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 골퍼의 유래
한국 여성 골퍼의 유래
  • 남길우
  • 승인 2016.04.05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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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 골퍼의 유래

영화배우 김지미와 시인 모윤숙 서울CC 회원 등재

이 땅에 여성 골퍼는 언제 처음 등장했을까? 1920∼30년대 일본과 한국에서 골프를 해온 이방자 여사 이후 두 번째로 골프를 한 신여성은 과연 누구인가? 이방자 여사는 일본에 볼모로 가있었던 영친왕의 부인으로 엄밀히 말하면 일본 황족의 여성이다.

그 이후 오랫동안 공백기를 이루다가 1960년에야 여성골퍼가 나타나면서 움이 튼다. 우리나라 골프의 맥을 잇고 있는 서울컨트리클럽의 회원 중에서 찾아보면 영화배우 김지미와 시인 모윤숙의 이름이 먼저 등장한다.

글 정노천(골프컬럼니스트)

 

1958년 캐디경기 우승자 최옥자

우리나라 골프의 맥을 이어온 서울컨트리클럽 회원장부를 찾아보면 최초의 여성회원은 청운각 대표 조차임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1962년 서울CC 회원명부에는 영화배우 김지미와 시인 모윤숙 두 여성이 등재되어 있다. 김지미의 주소는 용산구 한강로 2가 37, 모윤숙의 주소는 성동구 화양동 132이다. 두 회원의 직업은 안 적혀 있다. 이들이 군자리코스에서 플레이한 기록은 없다. 어쨌든 이 두 명의 여성회원 가입시기는 1962년 이전으로 1963년 가입한 조차임보다 앞선다. 1959년 총회에서 이순용 이사장, 김교철 부이사장 유임 그리고 장기영 운영위원장 겸임의 진용이 짜졌다. 이때 가입한 회원 중에 여류작가 모윤숙 등이 들어있었는데 모윤숙은 곧 회원에서 탈퇴했다고 전한다.

아마 한국일보 사장인 장기영 위원장의 종용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든다. 가령 모윤숙이 이때 골프를 했다면 그의 문학적 깊이와 삶의 질이 달라졌을 것이란 평가도 나오는 것을 보면 라운드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땅에 최초의 여성 골퍼를 언급할 때는 늘 일본 황족의 딸인 이방자 여사가 있다. 1920년 영친왕 이은과 혼인을 했던 이방자 여사와 영친왕은 1927년 1년에 걸쳐 유럽일주 여행을 떠났다.

수행원으로는 시노다, 이왕직 차관 등 7명이 동행했다. 시노다는 여행에서 돌아와 서울 군자리코스 건설에 앞장서서 영친왕에게 승낙을 받아낸 인물이다. 그들은 1927년 6월 9일 유럽여행중 싱가포르 근교에서 골프를 했다. “전하와 나는 교외에 나가 골프를 했다. 좋은 날씨였다. 전하는 ‘근심을 잊기 위해 뭔가 운동을 해야 한다’는 주위의 권고로 골프를 하게 됐다. ‘국민은 말할 수 없는 탄압 속에 사는데 내가 골프로 세월을 보낼 수 있겠는가’ 전하는 이런 자책을 하시며 어쩌다 나와 함께 골프채를 쥐었을 뿐이었다”고 이방자 여사는 회고록에 기록했다. “사실 골프를 하려해도 마음이 그리 내키는 상대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전하와 동반해야 했다. 우리는 유럽 일주때 여러 나라 골프장을 찾았다. 골프솜씨는 전하가 핸디캡 25, 나는 30으로 초보자 실력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방자 여사는 1925년부터 일본 황족부인들과 어울려 명문 도쿄CC에서 플레이 했다. 그래서 1920∼30년대 플레이 한 이방자 여사를 한국 최초의 여성골퍼로 잡고 있다. 그 이후 오랜 공백이 이어졌다. 일부 특수직종의 부녀자나 기업 총수의 가족들만이 코스에 나타났을 뿐 한국여자골프의 역사는 미약했다.

그 뒤를 이어 1960∼70년대 필드에 나타난 여성으로 악극계의 거성이자 멋쟁이인 배구자가 언급된다. 그녀는 1936년부터 골프를 시작했고 동양극장에서 공연 중에도 남자들과 라운드를 했다고 전한다.

그 뒤를 이어 골프계와 관련이 깊은 국악인 안비취가 출현한다. 1957년 일본 장기공연 중에 골프를 접하게 된 여성이다.

또 청운각이란 요정을 운영했던 아마이가 있다.

아마이란 함경도 사투리로 ‘아주머니’라는 뜻으로 당시 40대의 조차임이다. 청운각은 서울의 으뜸가는 고급 요정이자 정치의 밀실이 되다시피 한 고급 사교장이어서 장안의 거물급 인사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처음엔 골프를 모르는 그녀였지만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내는 무서운 상술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사교의 중심이 고급 요정에서 서울CC로 서서히 옮아가는 것을 눈치 채고 나서 골프를 배우고 라운드를 하게 된다. 그리고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서울CC의 회원이 되는 것이 목적이었다. 조차임의 회원 가입 신청 소문에 일부 회원들, 특히 여성 가족회원들이 반발했다.

“요식 접대업의 마담이 서울CC에 가입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청운각 단골 이순용 이사장은 그녀의 회원 가입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넓은 포용력과 식견으로 조차임의 입회를 끝내 관철시켰다. 청운각이 고급 사교장이고 조차임은 나름대로 훌륭한 ‘사교계의 꽃’이라는 주장에서였다. 서울CC 회원 가입에 하자가 없다고 내세우는 바람에 그녀는 마침내 차별과 편견의 벽을 뚫고 1963년 3월 서울CC 여성회원의 꿈을 이뤘다.

그녀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자기이름으로 서울CC 회원에 가입해 친구들과 군자리코스에서 떳떳하게 플레이했다. 그녀의 서울CC 회원 생활은 17년 동안 이어졌고 50대 후반에 암으로 세상을 등질 때까지 활발했다. 1980년 4월 딸 한경은에게 회원 자격은 승계됐으나 딸은 6개월후 회원에서 탈퇴하고 말았다. 그 밖의 자료에는 1958년 군자리코스에서 캐디(여성) 경기가 열렸다. 최옥자가 대회에서 우승해 상금으로 쌀 한가마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여성 골퍼는 ‘별종’ 취급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골프를 하는 여성이라고 하면 ‘별종의 여성’으로 봤을 정도로 희귀한 존재였다. 그때까지 골프는 남성을 위한 스포츠이자 고급레저라는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바로 그러한 여성 골퍼 ‘희귀’의 시대에 국악인 안비취가 이따금 서울CC에 나타나 스윙을 했다. 서울 본토박이인 아버지는 사업가로 풍족한 살림이었다. 아들 3형제의 막내 귀염둥이 외동딸인 비취는 어려서 소리와 춤에 뛰어난 재질을 발휘, 조선 권번에 이어 이왕직 아악부에서 민속 무용, 승무에 서도소리를 배워서 소리꾼으로 명성을 굳혔다.

그녀는 1957년 일본에 장기 공연차 갔다가 골프를 접하게 된다. 일본 연예인들에게 이끌려 간곳이 인도어 즉 실내연습장이었다. 거기서 그날로 골프에 입문하게 된 셈이다.

그 후 매일 틈나는 대로 다니면서 스윙의 기본자세 등을 조금 익히고 귀국했지만 서울에서는 연습을 하려 해도 실내연습장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명동에 고봉우가 김건영, 안중희 등 이름난 골퍼들과 공동으로 1954년에 개설한 실내연습장 ‘그린히트’가 한국 최초의 실내연습장이었다. 명동에서 이전한 서라벌다방 2층에 자리잡은 30평 규모의 연습장으로 2타석을 갖추고 있었다.

김건영, 안중희는 물론 김정렬, 장도영, 장성과 서정식 등 쟁쟁한 골퍼들의 사교장 구실도 했던 이 명동골프연습장은 1년 반 후 충무로의 기쁜 소리사 옆 대연각으로 자리를 옮겼다. 적자에 허덕이던 이 연습장은 대연각 화제 후 없어지고 말았다.

그 때 안비취는 직접 연습장을 갖기로 작정했다.

골프연습장 제2호는 사보이 호텔 맞은편 서울빌딩 옥상에 3타석짜리 40평 규모로 1957년 11월 생긴 ‘서울인도어골프장’이었다. 김건영이 운영하던 서울인도어골프장을 안비취가 인계 받았다. 사실 골프계 명사치고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미인이 경영하고, 지도한다고 해서 많은 남성회원들이 몰려들었다.

야구선수인 그녀의 오빠 안봉식이 서무를 맡았다. 레슨은 서울CC 프로 박명출이 월요일 휴장일에 왔고, 김학영이 출장 레슨을 담당했다. 손님들은 안비취를 ‘안교장’이라 불렀고 그녀도 이 호칭을 좋아했다.

비록 경영은 적자였지만 신용남, 한 홍, 김건영 등 쟁쟁한 골퍼들이 드나들며 연습했으며, 1960년대 후반에는 이병철, 이인희 부녀도 가끔 얼굴을 내미는 등 골프를 하는 명사들의 사교장 구실을 하면서 안비취는 큰 보람을 찾았다. 그러나 안비취의 잦은 해외공연으로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아지면서 연습장 운영은 더욱 힘들어져만 갔다.

안비취는 일본에 갔다 올 때마다 골프채와 볼 그리고 연습장 용구를 사왔지만 물건 값보다 더 고액으로 물리는 관세가 야속하기만 했다. 이후 극동건설 김용산이 무학송건물 옥상을 무료로 빌려주어 5타석 연습장을 만들어 옮기고 다시 맞은편 남전무역 옥상으로 이사 가는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0여 년 동안 그럭저럭 골프연습장은 운영됐다.

공연으로 번 돈을 연습장에 쏟아부어가면서 1970년 중반까지 힘겹지만 꾸준하게 운영해 나갔으니 그녀의 고집과 골프 사랑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골프 솜씨는 나날이 향상되어 76을 기록하기도 하는 등 싱글급에 가까운 기량으로 골프계의 ‘마돈나’가 됐다. 연습장 이용비용은 월300원부터 시작해 나중에 600원이 됐고 말기엔 쿠폰제와 같이 한 박스에 30원으로 요금체제를 바꾸기도 했다. 또 손님 중에는 골프연습보다는 20대인 안비취의 미모에 끌려 점심이나 저녁 초청을 해오는 이가 제법 많아 이를 거절하는 방식으로 아예 바지와 운동화를 신는 등 남장 차림을 하기도 했다.

서울CC 이사장 이순용과는 우여곡절 끝에 친숙해졌지만 ‘정경부인 사건’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서울CC회원들이 안비취에게 골프모임에 나오도록 권고했고 그녀는 가끔 참석했다. 어느 날 안비취는 동양방직 사장 서정익의 부탁으로 서울CC 군자회 골프경기 후 군자정에서 불고기파티를 주선해 함께 어울렸다. 그 자리에는 안희경, 민복기, 송인상, 홍진기 등 당대에 내로라 할 인사들이 참석했었다. 이 모습이 가족회원들의 눈에 거슬렀던 모양이다.

며칠 후 서울CC 게시판에 별난 공고가 붙었다. ‘본 클럽 출입은 정경부인에 한함’ 이순용 이사장의 지시로 게재된 것이다.

이 공고문에 기분이 상했던 안비취는 서울CC와 발길을 끊었다. 미안해진 서정익은 안비취를 데리고 이순용 자택을 방문해 오해를 풀었다. 다시 자연스러운 골프장 출입이 허용됐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친근해지고 그녀는 이순용의 미수연에도 참석했다.

그녀는 특유의 사교성으로 골프장에서 항상 인기를 끌었다. 주로 골프광 김교철(전 조흥은행장)과 단골 라운드를 즐겼었던 그녀는 결국 서울CC 멤버는 되지 못했다. 이사장 이순용의 부탁으로 그녀는 친분이 있는 기업인들에게 서울CC 회원권을 사도록 권유해 수십 명을 가입시켰지만 정작 자신은 멤버가 되지 못했다. 안비취는 ‘서울CC 일등 멤버’라는 헛바람에 그만 가입할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며 끝내 아쉬워했다.

“원칙을 세웠다가도 재정에 관계되면 그 원칙을 멀리하고 영리로 흐른다. 아무리 수입 우선이라 하더라도 요리집 여자들이 ‘볼! 볼!’하고 우리를 뒤에서 독촉하게 만들어서야…. 비지터 통제는 불가피하다”

“몇 년 만 참고 견디자. 클럽의 수입을 위해서 말이다”

“수요회 회원들이 여자를 대동하고 경기했다”

“국악인 안비취에게 여자프로 대우를 했기 때문에 함께 라운드 하는 모양이더라”

“양반, 상놈이 없어진 세상이니 차별하는 언동은 하지 말자. 수요회에게는 주의를 주겠다”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는 이사회 때의 발언들이다.

한국 여성 골프의 맥잇기

또 한명의 여성 골퍼가 있다. 의사 문병기 전 이대 병원장의 부인으로 YWCA 총무를 지낸 손인실도 1960년경부터 골프장을 들락거렸다.

여성 골퍼로도 그녀는 선구자이다. 젊어서 목디스크를 가볍게 앓아오던 차 서울CC 멤버가 된 남편과 함께 골프에 입문한 이래 건강을 회복했다. 미8군의 용산CC에서 열린 주한외교관 부인 경기에서 우승도 자주하는 수준에까지 올랐지만 남편 문병기는 솜씨가 좋아지지 않아 경기에 나가서는 부비(booby)상에 빛나는 행운상 상습 수상자라는 오명을 감수해야 했다.

안비취의 명동연습장에 아버지 이병철과 자주 드나든 이인희는 1970년대에 한국여성골프협회 창설에 참여, 회장을 역임하는 등 동생 명희와 함께 한국 여성 골프의 맥잇기에 진력했던 여성 골퍼다. 1990년대에는 오크밸리CC, 자유CC 등을 직접 건설해 운영하는 등 골프장 경영주에까지 올랐다.

이인희에 이어 여성골프협회 회장을 맡은 전 언론인 정광모는 본격적으로 여성 골프를 처음으로 선보인 기량파였다. 1970년에 골프를 시작한 40세의 레이트 비기너였음에도 왕년의 육상 선수라는 운동 경력과 접목된 그녀의 파워 골프는 무섭도록 빠른 진전을 보였었다.

1992년 3월 1일 정기총회에서 서울CC 이사장에 방우영이 선임되면서 여성부문 분과위원장으로 정희자,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부인이 여성으로서는 첫 서울CC 이사명단에 들어갔다.

이날 서울CC 사상 첫 여성이사가 된 정희자 여성위원장의 ‘여성회원이 5백여 명인데 하루 정도 그들을 배려해주자’는 안건에 이사회는 ‘수요일 11시까지를 레이디스 데이로 하고 그 시간 구코스에서 남성은 플레이하지 않기로 하자’고 결의했다. 국내 최초 ‘레이디스 데이’ 신설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단점’으로 ① 수입의 현저한 감소 ② 가족회원 중 배우자와 비속간의 차별에 의한 불만 등을 들고 ‘전반적인 보완 및 조정책’을 건의했다. 결국 ① 회원의 날 오후 2시 이후 정회원과 동반하는 가족회원을 배우자든 비속이든 차별 말고 1명 동반케 한다는 방책이 나왔다. 이후 서울CC 첫 여성이사 정희자는 포천아도니스CC를 만들었다.

 

아마추어 부녀선수권대회 우승자들

골프 융성은 골프대회 개최에서

한국 골프계의 지도층이라면 당시 서울CC 이사장 등 집행부 인사들이 주축이었다. 이들은 여성골퍼 양성에 소홀했고 소극적이었다. 이순용 이사장마저도 여성 골퍼 양성에는 그리 열의를 드러내지 않았었다.

‘여성 골프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회가 필요하다.’ 그런 배경에서 1976년에야 여자아마선수권대회가 창설되고 1979년에는 아주머니 선수단이 처음 해외 원정길에 오르기도 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여자 골프의 최고봉격인 한국여자아마추어골프 선수권대회가 열린 것은 1976년이고 남자선수권보다 22년이나 늦게 스타트됐다. 그나마 영국의 여자오픈 첫 대회가 열린 해와 같은 해라고 하니 그런대로 자위할 만하고 대견스럽기도 하다. 프로와 아마가 함께 겨루는 한국여자오픈선수권대회는 1987년에야 대한골프협회(KGA) 주최로 그리고 한국여자프로골프선수권은 1989년에야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단독 주최로 열렸다. 이는 남자대회에 비해 30년에서 32년이나 늦다. 이것은 오랫동안 골프가 남성 중심, 남성 위주로 운영돼 왔음을 말한다.

협회는 날로 증가하는 부녀골프의 활성화를 위해 아마추어부녀선수권대회를 신규 종목으로 신설하고 1972년 10월 21일부터 22일까지 2일간 서울·한양CC에서 개최키로 했다. 그러나 당국(문교부)으로부터 ‘국내 분위기로 보아 부녀 경기는 시기상조’라는 견해 통고를 받고 제1회 대회가 권고 유산됐다. 문교부가 시국을 내세워 부녀골프경기 개최를 불허했다는 이야기다.

한국 최초의 아마추어부녀선수권 제1회 대회가 당국의 반대로 유산된 지 4년이 지난 1976년에 23명의 선수가 출전한 가운데 수원CC에서 개최됐다. 한국의 여자골프경기는 탄생부터 순탄치 않은 탓으로 그 역사가 40여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세계 정상급 프로선수를 수십 명 배출하고 세계 여성골프무대를 장악하는 업적을 낳았으니 한국 여성의 우수성을 인정한다 해도 기적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제6회(1982) 및 제7회(1983) 대회에서는 육상선수를 거쳐 언론인 출신으로 훗날 소비자연맹회

장으로 활약한 정광모가 81·86 그리고 79·82로 각각 패권을 두 번이나 차지, 톱 부녀 골퍼로

서 명성을 굳혔다. 또 배구선수 출신 서춘강은 남성을 뺨치는 240야드 롱드라이브로 페어웨이를 제압했다.

대우 김우중 총수의 부인 정희자도 제6회(1982) 대회와 제8회(1984) 대회에서 90·84 그리고 86·92로 톱5와 톱10에 들었다. 삼성가 이인희는 제2회(1978) 대회에서 심세희, 조동순에 이어 3위, 제4회(1980) 대회에서는 91·91로 2위 그리고 제5회(1981) 대회에서는 88·91로 3위에 입상했는 데, 우승을 끝내 못해 한을 남겼다. 삼성가의 이인희, 이명희 자매, 국화정, 조동순 등 부녀들이 주름잡던 무대에 정길자, 김애숙, 심세희 등 훗날 여자프로로 성장한 어린 여고선수들이 뛰어들어 간단히 패권을 연거푸 낚아채 갔기 때문이다.

참가하는 부녀선수 수도 차차 늘어나 제3회 대회 30여명, 제5회 대회 50여명 그리고 제8회 대회 80여명에 이르는 대성황이었다. 당시 참가선수들이 ‘부녀’에서 ‘소녀’로 즉, 어린 나이의 세미 프로급 여고생 엘리트선수들로 대체 되어가는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나이든 순수 아마 부녀들의 퇴출이 가속화되어 대회 분위기는 정식투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1979년 2월 태국에서 열린 제1회 아마추어여성 국제골프팀선수권대회에는 아시아권 9개국이 참가, 국가대항으로 열전을 펼쳤다. 사상 처음으로 해외 원정에 나선 한국팀(조동순, 김명순, 박봉선, 구낭희)은 졸전을 거듭, 최하위의 굴욕을 감수하는 큰 대가를 치렀다. 이 대회는 제2회 대회부터 태국 왕비 이름을 따서 퀸시리키트컵(Queen Sirikit Cup) 아시아여자아마추어 골프팀선수권대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국여자오픈의 탄생

아마추어선수권대회가 생긴 후 프로가 탄생하고 그래서 오픈 즉, 프로와 아마가 함께 출전하는 대회가 열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프로가 탄생한지 오래 되어도 한국여자오픈골프대회는 좀체 열리지 못했다.

내셔널타이틀인 한국(남자)오픈을 주최하는 대한골프협회는 역시 내셔널타이틀인 여자오픈 개최에 발 벗고 나서 마침내 1987년 대망의 제1회 한국여자오픈을 개최함으로써 한국의 여자골프경기가 비로소 제대로 체제를 갖추고 틀도 짠 셈이 됐다. 한국여자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보다 11년이나 뒤졌지만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가 독자적으로 개최한 한국여자프로골프선수권(1989년) 보다는 2년이나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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