이듯이 나이를 먹으면 다시 처음과 같이 핸디가 30이 될 수도 있다. 모든 골퍼가 실력에 실망하지 말고 건강하게 즐기는 골프를 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또한,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언제 어디서든 즐길 수 있도록 골프 비용이 좀 더 저렴해졌으면 한다. 이제 골프에 대한 국민의 인식도 많이 변했고, 2030세대의 골프 입문도 많이 늘었다. 공공시설 등에도 많은 골프연습장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좋은 친구들과 골프 칠 수 있다는 것

 

서울CC 멤버들

 

흑룡회 친구들

 

화인회 회원들

 

골프 친구들과

 

반평생 골프에 미쳐 살아오면서 그 긴 시간 동안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지만 골프와 열정적으로 살아온 나 자신이 기특하게 느껴진다.

내 골프 인생에 있어서 많은 고마운 분들이 계시다. 나의 절친 박창욱과 우부형, 원수연, 조성민, 이종찬, 박용번, 차점식, 서성일, 성효동, 김종석 씨를 비롯해 항상 나를 친동생처럼 배려해주시는 김영진, 이수복, 김덕배, 권태식, 채규룡, 박선교, 유영종 형님 등 이들은 지금도 자주 라운드를 같이하는 뉴코리아 로핸디, 챔피언 친구들과 서울CC 서경회, 일토회, 서인회, 35년동안 같이 하는 화인회 회원분들이기도 하다.

나는 한국 최고 골프모임인 비구회 소속이다. 김용조 챔피언, 김기수 권투 세계 챔피언, 최정호 PGA 경기위원, 구본태 경기도 대표선수, 최경식 챔피언, 김선영 챔피언, 임준모 챔피언, 최태열 챔피언, 윤진섭 챔피언, 김영진 챔피언, 조성민 챔피언 등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내로라하는 아마추어 최강자인 이들과 30여 년 동안 비구회를 같이 해오고 있다.

‘황혼에 접어드는 나이에 골프를 하는 것은 가장 복 받은 사람’이라고도 한다. 골프를 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무엇보다도 건강이다. 둘째는 경제적인 부분이고, 셋째는 어울릴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시간적인 여유와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이 중에 하나라도 빠진다면 골프를 할 수 없다. 그동안 나와 동반 라운드를 해준 많은 분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리고 항상 건강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골프와 인생에 대한 고찰

 

사랑하는 가족들과

 

인생을 골프와 비유하기도 하고 인생의 축소판이라고도 한다. 골프 속에는 희로애락이 모두 존재한다. 골프에서 희로애락을 경험하며 인생의 의미와 희로애락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곤 했었다.

골프에서의 좌우명은 ‘즐기자’지만, 가정과 사회에서의 또 하나의 좌우명이 있는데 바로 ‘신뢰’이다. 서로 믿고 살고 싶어서이다. 가정과 사회에서 신뢰를 쌓고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대구가 고향인 나는 묵묵하게 뒷바라지 하는 아내와 슬하에 1남 2녀, 그리고 사랑스러운 6명의 손자, 손녀를 두고 있는 다복한 가정을 일궜다. 이제 와 돌아보니 시간을 조금만 활용하면 할 것이 많은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해오지 못한 것 같다. 지금부터라도 골프에 할애하는 시간을 조금 줄이고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 그저 가족과 좋은 친구들과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것이 ‘등산, 사진, 골프’에 미쳐 열정적이었던 나의 인생을 마무리해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한국골프의 발전을 위해서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봉사와 헌신을 다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골프와 살아온 반평생! 골프 발전을 위해 힘을 보태며 의미 있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제 하나하나씩 차근차근 정리해 나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GJ 정태식 사진 이문희, Golf Journal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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