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골프 동호회의 역사
우리나라 골프 동호회의 역사
  • 남길우
  • 승인 2016.10.05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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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골프 동호회의 역사

친목 단체로 뭉쳐진 골프모임 성황

1957년 6월 제1회 서울CC 4단체 대항전 개최

골프가 여가와 친목의 성향이 강하다보니 뜻 맞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함께 즐기기엔 안성맞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따지고 보면 본격적으로 골프장이 만들어진 1921년 효창코스부터 골프 동호회 성격은 존재했으리라 본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모임명을 거론 한 기록은 6.25전쟁이 끝난 뒤 복구된 군자리 코스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컨트리클럽의 발상은 다분히 친목 모임이라는 성향이 높다. 영국에서 컨트리클럽이 생겼을 때 남성들만의 공간이었다. 남성들이 이곳에 모여 공을 치고 샤워도 하고 담소도 하고 벌거벗거나 자연스런 옷차림으로 골프 라이프를 즐기던 남성전용 공간이 컨트리클럽의 시초였다.

골프는 이런 문화에서 출발했다. 여성들은 불가침공간이었다. 모든 것을 던져놓고 여기서 남성들만의 유희를 즐기던 특별 공간이었다. 그런 유래는 한참동안 남아서 여성의 골프장 출입이 금지된 골프장도 더러 있었다. 간혹 초대 차원으로 여성들을 하나둘씩 불러들이던 골프장이, 골프와 여성의 성향이 딱 맞아 떨어지면서 이젠 여성들의 스포츠 및 여가, 친선의 전용장이 되어가는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역으로 남성들은 이젠 그 여가의 장에서 쫓겨나(?) 돈을 벌어야 하는 노동의 현장으로 돌아가고 대신 시간이 많은 일부 여성들이 대자연에 나와 인생의 묘미를 즐기면서 유유자적하는 추세로 흘러가고 있다.

어쨌든 골프란 것은 스포츠이자 운동이고, 여가이고, 혹은 즐거운 놀이 개념이고, 친목을 도모하는 친선의 장에다, 사업을 추구하는 비즈니스 공간 등 다양한 목적성을 포함하는 광범한 게임임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친목 도모에 적합한 골프의 성격

골프가 이처럼 여가와 친목의 성향이 강하다보니 뜻 맞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함께 즐기기엔 안성맞춤이다. 그런 차원에서 동호회란 모임이 뭉쳐지기 마련이고 골프 좀 한다는 골퍼는 씨줄날줄 관계를 지으면서 골프동호회에 가입하다보면 무려 10개 이상의 골프모임에 몸 담는 경우가 허다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따지고 보면 본격적으로 골프장이 만들어진 1921년 효창코스부터 골프동호회 성격은 존재했으리라 본다. 다만 모임의 이름만 붙이지 않았을 뿐 같이 즐기는 멤버들끼리 주로 즐기는 경향이 농후했을 것이다. 지연모임, 학연모임, 소속 모임, 직장모임, 지역모임, 성별모임, 수준별 모임, 내기모임 등등 자신에 맞는 모임들을 스스로 만들고 자주 즐기는 멤버들이 스스로 형성되다보면 나중엔 이름을 붙이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골프는 대회가 아닌 경우엔 혼자 공을 치는 것이 아니라 4명이 팀을 만들어야하는 속성 때문에 더욱 친밀한 사람들과 팀을 만들기 마련이라서 동호회는 쉽게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이처럼 한국 초기 골프계에도 드러내놓지 않고 골프를 즐긴 사람들은 많아 모임 성격을 띄었으리라 본다. 훗날 공식적으로 모임명을 거론 한 기록은 6.25전쟁이 끝난 뒤 복구된 군자리 코스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식적 골프 동호회의 탄생

1953년 서울골프구락부가 창립되고 1954년 코스 개장과 함께 사단법인체로 인가 받으면서 골프를 매개로 하는 세력권이 형성되고 2백여 명의 회원들이 끼리끼리 모여 4개의 친목단체를 조직하면서 부터다.

‘목성회(木星會)’, ‘목동회(牧童會)’, ‘군자회(君子會)’, ‘상록회(常綠會)’가 주요 골프 모임명이다. 이들 골프 단체의 목적은 정기적인 골프 모임 즉 경기를 통한 친목 다지기지만 각계각층의 주도자라는 인적 구성상, 공동이익 추구에 상부상조라는 유대 의식의 강화에도 목적이 있었다. 거기에 이순용 서울CC 초대 이사장은 이들 4개 단체를 적극 육성․후원했다. 이들 4개 단체의 교환전으로 클럽 애호정신과 협동심을 드높이는 효과 이외에 원활한 클럽 운영에도 4개 단체의 협조는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상호호의와 우의의 관계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겠다.

 

군자정 앞에서 야외식을 즐기고 있는 회원들

1957년 6월 제1회 4단체 대항전 개최

이들 4개 단체의 첫 골프대회는 1957년 6월에 군자리 코스에서 열렸다. 제1회 4단체 대항전이 열려 ‘목성회’가 압승했고 ‘군자회’가 꼴찌였다. 당시의 경기방식은 각 팀 당 11명이 출전했다. 1인당 기본점수 1점, 27홀 핸디캡 플레이로 1위에 4점, 2위에 3점, 3위에 2점, 4위에 1점씩의 단체별 합산식으로 우승팀을 가렸다. 특히 우승한 단체의 기(旗)는 태극기, 서울골프구락부 기(旗)와 나란히 한 달 동안 게양됐다.

이들 4단체의 면면들을 보면 원년 우승한 ‘목성회’ 회원에는 쟁쟁한 골퍼들이 포진했었다. 서울골프구락부 창립 초기에 가입한 이들로 골프 유경험자들이 절반가량 차지했었다. 광복 이후 골프를 한 사람이 나머지인 셈이었다.

박두병, 김건영, 김흥조, 안중희, 김동준, 이상옥, 한 홍, 김정렬, 송인상, 임문환, 김진형, 조중권, 함성용 씨 등이 주요 멤버들이다.

2회 대회부터 1회 대회에서의 꼴찌를 설욕하며 ‘군자회’가 막강한 실력을 과시했다. 1955년 입회자를 중심으로 결성됐는데 우승세를 이어가, 4단체 경기에서 항상 우승해 군자리 코스엔 군자회기가 마냥 나부꼈다. 이재형, 신용남, 유재흥, 금기탁, 하상용, 구인회, 나익호, 문홍조, 태명균이 주요 멤버들이다.

‘목동회’는 1954년 입회 회원을 주로한 모임이고, 엘리트 의식이 강한 자존파들의 모임으로 일컬어졌다. 안희경, 허정구, 금성곤, 손기영, 민복기, 홍진기, 최세황, 서정익, 조평재, 손병찬, 박기순, 유창준 씨 등이 주요 인물이다.

‘목동회’란 이름은 옛날 골프가 목동들의 놀이였다는 설과는 상관없이 안희경이 골프 모임 후 일행과 함께 간 추어탕 집에서 주흥(酒興)을 돋우느라고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 ‘데니보이’ 노래를 즐겨부른 데서 따온 것이었다. ‘목동회’의 경우 가입이 어렵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플레이 중에 오간 대화를 딴 사람에게 결코 발설하지 않는다는 규약 등으로 유명했다.

‘상록회’는 ‘항상 젊고 푸르게 살자’라는 뜻에서 결성됐다. 최종환, 김원회, 박건석, 박승찬 등이 주요 멤버였다.

이 4단체 경기는 1959년 8월 제11회 대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일설에 ‘군자회’가 2회 대회부터 줄곧 우승을 독점한 관계로 타 단체들이 대항경기에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군자회’와 타 단체와의 가벼운 불화가 원인이 됐다고도 했다.

 

친선게임을 마친 후. 뒷줄 좌로부터 안중희, 박건석, 허정구, 이상옥, 이순용, 김명곤, 신용남, 연덕춘, 앞줄 좌로부터 구평회, 최주한, 최억일, 이지형, 박승찬

골프단체 수 공인, 준공인 20여 개

1980년대 초기 서울·한양의 친목단체는 공인, 준공인을 합하여 20여개에 이르렀다. 매주 개최하는 단체가 5개팀, 매월 개최하는 단체는 20개를 헤아렸다. 당시 서울CC 이사회는 ‘공인’, ‘준공인’이란 개념과 명칭의 차별을 없애고자 하면서도 그냥 놓아둔 상태였다.

서울·한양컨트리클럽 공인단체의 요건은 이러했다. (1)서울컨트리클럽 또는 한양컨트리클럽 회원으로만 구성될 것. (2)회원 간의 친목과 체력 향상 및 골프 발전을 위한 단체일 것. (3)클럽 창립 때 클럽 회원 가입 유치를 위하여 클럽에서 모임을 갖도록 권장하는 등 기여를 한 단체라는 조건을 달았다. 클럽은 단체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예약상의 편의를 제공하면서 ‘주중 개최’로 유도했다.

공인단체로 서울컨트리클럽에 록지회(綠芝會), 군자회(君子會), 신록회(新綠會), 상록회(常綠會) 등 4개 그리고 한양컨트리클럽에 서삼회(西三會), 양록회(陽綠會), 원당회(元堂會), 지풍회(芝風會), 초원회(草原會) 스크랫치회 등이 유명했다. 그 밖에 행림회, 포우회 등도 있다.

준공인 단체는 다음과 같다. 백양회(白楊會), 동록회(東綠會), 영록회(嶺綠會), 문암회(文岩會), 거제회(巨濟會), 계륵회(桂綠會), 중인회, 세록회, 녹양회, 청우회, 향상회, 고구회 등이 있었다.

각 단체별 설립연도와 회원 수는 다음과 같다. 군자회 1955년 64명, 상록회 1956년 45명, 록지회 1957년 50명, 신록회 1961년 55명, 양록회 1965년 84명, 초원회 1965년 35명, 서삼회 1965년 96명, 원당회 1967년 68명, 스크랫치회 1967년 35명이다.

이런 친목회 모임은 거의 서울 회원이자 핵심 멤버들이다. 그들 중에서 서울CC를 이끌어 가는 이사들과 이사장이 많이 선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제3기 새 집행부 선출에도 이들 모임이 관여하게 된다.

1965년 4월 25일 서울골프구락부 정기총회에서 ‘불도저’ 장기영 이사장이 공직을 이유로 물러나고 박두병 이사가 새 이사장에 뽑혔다. 서울컨트리클럽 창립 이래. 10년간 이순용 전 이사장과 함께 가장 열성적으로 클럽의 발전에 진력한 장기영 이사장의 퇴진을 회원들은 아쉬워했다.

재적 총회원은 7백25명이나 ‘수면’ 회원을 제외하면 활동 회원은 5백50명이다. 이날 총회는 이들에게만 월 회비 6백원, 법인회원에게는 1천2백원씩 징수되는 것으로 예산을 짰다. 입장세를 뺀 그린피(코스 보수비)도 평일 2백 원, 주말 및 공휴일 4백원으로 인상했다.

총회는 새 집행부 개선방법으로 주목할 만한 새 스타일을 채택했다. 종전처럼 전형위원제로 하되 소속 6개 친목단체(목동회, 군자회, 록지회, 상록회, 일수회, 신록회)의 대표 6명과 의장 그리고 의장이 지명한 ‘무소속’ 3명 및 특별회원 등 11명의 전형위원에게 새 집행부를 뽑도록 한 것이 그것이다. 이사회에서 예상한 대로 박두병 이사장에 허정구, 안희경 부이사장이 선임됐다.

정노천(골프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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