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과 한국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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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길우
  • 승인 2016.07.0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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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과 한국골프

철도 호텔 부대시설로 시작된 효창원 코스

1921년 서울 효창원에 9홀 규모의 골프장이 만들어졌다. 효창원 코스는 골프를 하고 골프를 좋아하는 동호인들의 친목이나 클럽 활동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호텔 경영을 위해 호텔 투숙객에 대한 서비스, 투숙객 유치 등 관광 진흥에 주안점을 둔 영리 차원의 골프장 건설이다.

골프 발상국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의 초기 골프 코스들이 철도의 역 근처에 그것도 호텔 부대시설로 건설된 것과 궤(軌)를 같이 하는 사례이다. 효창원 코스의 출범도 조선철도국 직영 조선호텔의 골프장이다. 그런 연유로 인해 오랫동안 골프장 소관업무를 교통부에서 관장하다가 훗날 형식적으로나마 체육부로 이관되면서 골프가 스포츠 본래의 속성으로 환원됐다.

 

효창원 코스 설계자 영국인 H.E 던트

드넓은 만주 지역에 펼쳐진 호시가우라(星ヶ浦) 코스가 그의 눈을 자극했다. 조선철도국 이사인 일본인 안도가 만주 대련의 본사에 출장을 갔다가 일본 관할의 만철(만주철도국)이 만든 호시가우라골프장을 보고 쾌재를 불렀다.

“대한제국 경성(서울)에도 골프장을 만들어야겠다.”

서울에 골프장을 만들겠다고 작정한 이유는 만주의 호시가우라골프장이 만철이 경영하는 호텔의 부대시설이란 점에서 착안했다.

일본인은 그들의 식민지 만주, 조선 및 대만에도 골프장을 차례로 만들었다. 만주에는 영국인이 1909년에 만든 봉천CC(奉天·현 瀋陽)에 이어 일본인이 1916년 대련 근교에 호시가우라 코스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한국에 1921년에야 첫 골프장을 만든 것이다.

‘경성에도 조선호텔의 부대시설로 골프코스를 만들자’는 생각을 다지고 그는 마침내 조선철도국장 구보로부터 조선철도국이 직영하는 조선호텔의 직영 골프코스 건설안 결재를 받아냈다. 호텔 경영을 위해 골프장을 만들게 된 사례다.

사실 서울 효창원 코스를 만든 주역인 안도는 골프를 몰랐다. 만주 대련의 본사에 출장 갔다가 호시가우라CC라는 골프장을 처음 보고, 그 널따란 코스 풍경과 상쾌한 플레이에 깊이 매료돼 골프코스를 만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효창원 코스 완성 후 비로소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안도 철도국 참사는 조선호텔 지배인 이노하라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서울 근교를 돌아다니며 코스 용지를 물색한 끝에 효창원을 코스의 터로 결정했다.

현재의 효창원 공원인 효창원은 조선왕조 23대 정조의 3남 문효세자의 묘역이었다. 면적은 244,800㎡(5만7천 평)이어서 겨우 6∼9홀 규모이다. 18홀 코스의 면적이 대개 25∼30만 평임을 감안할 때 그 4분의 1 넓이밖에 안 됐다. 그래서 18홀 아닌 하프 9홀 코스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효창원 코스를 발기해 준공했다.

드디어 1921년 대한제국 경성(서울) 효창원에 9홀 골프장을 만들었다. 아쉬운 점은 효창원 코스는 대한암흑기(일제강점기)에 건설된 골프장이라는 것이다. 1921년 6홀 규모로 조성됐다가 나중에 3홀이 추가 총 9홀이 됐으나 상태가 좋지 않아 7개 홀만 사용했다.

호텔 유객(誘客)에 골프 절실

이 땅의 골프와 만철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철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약자다. 러일전쟁 후에 일본이 만주를 지배, 경영하기 위한 중추신경으로 1906년에 만들어진 반관반민식 국책철도회사이다. 이 만철이 1917년 7월 ‘조선철도국’을 흡수 병합 운영했다. 이 두 철도 병합이 조선철도국의 참사 안도(30세)에게 이 땅에 골프장 탄생의 주역을 담당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골프 발상국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의 초기 골프 코스들이 철도역 근처에 그것도 호텔 부대시설로 건설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당시 조선철도국 직영인 조선호텔에 투숙하는 손님에 대한 서비스, 체류 일정 연장 및 외국 관광객 유도책의 하나로 골프 코스를 활용한다는 계획이었다.

골프를 하고 골프를 좋아하는 동호인들의 친목이나 클럽 활동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호텔 투숙객에 대한 서비스, 투숙객 유치 등 관광 진흥에 주안점을 둔 영리 차원의 골프장 건설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즉 1918년에 입안됐다는 사실이 놀랍다.

골프 코스 건설 기안문의 첫머리에서 코스 조성 이유를 감지할 수 있다. “근래 골프라는 스포츠가 유행하여 호텔 부대 유락시설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인정된 듯하다. 골프코스가 조성되면 호텔 투숙객이 숙박을 연장, 장기 체제하게 된다. 그 결과는 호텔 숙박객 증가에 일조할 것이다. 그럼에도 경성에는 아직도 그러한 시설이 없음이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런고로 경성의 용산 소재 효창원 부근 국유지를 임대해 골프코스를 조성해서 조선호텔 관리 아래 경영하고자 한다.”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만주 및 중국) 진출이 날로 활발해 가던 때 군벌, 정상배, 관리들의 출장이 잦았다. 도쿄에서 서울을 경유, 만주와 중국까지의 지루한 철도여행은 중간 기착지인 서울에서 1∼2박을 하기 마련이었다. 그 숙박 호텔은 서울에서 시설이 가장 좋은 조선호텔이었다. 그럼에도 조선호텔 안에는 부속 유락시설이 전무한 상태였다. 골프 발상국 영국인들이 세계 7대주에 산재한 식민지에 나가서는 골프코스를 건설해 오던 흉내라도 내듯이 일본인들도 조선 땅은 물론 대만과 만주 등 그들이 강점한 곳에 자신들의 플레이를 위해 골프코스 건설에 손을 댄 것이다.

철도와 호텔의 부속기관

1919년 착공해서 2년 후인 1921년 6월 효창원 코스가 완공됐다. 효창원 코스가 의미 있는 것은 사단법인 ‘경성골프클럽(경성GC)’ 결성이다. 이 코스를 애용하는 골퍼를 주축으로 1924년에 ‘경성골프클럽’이 사단법인으로 결성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 클럽이자 오늘의 사단법인 ‘서울컨트리클럽’의 전신으로 볼 만하다. 현재 서울CC는 경성GC의 맥을 이어 한국골프의 메카로서의 역할을 단단히 하고 있는 것도 이 점을 연결시키기도 한다.

최초의 골프클럽(경성GC)창립총회가 1924년 3월 1일 조선호텔에서 열렸다. 이날 조선총독부 아리요시 정무총감이 출석했다. 일본 가나와현 지사 시절 이전에 영국에서 골프를 즐겼던 그는 골프 기량도 갖췄고 골프코스에 관한 지식과 골프문화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그가 조선총독부의 제2인자로 부임해온 사실은 우선은 효창원 코스를 위해 그리고 훗날 이 땅의 골프문화면에서 볼 때는 큰 영향을 끼친 셈이다.

경성GC의 초대 임원은 코스 건설의 주창자 안도를 비롯해 조선은행, 동양척식 등 금융기관의 이사, 총독부 고위간부, 경성전기 사장, 이왕직 차관 시노다 외에 유일하게 조선인 이항구 남작도 있었다. 이항구는 후에 이왕직 차관을 거쳐 장관에까지 오른 당시 41세의 친일 거물이었는데 창씨개명은 안 했던 걸로 전해진다.

시노다 차관은 이왕직 장관에서 물러난 후 경성제국대학 총장을 역임한 지식인 골퍼로서 후에 서울CC의 군자리 코스 건설에 지대한 기여한 인물이다.

아리요시 정무총감이 효창원 코스를 돌아보고 ‘이건 너무하다. 손질을 더 해야지’하며 만철 조선철도국에게 수리 공사를 하게 했다. 코스 내용이 차차 좋아졌다지만 깎인 산허리는 붉은 땅을 그대로 드러냈고, 잔디가 자라지 못해 나토(裸土) 상태가 심한 정도였다. 유일한 이 땅의 코스는 허술한 코스 토목공사, 험한 모양의 홀, 잔디가 벗겨져 황색이 된 그린, 거기에 플레이어들은 제각각의 자기 멋대로 스윙을 하는 등 골프의 속성이 훼손됐다. 그들은 골프라는 게임을 욕되게 하고 농락했던 것이다. 이런 천태만상의 골프문화를 아리요시 정무총감이 개선시키는 데 앞장섰다.

효창원 코스의 애용 층은 만철의 고위관계자, 조선호텔의 관계자 그리고 호텔 투숙 외국인들이지만 조선은행 등 은행계 일본인도 많았다. 그들은 고국의 도쿄나 고베의 골퍼들처럼 이 땅에 와서도 골프를 할 수 있다는 현실에 매우 만족했다.

특히 골프애호가 아리요시 정무총감의 부임 후 총독부 관리를 비롯한 일본인 관리 골퍼의 수가 크게 늘어 조선은행 등 은행 임원 골퍼의 수를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관리 골퍼의 선두에는 영국에서 골프를 했다는 총독부 오쯔카 내무국장이 앞장섰다.

 

에딘버러의 골프- 잉글랜드 초창기 

유일한 장안명소 효창원 코스

효창원 코스는 골프장을 짓기에는 면적이 좁아 처음엔 6홀이 건설됐다. 설계는 1915년 일본아마선수권 챔피언에 오른, 일본 체류의 영국인 H. E 던트가 맡았다. 서울 방문 중에 그는 코스 설계도를 만들었다. 공사는 조선철도국 공무과가 맡았다. 우거진 수목을 벌채하고 용지를 다듬어 잔디를 심는 한편 클럽하우스, 부대시설 건물 등의 공사에 6천엔이 들어갔다.

그 후 3개홀이 추가로 만들어져 9홀 규모로 코스를 갖추고 1921년 개장했다. 그러나 코스의 유지와 관리에 애로가 많아 2개홀을 운동장으로 바꿔 실제로는 7개 홀만을 사용했다.

효창원 코스는 풍치가 있었다. 조선왕조의 능묘가 있었던 자리답게 봉산(封山)이나 태봉산(胎封山)이 아름다웠다. 검은 초록빛이 풍기는 수목 속에 상당한 슬로프 홀도 몇 개 있었다. 야지(野芝)로 뒤덮인 페어웨이를 밟으며 라운드 하는 색다른 풍취여서 플레이어 특히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서울에 골프장이란 효창원 코스 말고는 따로 없었으니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효창원 코스는 우거진 삼림 코스로써 만주로 가는 중간 기착지 서울을 드나드는 골퍼들 사이에는 큰 화제 거리였다. 당시 효창원 코스의 골프는 단연 사치스러운 한량들의 놀이가 됐다.

참고로 효창원 9홀의 별명은 이렇다. 1번홀 Unknown(不明), 2번홀 Paradise(낙원), 3번홀 Alps(알프스), 4번홀 Punch Bowl(펀치볼), 5번홀 Toge(일본어로 고개), 6번홀 Green Leaves(푸른 잎), 7번홀 Wrestler(레슬링 선수), 8번홀 Pukhan(북한산), 9번홀 F. D. A.(Free drink for all)이란 별칭이 붙이면서 설계자 던트는 홀의 성격을 나태내고 있다.

경성 상류 계급의 스포츠 골프

플레이 비용은 하루 1엔, 1개월 5엔, 1년 25엔의 회비제로 운영했다. 쉽게 구하기 어려운 볼은 조선호텔이 일괄 구입해 주문자에게 배포했다. 게시판에 ‘골프볼은 경리과에서 취급한다. 화장품 이상으로 소중히 사용하자’란 주의 문구가 나붙었을 정도로 공이 귀했다. 그렇게 볼은 당시 귀중품으로 다루어졌다.

임대 클럽도 있었다. 하프세트도 안 되는 4개짜리 1세트를 클럽 측이 마련해 1일 5엔씩을 받고 빌려주었다. 하지만 골프장 경영은 적자로 허덕였다. 코스를 만들어 놓았지만 골프에 대한 인식도 부족했고 플레이어가 적어 코스 유지 경비도 안 나오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회비로도 수입 부족은 극복이 안 될 정도로 경영이 어려웠다.

결국 발기인 안도 이사가 나서 총독부, 체신국, 도청, 군 간부 및 은행과 민간인들을 효창원 코스에 초청해 외국인 골퍼 또는 일본인 골퍼의 플레이 모습을 관람케 하는 등의 방법을 써서 회원으로 가입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당시 효창원 코스를 찾는 경성 거주 일본인 골퍼는 시즌 때 일요일 70명 정도였다. 이용자는 총독부 아리요시 총감, 고급관리와 은행간부 등은 일요일 새벽부터 일몰까지 마음껏 골프를 즐겼다.

경성의 상류 계급 사회엔 유일한 스포츠인 골프를 모르는 자는 신사의 자격 중 가장 큰 한 가지 조건을 빠뜨린 것으로 평가될 만큼 골프는 인기가 있었다. 반면 남산 일대의 여러 일류 요정은 파리를 날렸다는 소문이었다.

효창원 코스에 대한 추억

효창원 코스를 설계한 영국인 H. E. 던트는 ‘은자(隱者)의 왕국에서의 골프(Golf in the hermit Kingdom)’란 수필에서 효창원 코스의 설계 관계를 이렇게 기술했다.

“…1919년 5월 만철의 초청으로 처음 경성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이노하라 조선호텔 지배인은 이미 골프장 용지를 마련하고 9홀을 만들기 위한 설계안까지 준비해 놓고 있었다. 현지를 둘러보고 티잉 그라운드와 그린의 위치를 그 설계안에 기입해 주면 됐다. 그런데 송림이 울창하고 잡초도 무성한 효창원 일대를 손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울창하게 자란 큰 나무들을 베어 넘기고 페어웨이를 닦으며 코스 모습을 마련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9홀을 제대로 그 안에 잡아넣기에도 모자라는 용지 여기저기에 묘(墓)까지 산재해 있었다. 묘를 파 없애면 되는 문제이지만 조선인들이 결코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코스 조정에 여러 가지 애로가 겹쳤다. 어떻게 하면 훌륭한 코스를 만들 수 있을까에 우리는 온 심혈을 쏟았다….”

아쉬운 점은 효창원 코스 기록엔 9홀의 파(Par)가 얼마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각 홀 모두 일률적으로 4이고, 합계 36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9홀의 전장은 2천3백22야드 길이와 홀 별명만 붙였다. 9개 홀에 영․미풍을 따서 각각 멋진 별명이 붙였다.

효창원 코스의 그린이 야지라도 심은 잔디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모래로 된 샌드그린이었는지에 관해서는 확실치 않다. 1921년은 아마 샌드그린의 확률이 높다. 일본의 골프사가들은 그냥 그린이라고 기술, 잔디그린인지 샌드그린인지를 밝히지 않았다.

효창원 코스는 시내 남대문에서 자동차로 3∼4분 거리이고 그래서 근처를 산책하는 시민이나 지나가는 시민들과 플레이어들 사이에 다툼이 빈번했다고 한다.

플레이어들 대부분이 풋내기 실력이어서 친 볼이 코스 밖으로 날아가기 일쑤였다. 길을 가다가 난데없이 날아온 볼에 맞은 사람이 화를 냈다. 시민들의 골프에 대한 인식이나 감정이 몹시 나빴던 때라서 볼에 맞은 사람은 항의를 했고 시비가 번지게 마련이었다. 플레이어 대부분이 외국인이나 일본인이다 보니 “왜 남의 놀이터 가까이에 어정거리느냐?”고 되레 호통으로 맞서 싸움이 곧잘 커졌다. ‘골퍼 수난(受難)’ 같기도 하고 서민들의 ‘골프 항거’ 같기도 한 사례들이다.

당시 천주교신학교 학생 신분이던 노기남 대주교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다니던 신학교가 원효로에 소재하여 방과 후에는 가끔 효창원에 산책 나갔다가 골프장 밖으로 날아온 볼, 요즘말로는 아웃 오브 바운즈(OB) 볼 때문에 생기는 플레이어나 캐디와 행인과의 사이에 생기는 마찰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1921년 완성된 효창원 코스 9홀이 들어선 국유지가 공원 용지로 편입되면서 효창원 코스는 3년 만에 딴 곳으로 이전이 불가피해졌다.

경성골프클럽 주도, 청량리 코스 탄생

효창원 코스는 당시 서울의 명소 중에 하나가 되어 시민의 관심을 끌었다. 효창원 코스가 서울 중심부에 위치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시민들의 산책길이 효창원 코스의 근처에까지 뻗어 나갔다. 그러면서 시민들은 코스 안의 녹지대를 포함, 일대를 시민공원으로 조성하도록 당국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 ‘효창원 코스는 너무 비좁다’는 골퍼들의 의견도 날로 커지는 판국이어서 개장 2년 만에 코스 이전설이 나돌게 됐다. 마침내 아리요시 총감, 오쯔카 내무국장 등이 중심이 되어 더 넓은 새 부지를 구해 본격적으로 코스를 건설키로 이야기가 무르익어 간 것이다.

그런 과제와 문제해결을 위해서 본격적인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클럽인 ‘경성(京城)골프클럽’이 결성된 것이다. 새 코스 건설에 드는 비용은 엄청난 액수인데 무엇보다 부지 매수 자금이 한 푼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서울 근교 청량리(당시는 石串里) 근처 이 왕실(李 王室) 소유의 능림을 차용하기로 했다. 그 절충을 시노다 이왕직 차관이 맡았고 이 왕실의 승낙도 얻어냈다.

이렇게 되어 탄생한 것이 16홀 규모의 청량리 코스이다. 청량리 코스는 ‘변칙’의 18홀 라운드 시스템이다. 그것은 1번 홀에서 스타트, 순차로 돌아 마지막 16번 홀을 홀 아웃 한 후 다시 1번 홀과 2번 홀을 중복 사용해 토털 18홀 라운드로 끝내는 시스템이다. 청량리 코스의 각 홀 야디지별 파(Par)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1번 홀에서 16번 홀까지 야디지는 1,641야드이고 이에 1, 2번 홀 길이를 합친 토털 야디지는 2,147야드가 나온다. 파(par)는 1∼16번 홀까지는 62이나 18홀로는 70(33, 37)이다.

1924년 3월 1일, 사단법인 경성골프클럽 창립총회의 임시의장을 총독부 아리요시 정무총감이 맡아 정관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선출했다. 주목할 것은 경성골프클럽 결성을 계기로 골프장이 철도국과 조선호텔의 관할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운영케 됐다는 사실이다.

“동양 제일이라고 뽐낸 효창원 코스가 2년 후 공원으로 편입되는 관계로 폐쇄해야 하므로 골퍼들이 사단법인체를 구성해, 청량리 근처 석곶리(石串里)에 신코스를 건설키로 했다. 청량리에 만드는 코스는 규모 16홀로 계획해 건설비를 4만 엔으로 잡고 있다는데 자금 염출 방법으로 각 멤버에게서 1천 엔씩 각출하고 나머지는 일반으로부터 기부를 기대한 듯했다. 원래 골프 코스는 호텔에 부속되어 운영되는 것으로 되어 있어 경성철도국의 호텔이 건설하리라는 소문이었으나 이번에 철도국은 이를 부인했다. 어떻든 효창원 코스가 폐쇄되기 전까지 청량리에 이상적인 코스가 건설될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경성일보의 경성골프클럽 창립총회를 보도내용을 보듯이 건설비 관계로 철도국과 호텔과의 관계가 애매해졌다.

공사 자금은 만철 경성철도국이 마지못해 낸 2만 엔에 멤버들이 낸 2만 엔 등 4만엔이 조달됐지만 공사가 진행되면서 턱없이 부족하여 자금난으로 완벽하게 시공되지 못했다. 그린에 고려잔디를 깔려던 계획을 버리고 그냥 야지를 깔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모자란 공사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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