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와 왕릉
코스와 왕릉
  • 남길우
  • 승인 2016.05.0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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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와 왕릉

초창기 이 땅의 코스는 왕릉에 들어섰다

코스를 만들기에 가장 최적의 장소는 어딜까? 한마디로 우리나라 초창기의 골프장들은 왕릉 자리를 주로 차지했다. 우리나라 초기의 골프장은 우연하게도 왕릉이나 왕족의 묘역에 건설됐다. 우리의 골프장들은 왕릉을 좋아한 셈이다. 아마 그것은 왕족의 능이라 풍수 지리적으로도 뛰어난 길지이기도 하지만, 왕실이 관리하던 능자리라 지형이 우선 완만하고 널찍해서 코스를 새로 닦는 것보다는 코스 조성에 용이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잔디나 풀을 따로 심지 않아도 둘러싸고 있는 나무나 잔디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는 이점도 크기 때문에 한국의 초창기 효창원부터 청량리, 군자리를 거쳐 한양컨트리클럽까지도 능원을 차용하게 됐다.

최적의 지세, 뛰어난 풍치로 코스 안성맞춤

초창기 우리나라 골프장을 만든 장소를 들여다보면 공통된 장소가 나온다. 주로 왕릉이다. 1921년 효창원 코스를 비롯해 우리나라 초기의 골프장들은 우연하게도 왕릉이나 왕족의 묘역에 건설된 곳이 많다.

이 땅 최초의 본격적인 골프장인 효창원 코스가 조선왕조 23대 정조(正祖)의 3남 문효(文孝)세자의 묘역(墓域)에 자리 잡았다. 고양율목동(高陽栗木洞)의 이름이 효창묘로 되더니 고종 7년에 효창원으로 승격된 것이다. 효창원에는 정조의 후궁 의빈성씨(宜嬪成氏), 순조(純祖)의 후궁 숙의박씨(淑儀朴氏) 그리고 순조의 장녀 영온옹주(永溫翁主)의 묘도 있었다.

효창이란 왕족릉에 만들어진 골프 코스가 공원이 된 다음에 옮겨 만든 코스인 청량리(일명 石串里) 코스가 옮겨간 곳도 조선 왕실의 근처 야산인 능림이었다. 결국 서울 근교 청량리(당시는 石串里) 근처 왕실(李王室) 소유의 능림을 차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어 탄생한 것이 16홀 청량리(淸凉里) 코스이다. 청량리 근교, 석곶리(石串里)에 확보된 부지는 겨우 10만평이었다.

청량리 역에서 춘천 가도를 가다 왼쪽으로 들어가 공동묘지의 언덕 건너 일대의 송림이 왕실 능림이었고 경성컨트리클럽은 인근의 산림을 더 사서 보탠 것이 그 정도였다. 부지가 산비탈의 경사지이어서 본격 골프 코스, 즉 18홀을 만들기에는 크게 부족했다. 홀의 거리도 짧고 모양새도 좋지 않았고 부대시설도 허름할 수밖에 없는 코스였다고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9홀 규모의 효창원에서 옮겨가기 전에 부지 물색에서는 그래도 그곳이 좋았고 최고의 자리였기에 그 왕릉을 선택했던 것이다. 18홀 정규 코스를 꿈꾸고 옮겼으나 워낙 좁아서 결국 변칙 18홀이 됐지만 효창원보다는 나은 터로 이전한 것은 사실이다.

골퍼들의 욕구는 점점 자라 이보다 더 나은 조건의 코스로 옮겨가면서 또 능자리를 차용하게 된다. 그곳이 현재 어린이대공원 자리인 군자리(君子里) 코스다. 여기서는 18홀 정규 규모의 코스로 홀들이 제자리를 앉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18홀 정규 코스로 자리 잡은 경기도 뚝섬 왕십리 일대(능동, 군자리, 화양리, 모진동)의 광조문밖 유릉적(裕陵跡) 30만평의 군자리 코스도 엄연한 조선왕조의 능이었다. 그 안에 안장됐던 왕조의 마지막 순종의 비 순명황후(純明皇后) 민씨(閔氏)의 능묘는 앞서 양주(揚州)의 금곡(金谷)으로 옮겨져 순종과 합장되면서 ‘유능(裕陵)’의 이름도 함께 옮겨지고 뚝도 왕십리의 능림은 ‘유능이 있었던 자리’라 하여 ‘유릉적(跡)’으로 남는다. 그러나 코스 이름은 군자리 코스 또는 능동(陵洞) 코스로 불리었다.

능동에 만들어진 18홀 코스는 그 이름이 애초는 ‘창덕궁(昌德宮) 코스’였다가 바뀐 것이다. 코스가 들어앉은 위치의 중심 마을이 ‘능이 있었던 마을’이어서 한때 즉 ‘능동 코스’였지만 총체적으로는 ‘군자리 코스’로 불렸다. 클럽의 간부들이 신코스 용지 후보지를 분담하여 물색한 결과 경성의 서쪽 교외로 옛날 왕실의 능묘가 있던 바로 군자리 일대 30만평 자리를 확정한 것이다. 이곳 왕가의 능묘는 이미 금곡리(金谷里)에 이장이 완료된 지 오래였다. 일대의 아름다운 송림은 새로 생길 코스에 많은 운취를 도모해 주었다.

1928년 당시 신문은 “약 30만평의 넓이로 땅이 비옥하여 잔디가 매우 잘 자랄 것이라고 한다. 골프장은 남쪽 18만평의 경사면에 18홀 7,000야드 규모로 만들어진다. 일본의 그 어느 코스와 비교해서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 나올 듯 하다”고 보도했다.

 

능동코스

군자리 코스 조성에서는 아니 이 땅의 골프 코스 건설에 영친왕(英親王)이 주역으로 등장한다.

경성GC(현재 서울컨트리클럽) 멤버이자 이왕직(李王職) 차관이 영친왕을 뵙고 신코스 건설 계획과 뚝섬 군자리의 구(舊) 유릉적의 땅 사용을 간청하자 영친왕은 이미 일본에서 골프를 하던 터여서 그 자리에서 응낙한다.

영친왕은 부지를 무상대여 할뿐만 아니라 건설비로써 2만 엔을 낼 것이며 금후 3년간 매년 5천 엔씩의 보조금도 하사하겠다고 까지 약속한다. 패망한 나라의 비운을 씹으며 어려서 일본에 볼모로 건너간 영친왕은 비(妃) 이방자(李方子·일본 황족 梨本宮 方子)여사와 함께 골프로 울분을 달래는 생활을 이어갔다.

영친왕의 하사금과 클럽의 기금 2만엔, 기타 유지로부터의 기부금 및 부지내 벌목(伐木) 매각대금 1만 엔 등 6만 엔의 예산으로 군자리의 경성GC 신코스 건설은 그 첫 발을 내디디게 됐다.

광복 후에야 코스가 능동 438번지를 소재지로 하고 있어 ‘능동 코스’ 또는 ‘서울CC 능동 코스’로 제 이름을 되찾은 셈이었다.

광복 후에도 태강릉(泰康陵)에 태릉 코스가 그리고 서울 근교 서삼릉(西三陵) 일부에 ‘한양’과 ‘뉴코리아’의 두 코스가 자리 잡았으니 한국 골프는 왕릉과 깊은 인연으로 맺어 그 도약의 기틀을 잡아 왔듯이 예사롭지 않은 인연을 지닌 듯하다.

5·16 전후 그러니까 1960∼70년대의 부동산 왕으로 이름난 조봉구는 삼호(三湖)그룹과 동광(東光)기업을 설립한 총수였다. 개발되기 전의 서울 잠실벌은 한때 모두가 그의 땅이었다.

그는 1963년 경기도 고양시 원당(元堂)에 사둔 서삼릉 일부 등 54만평 야산에 혼자 힘으로 골프장 건설에 착수 했다. 이것이 한양CC 코스의 탄생이다. 우선 서삼릉 1백 30만평 중 20만평을 정부로부터 경쟁 입찰로 샀다.

사적(史蹟) 제200호로 조선왕조 인종(仁宗)의 무덤인 효능, 철종(哲宗)의 무덤 예능, 중종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 등 49기의 왕족무덤과 53위의 태무덤 등이 안치된 서삼릉은 1960년대 초반 정부에 의하여 헐값으로 개인과 기업에 분할, 불하되어 지금은 겨우 6%인 7만평만이 남아 능역의 명맥을 가까스로 잇고 있다.

한양CC가 20만평, 뉴코리아CC가 18만평, 축협이 26만평, 마사회가 13만평, 보이 스카우트가 1만평, 군부대가 7만평씩 ‘땅따먹기’처럼 이리 가르고 저리 쪼개어 나눠 가졌기 때문이다. 조봉구는 경매 때 평당 38원을 써넣어 단사천(段泗川)의 36원을 누르고 낙찰 받았다고 한다.

서삼릉 일대는 최적의 골프장 부지였다. 조봉구는 ‘한양관광(주)’를 설립하고 우선 18홀 공사에 착수했다. 공사는 인력에 의존한 수작업이었다. 1964년 3월 1일 착공해 9월 28일에 완공했다. 6개월의 짧은 공정이었다. 그는 부동산에 의한 재테크 중 물론 골프장업이 장래가 유망하다고 예견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개인 소유의 골프장을 갖고 싶었다. 그는 공을 치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티오프가 확실하게 보장되는 골프장의 오너(소유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조봉구 이후 많은 재벌기업들이 골프장을 만들어 90년대 재벌 기업 치고 골프장 하나 안 갖은 기업체가 없을 만큼 유행을 만들었는데 그 출발이 바로 조봉구이다.

 

서삼릉에 앉은 3개 골프장

한양CC의 오픈은 1964년 9월 28일이다. 이날이 한국 골프사에 큰 획을 긋는 날이다.

우리나라에서 개인(大株主)이 골프장에 처음 손을 대었다는 것은 처음이었다. 골프장의 기공은 1964년 3월 1일이고 개장은 6개월만인 1964년 9월 28일이다.

서울에서 서북방, 서삼릉의 주봉을 오른쪽에 두고 펼쳐진 나지막한 산줄기의 주변,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당리 산 38번지, 33만평의 산야가 그곳이다.

당시, 평당 40원씩에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사들인 터에 코스 설계가 착수됐다.

‘한양 코스’의 설계자는 지적도(地籍圖) 한 장 달랑 들고 현장인 산 속으로 다짜고짜 들어가고 보는 식이었다. 공사에 따른 청사진이 있을 리 없다. 코스 설계는 대한암흑기 때부터 골프에 조예가 깊었던 안중희(安重熙)와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골퍼 연덕춘(延德春)이 담당했다.

“골프장이 들어설 현장에 버스와 도보로 가야만 했다. 종로 5가에서 출발하는 일산행 버스를 타고 불광동 박석고개를 넘어 원당까지 갈 수 있었다. 원당에서부터는 걸어 들어가야 했는데 워낙 눈이 많이 온 때라 눈 속에 빠지며 현장까지 겨우 갈 수가 있었고 골프장 부지인 산속을 여기저기 헤매 다녀야 했다.”고 당시 코스설계를 담당했던 연덕춘 프로의 회고다.

“지형의 고저를 표시한 지도도 없었고 코스 설계도를 구운 청사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새끼줄을 갖고 다니며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페어웨이가 들어설 자리’, ‘이쪽은 그린’ 이렇게 목측으로 하는 현장 설계였다. 베어 버릴 나무에는 새끼를 줄줄이 묶고 ‘그 안의 나무는 모두 베어 버리시오’라고 했고, 남겨둘 나무에는 다른 표지를 하고 다녔다. 산허리를 타고 내려서면 또 산등성을 기어 올라가야 했다. 티잉 그라운드의 자리를 잡으면 그린을 또 정해야 했다. 롱홀과 미들‧숏홀을 안배하다보면 하루해가 금세 저물곤 했다.”

그 다음이 뉴코리아CC의 우제봉(禹濟鳳), 이동찬(李東燦), 단사천(段泗川) 그리고 안양CC를 1968년에 만든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총수 등이다. 국내 예탁금 회원제 두 번째 코스는 1966년 개장한 뉴코리아CC이다. 위치는 한양CC에 이웃하며 서삼릉의 일부를 부지로 한 코스이다.

한양CC의 북녘 4km 거리에 뉴코리아CC가 개장한 것은 1966년이라 한양CC보다 2년 늦은 편이다. 업주는 모두 서울CC 회원이었다. 우성건설 최주호(崔主鎬), 한국제지 단사천, 코오롱 이동찬, 세창물산 김종호(金鍾浩) 그리고 경산개발 우제봉.

이들은 모두 서울CC 신록회(新綠會) 회원들이다. 1965년 봄 서울CC 군자리 코스에서 신록회 경기 후 회식하는 자리에서 단사천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한양CC 길을 지나서 고개 하나 넘어 왼쪽에 좋은 땅이 나왔어. 골프장 만들기에 좋은 땅 말이야.”

“아 그래, 어떤 땅인데…?”

함께 공을 친 동반자들이 흥미 있다는 듯 되물었다.

“배용산(裵龍山) 프로가 물고온 정보인데 우리 몇몇이 그 땅을 사서 골프장을 만들자는 거야.”

“좋다. 잘 알아보자구” 모두가 뜻을 모았다.

이렇게 되어 훗날 뉴코리아CC라는 우리나라 두 번째 예탁금 멤버제의 명문 골프장이 탄생하게 된다.

서울CC의 배용산 프로는 연덕춘 프로의 수제자 중 우두머리 급으로써 두뇌 회전이 빠른 사업형의 사나이였다. 그가 문화재관리국장 하갑청(河甲淸)으로부터 한양CC 북쪽 원당면 신원리(元堂面 新院里·현 고양시 덕양구 신원리)일대 서삼릉 한쪽에 골프장 부지로 적격인 지형과 면적을 지닌 땅이 나왔다는 정보를 얻어낸 것이 뉴코리아CC의 탄생 씨앗일 수도 있다.

서울CC의 프로 자리에서 떠날 시기도 됐고 프로골퍼로서도 나이가 많아 벽에 부딪쳤다고 느낀 배용산은 이들의 힘을 빌어 골프장 건설과 운영자로 변신하기로 마음 먹게 된다. 그는 ‘현금왕’ 단사천을 설득, 동의를 얻었다. 단사천은 이를 신록회 모임에서 거론하여 최주호 등으로부터 합의를 이끌어내기에 이른 것이다.

문제의 땅은 서삼릉의 능역으로 문화재관리국 소유였는데 이들은 그 중에서 18만평을 사들이는데 성공한다. 문화재관리국 하갑청 국장은 앞서 서울 광진구 군자리의 서울CC 부지 25만평의 불하에 협조해준 대가로 서울CC로부터 대우회원증을 발급 받는다. 또 서삼릉을 한양CC에게 20만평이나 불하한데 이어 이번에는 또 뉴코리아CC에게 18만평을 불하하게 된다.

‘뉴코리아CC’를 관장할 회사로 신록회의 신(新)을 따서 지은 ‘신고려(新高麗)관광’이 설립되고 1965년 12월에 공사는 시작된다. 서삼릉 18만평 외에 인근의 8만여 평을 추가로 매입, 26만 6천 평의 송림 안에 18개 홀이 1966년 들어앉았다. 설계와 공사는 배용산과 당시 대구 미군코스의 프로로 있던 지연봉(池連峰)이 맡았다.

재계의 거물이나 대기업체의 총수들이 ‘나도 골프장을 갖자’는 풍조가 한양CC 조봉구에 의해 이 무렵 때부터 번져 재벌마다 골프장 건설이란 부동산 투기에 뛰어 들게 된 것이다.

골프 발상지 영국에서 골프를 ‘로얄 엔드 앤션트(Royal and Ancient)’ 즉 ‘왕과 그리고 오래된’ 게임이라고 말하듯 우리 골프도 왕릉과 연결 지어 ‘로얄 엔드 앤션트의 게임’으로써 이 땅에 발상하고 정착된 셈이다.

대한 암흑기(일제강점기)때 일본인들이 이 땅에 골프장 건설의 최적지로 능이나 능터를 선택한 데에는 딴 마음도 있었다는 해석도 있다. 능이 조선 왕조의 상징이자 조선 민족에게 국권에 대한 향수를 일깨워 주는 유적이기에 왕족묘 등을 파내어 이장케 하고 그 자리에 골프장을 지어, 광화문 자리에 총독부 건물을 지은 것과 같은 민족 혼 말살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대한암흑기때 공교롭게 조선 왕릉만을 골라 송림을 자르고 묘를 파헤쳐 골프 코스를 만든 일본인의 저의라면 괘씸할 정도다.

어떻든 풍치와 경관이 수려하고 기복이 심하지 않으며 소나무 숲도 우거진 멋진 왕릉 지역에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려 만들어진 초창기 코스들은 쉽게 명코스로 성장하는 천혜의 조건을 지녔다. 이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기 힘든 사례일 것이다.

능자리야말로 골프장을 만들어 앉히기에 최적의 지세와 풍수를 지녔던 것이고, 그래서 한국 골프는 능을 태(胎)와 보금자리로 하여 성장한 유일한 스포츠이다. 우리 골프는 조선 왕실의 영친왕에 이어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각별한 후원으로 혼란과 어려움 속에 굳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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