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골프 140년을 추적하다 : 원산해관에서부터 군자리코스까지 골프장 변천사 ➊
대한민국 골프 140년을 추적하다 : 원산해관에서부터 군자리코스까지 골프장 변천사 ➊
  • 정노천
  • 승인 2022.11.22 14: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효창원코스에서 거행된 골프대회(1923년 6월 10일)

 

쾅쾅쾅! 3면이 바다에 연한 조선의 굳게 닫힌 문이 열렸다. 동해, 서해, 남해 3곳의 바닷길이 동시에 열렸다. 1883년 조선은 인천, 부산, 원산 3곳의 항을 개항했는데 그 이전부터 청국과 일본이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서양세력들의 출몰은 1880년대 개항 시기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때부터 외국문물과 서양세력이 휘몰아쳐 왔는데 그들이 갖고 들어온 것 중의 하나가 골프였다. 이 중 골프와 가장 관련이 깊은 곳은 원산해관(1907년 세관으로 변경)이다. 1883년 10월 1일 원산항이 개항되면서 해외문물은 이 땅에 합법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은 해관 관리 업무를 청국에 위탁했는데 청국의 추천으로 원산해관 초대 세무사로 영국인이 들어오면서부터 골프가 도입된 것이다.

현재 2022년을 기준으로 볼 때 1880년대부터 따지면 이 땅에 골프 도입의 추론연대는 140여년에 이른다. 당시 경성골프구락부 회원이자 일본의 골프사가(史家)인 다카하타(대한암흑기 동양연료회사 이사로 경성 거주)가 자국의 골프지에 발표한 기록을 보면 한국의 골프 발상을 1897년으로 잡고 있다.

훗날 서양인들이 철수하고 원산시가지를 정리할 때 영국인이 살던 집 다락에서 녹슨 골프채 묶음이 여럿 쏟아져 나왔다고 기록했다. 그 녹슨 채를 싼 포장지가 당시 발간되던 1897년판 신문이라고 적고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이미 이 땅의 골프를 논할 땐 골프의 시도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오를 수도 있다.

그러면서 한국 골프의 역사를 논하면서 최초의 골프 도입을 두고 원산해관 내 골프장 존재의 문헌 관계를 따지면서 골프장 유무에만 치중해오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골프 역사를 인물로 따지자면 이미 덕윤 부사 겸 원산해관 감리로 있었던 윤치호도 있었다. 그는 이미 서양 유학 때 골프를 접했고 그의 집안의 골프 경력을 보면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오를 수도 있겠지만 여기선 골프장 존재로부터 한국 골프 역사를 추적해 보기로 하자.

 

효창원코스 클럽하우스

 

한국 골프의 창세기는 발생설이 아닌 도입설로 설명되고 있다. 한국 골프의 역사는 골프장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초창기 골프장의 증가 추세에 따라 한국 골프 문화와 골프 산업은 춤을 추어왔다.

흔히 이때를 한국 골프 여명기라 할 만한데 안타까운 점은 골프가 외국 스포츠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의 외국인들의 손에 의해서 코스가 만들어졌다는 흑역사로 취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땅에서 행해진 골프이니만큼 이 땅의 골프 역사로 수렴해야 할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우리 골프사서(史書)나 골프장 사사(社史)에서 인용되고 있는 골프의 도입이라는 항목이 원산코스설을 방증해주는 증거가 된다.

이 글에선 한국 골프의 역사를 논하면서 최초의 골프 도입을 두고 원산해관 내 골프장 존재부터 1972년 군자리코스 폐쇄까지 한국 골프장의 변천사를 개략적으로 언급해 본다.

한국 땅에서 피고 진 골프장의 변천사를 간략하게 5개 과정으로 분리해서 한국 골프의 초창기를 다뤄보기로 하겠다.

첫째는 영국인에 의해 조성된 원산해관 코스, 둘째는 서양 선교사들의 휴가 지역의 코스, 셋째는 일인들이 만든 수도권 코스, 넷째 지방 골프코스, 마지막엔 태평양전쟁이 끝난 광복 후 우리 손으로 만든 코스로 구분해서 언급해 보기로 한다.

어쨌든 한국 골프를 논하기 위해서 1880년대부터 2022년까지의 이 땅의 골프장은 한국 골프의 역사 과정이다. 1880년대 원산코스부터 초창기 우리의 골프 문화라고 할 수 있는 1972년 군자리코스까지 점검해보자.

 

원산해관 6홀 코스

 

원산 송도원코스의 모습을 그린 그림 <손환 제공>

 

1883년 조선으로 불리던 이 땅에 함경남도 덕원부에 속한 작은 바닷가 마을, 원산이 개항됐다. 1883년 10월 1일 원산해관(元山海關, 초대 세무사 T. W. Wright)이 창설됐다. 당시 조선은 관세의 징수사무를 청국(淸國)에 위촉했는데 청국의 세관 업무 관리는 영국인을 중심으로 한 외국인들에 의해 운영됐다. ‘이때 골프코스가 영국인에 의해 1900년 원산세관 구내에서 시작됐다’고 1940년 11월 일본에서 발행된 ‘조선골프소사’에서 다카하타(高畠種夫)는 기록하고 있다.

주로 해외로 파견 활동을 나가는 사람의 성질은 괄괄하고 진취적이라 성격이 강한 편이다. 신체적 활동이 강하고 스포츠를 즐기는 편이라 골프도 즐겼으리라 본다. 특히 영국인들은 세계 어디를 가든 본국에서 즐겼던 골프를 즐기며 향수를 달래고 여가 삼아 플레이를 한다는 것은 그들의 일상적인 습성이다. 

원산은 1883년부터 해양관계 세관 업무를 위해 해관을 설립했다. 이때부터 원산해관에는 영국인을 비롯 세계 여러 나라의 전문 세관 관리들이 들어와서 세금에 대한 전문 업무를 22년간이나 위탁관리를 했다. 당시 한국에 체류하던 영국인을 비롯한 서양인들은 테니스, 골프, 크로케 등을 일상 속에서 즐기고 있었다. 그중 야구, 테니스 그리고 특별히 골프에 조예가 깊었던 로스(J.B. Ross) 박사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들 서양인 선교사나 외교관, 사업가들과 밀접한 교류를 하고 있던 일부 한국인들이 서구 스포츠를 접할 기회나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골프 플레이가 눈에 선하다. 

특히 청국 등 주변국의 외교관으로나 사업차 미리 와 있던 서양인들이 우리나라 세관원으로 임명받고 고국에서 직접 가져오거나 현지에서 사용하던 클럽을 갖고 와서 원산 해관 모래밭에서 대충 홀의 영역을 구획하고 공을 쳤을 것은 당연한 추론이다. 당시 골프코스에 외부인 출입을 막고 목책을 둘러싼 곳에서 자기들끼리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막대기를 휘둘러 댔다는 그곳 지역민들의 말도 있고 훗날 일인들과 선교사들이 만든 갈마반도와 송도원해수욕장의 골프코스에서 플레이하는 모습을 본 지역민들이 20여 년 전 원산해관의 플레이 모습을 회상해 내는 장면들은 이를 더욱 방증하고 있다. 

어쨌든 한국 골프의 도입은 세대적 정황이나 각종 기록상으로 원산코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확실한 기록은 향후 발굴해 내야 할 후대의 몫으로 남겨졌다.

 

서양인 선교사가 만든 골프코스들

 

1920년대 효창원코스

 

효창원코스 레이아웃. 5홀까지는 지그재그식으로 홀이 조성됐다가 6홀부터는 지형을 따라 둥글게 이어진 코스 레이아웃이다. 이 그림엽서에서 효창원 (KOSHOEN), 경성(KEIJO), 룡산(RYUZAN), ‘青葉’의 일본어가 ‘아오바(aoba)’이며, ‘푸른 잎들(Green Leaves)’로 번역됐다. <그림엽서 손환 제공>

 

청국의 세력이 약해지고 일본세력이 강해지던 1905년 들어 서양인 근무자들을 세관 업무에서 밀어내고 해관업무를 일인들로 채워나갔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대거 이 땅에 유입되면서 그들만의 휴가지에 복합 여가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의사 혹은 교사 등의 전문가 신분으로 이 땅에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골프 문화도 함께 이 땅으로 가져온 것이 한국 골프 도입의 줄기다. 그 여가시설 중에 6~9홀 규모의 골프코스도 포함돼 그들이 전국에 걸쳐 점거한 몇 군데 외인촌에 조성됐다. 1913년 황해도 장연 구미포를 시작으로, 원산 갈마반도, 지리산 노고단, 금강산 온정리 등 선교사들이 모여 사는 휴가지를 거점으로 골프코스가 들어섰고 그들만의 골프가 시행됐다는 자료들이 최근 소장파 학자들로부터 속속 발굴되고 있다. 몇몇 골프 역사 소장학자들이 그간의 언론에 보도된 자료들을 찾아내고 1900년대 초기 자료를 하나둘씩 탐색하면서 우리나라 초기의 골프 존재를 밝혀가고 있는 점이 퍽 고무적이다. 언젠가는 확실히 밝혀지겠지만 이 탐색은 진행형으로 남겨져 있다. 

초창기 골프장 맥은 대한암흑기에 일인들이 만든 골프장과 또 한줄기 서양 선교사들이 만든 코스 두 갈래로 크게 나뉜다.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이 땅에 외인촌을 형성하고 그들의 여가, 휴양시설을 만들면서 9홀 규모의 골프코스까지 곁들였다.  

선교사들은 조선의 각 지역에 거주하며 그들의 종교뿐만 아니라 의료, 교육, 문화 분야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생활양식도 전했다. 이들은 생활양식과 문화적 수준이 당시 조선과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에 낯선 땅에서 생활하기가 쉽지 않았다. 초기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은 조선에서 병을 앓거나 사망하는 일이 빈번했다. 선교사들은 조선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지친 심신과 풍토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황해도 구미포(1913~1914년), 원산 갈마반도(1925년), 지리산 노고단(1929년), 금강산 온정리 등에 그들의 휴양시설을 만들며 부대시설로 골프장을 지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이 외교권을 박탈해 대한제국의 해관을 장악하게 된다. 외국인 세관원들은 1905년 이후 떠났지만, 1913년 원산 갈마반도, 황해도 구미포에 70동의 외국인 선교사 별장에는 골프장이 있었다. 언더우드 박사는 황해도 구미포 소래마을을 방문하고는 그곳 해안선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1905년 소래해수욕장을 개장한다. 1915년 전후 캐나다 선교사 올리버 R. 에비슨의 일대기(Avison of Korea : The Life of Oliver R. Avison)에 따르면 황해도 솔내(송천)마을에 선교사들이 예배당과 함께 야구장, 테니스장, 골프장 등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원산 갈마반도 외인촌에는 골프코스와 함께 테니스장, 야구장이 있었으며 골프코스는 1925년 7월 19일에 완공됐다고 전한다. 당시 신문에서는 원산 갈마반도 외인촌이 활기차게 번창하는 상황이라면서 미국과 영국에서 184명이 여행을 온다고 전했다. 이미 건설 중인 골프코스가 그해 열흘 전인 7월 19일 완성됐고 현재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맹연습을 하고 있는 골퍼들이 조만간 1년 전인 지난해 8월에 개장한 인근 송도원에 운영 중인 원산골프구락부에 시합을 신청할 거라고 했다. 이를 볼 때 원산골프구락부는 1924년에 이미 완성됐고 선교사 갈마반도코스와 송도원코스는 동시에 운영됐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선교사 골프코스는 1937년 일본이 해변 부근에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12년 만에 외인촌과 함께 사라지게 됐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원산에는 1925년 완공한 갈마반도 외인촌 골프코스와 함께 1924년 송도원해수욕장에 일본인들이 만든 송도원 골프장이 중첩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한국 골프 도입기 원산에는 원산해관, 송도원, 갈마반도 골프코스 등 총 3개 골프장이 탄생했다. 

1941년까지 서양 선교사들이 외인촌이란 이름의 조계지(租界地)를 점유했으나 결국 조선인에게 호의적인 서양인들을 탐탁지 않게 여긴 일본이 그들을 모두 철수시키면서 여가시설도 막을 내린 셈이다. 

외인촌마다 있었던 그들만의 골프코스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1940년 무렵부터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철수하면서 골프 시설이 대부분 사라진 것으로 추측된다.

 

서울 근교, 경성골프구락부 코스들

 

1926년 청량리코스

 

청량리코스 클럽하우스

 

수도권 서울 근교 일원의 골프코스는 일제가 만들었는데 연속성을 갖고 효창원코스-청량리코스-군자리코스로 22년간 승계됐다. 영국인 던트가 설계해서 1921년 조성된 효창원코스는 철도국 부설로 만들었는데 유지가 곤란해 1924년 ‘경성골프구락부’를 결성하면서 독립적인 운영체제를 갖췄다. 경성골프구락부는 형식상 국내 첫 골프모임이 됐다. 이후 경성골프구락부라는 단체가 20년간 효창원코스에서 청량리코스로, 이어 군자리 골프코스로 이전을 하면서 골프코스의 맥을 이어갔다. 

 

1930년대 군자리코스 클럽하우스

 

일제가 강점한 대한암흑기 시대, 1919년부터 골프코스를 착공해 1921년 효창원코스 9홀을 개장했다. 이어 1924년 의릉(懿陵)을 중심으로 한 천장산 자락을 끼고 있는 능원 지역인 청량리코스로 이전했다. 그러나 면적이 협소해 16홀(17, 18번 홀은 1, 2번 홀 그린을 재사용해서 보충하는 변칙 18홀 운영)로 운영되던 청량리코스가 비좁다는 이유로 1930년 현재 광진구 능동지역(현 어린이대공원)인 군자리코스로 이전하면서 한국 최초의 정규 18홀이 조성됐다.

초창기 우리 골프는 대한암흑기 시대를 통과하면서 코스 위주로 한국 골프계는 계승해 왔고 골프대회 창설 그리고 그 시대 아마추어 선수들의 활약상과 최초의 한국의 프로골퍼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한국 골프의 여명기다.

 

 

GJ 정노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하단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