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섭 골프인생 60년을 앞두고
우승섭 골프인생 60년을 앞두고
  • 남길우
  • 승인 2016.06.24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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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섭

골프인생 60년을 앞두고

 

프로필

1958 연세대학교 영문과 졸업

1969 신동교역(주)대표이사

1975 우일양행(주)대표이사

1971 수출포상 대통령표창 수상

1989-1990 한국체육대학 강사

1986-1998 스포츠 서울에 골프 칼럼 연재(3,750회)

1990-1998 스포츠 서울 논평위원

1990-1995 MBC골프 해설위원

1996-1997 숙명여자대학교 강사

1992-2005 대한골프협회 경기위원

1998-2001 매경TV(MBN)비즈니스 골프 룰 해설

1998-2001 매일경제 및 매경TV 자문위원

1998-1999 한국 외국어대학교 강사

1999-2004 조선일보 뉴욕판 골프칼럼 연재

2001-2005 SBS GOLF 채널 해설위원

2001-2005 SBS GOLF 채널 '마스터 골프룰' 해설

2006-2009 대한골프협회 경기위원장

2011-2013 아시아투데이 논설위원 및 상담역

2006-현재 JTBC 골프 해설위원

2009-현재 BMW코리아 골프경기 위원장

골프경력

구력:1963년 골프입문

공인핸디캡:3

베스트스코어:68

인생칠십고래희라고 했는데 내가 골프채를 잡은 지도 어느 덧 50년 하고도 3년이나 지났다. 돌이켜보면 그 기나긴 세월이 짧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직도 골프에 대한 미련이 아니, 골프에 대한 사랑이 남달리 많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 골프와 나의 인생… 나의 골프인생은 이렇게 해서 시작됐다.

여름이면 한강에서 수영을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시절. 나의 골프인생은 우리나라의 산업발전과 무관하지가 않다. 당시 여름철 주말이면 한강에서 수영을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처음에는 명수대 앞 모래사장에서 시작됐다. 사람들이 많아져 한강의 수질이 오염이 되면서 상류 쪽 뚝섬유원지로 자리를 옮겨갔다. 그곳도 얼마 가지 않아 상류 쪽으로 자리를 옮겨 워커힐 앞 광나루가 유일한 여름철 놀이터였던 시절이 됐다. 그 당시 광나루까지 가는 길이란 을지로-왕십리-군자리-광나루로 이어지는 외토길 하나밖에 없던 시절이다. 하루는 광나루 다리를 건너 집(후암동)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시철망 옆으로 골프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서울컨트리클럽(현재 어린이대공원)의 1번 홀 그린과 2번 홀. 3번 홀이 도로를 따라 펼쳐져 있어 밖에서 바라다보는 광경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다. 호기심에 차를 돌려 서울컨트리클럽 정문을 지나 클럽하우스로 들어갔다. 식당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연습장을 내다보았다. 연습공을 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락커에 가서 집안 어른의 이름을 대면서 골프채를 좀 꺼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당시에는 교통편이 원활치 못해 회원이면 골프클럽을 개인 락커에 놓고 다녔다. 클럽을 건네받고 연습장으로 내려갔다. 남들을 곁눈질하고 공을 치는 흉내를 내면서 몇 시간을 보냈다. 볼이 제대로 맞을 리 없지만 손에 물집이 생기도록 열심히 스윙을 했다. 이렇게 해서 나의 골프인생은 시작된 것이다. 주말이면 집안 어른들을 따라 골프장에 다녔다. 당시 그린피가 250원이고 캐디 팁은 20원을 주던 시절이다. 말이 캐디지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고 골프 실력도 대단했다. 지금의 프로 지망생들이다. 핸디캡이 2 또는 3 정도라고 했으니 프로 못지않게 실력 있는 캐디인 셈이다. 당시의 캐디는 클럽을 날라주는 지금의 캐디와 달리 내 공이 놓인 상태와 핀까지의 거리를 보고 이 채로 이렇게 치라는 골프레슨까지 정확하게 해 주던 그런 시절이다. 그러니 골프 실력이 늘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도움을 많이 받다보니 캐디 팁 20원이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1번 홀의 플레이가 끝나기 전에 어른들 모르게 50원을 캐디 주머니에 넣어주던 일들도 지금 생각해 보면 애교 있는 보은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골프는 스윙이 전부이고 스윙은 전문가의 지도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골프채를 잡고난 뒤 한두 해가 지나서야 깨닫게 됐다. 서울에서 두 번째로 개장한 골프장이 한양컨트리클럽이다. 세 번째가 뉴코리아CC이고 네 번째가 지금의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있는 관악산에 자락에 관악CC가 문을 열었다. 다섯 번째가 남서울컨트리클럽이다. 우선 한양CC의 회원이 되면서 주말이면 어김없이 골프장 나들이는 계속된다. 아무리 열심히 코스를 돌아도 만족스러운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는 프로의 지도를 받기로 결심했다. 난생처음 프로의 지도를 받는 날이다. 프로의 지시대로 연습공을 치고 있지만 골프가 이렇게도 쉬운 것을 왜 지금까지 고생했을까 싶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프로와 마주 앉았다. 나 혼자 생각이지만 지도를 받기 위해서는 무언가 약속이 있어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슬그머니 지갑을 열어보니 5만 원권 보증수표 한 장이 있었다. 그 5만 원권 보증수표를 그 프로에게 주었다. 그 프로는 무척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것이 무슨 돈이냐고 묻는다. 골프 지도에 대한 사례금이라고 말했다. 그는 몹시 당황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내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돈으로 내가 코스에 나갈 수 있는 실력이 될 때 까지만 지도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사업을 하는 관계로 토요일과 일요일만 지도를 해달라고 했다. 만일 3개월 안에 코스에 나갈 수 있으면 3개월로 이 계약(?)은 만료되는 것이고 늦어져서 3년이 걸려도 이 돈으로 3년 동안 지도를 해줘야 한다는 내용이 조건의 전부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다소 의심이 풀렸는지 그는 웃으면서 열심히 해 보자고 했다. 당시 5만원이면 정부중앙청 사무관의 월급이 3,500원이였으니까 사무관의 18개월 월급에 해당되는 큰돈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렇게 해서 나의 골프인생은 시작된다. 얼마나 열심히 연습공을 쳤던지 100개 들이 밴드에이드 한통을 사면 토요일, 일요일 이틀 동안에 다 써 버리고 만다. 손바닥에 물집이 생겨 터지면 피가 나고 그 위에 덧바르고 또 덧발라서 손이 아파도 피가 나도 연습은 계속된다.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 동안 강훈련을 하고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려고 하면 두 손이 얼굴까지 올라가지 않는다. 손바닥부터 팔꿈치 까지가 부어올라서 움직여 지지 않는다. 밤에 자다가 기침이라도 하게 되면 옆구리가 결려서 돌아눕지도 못한다. 이런 지옥훈련을 몇 달하고 나니 연습장에서 치는 볼은 드라이버는 물론 롱 아이언까지도 프로만큼 칠 수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습장에서 살다보니 힘이 들면 연습그린에서 퍼팅연습까지 겸해서 했다. 그뿐이 아니다. 연습그린 옆 잔디가 긴 지역에서는 핀을 향해 어프로치 샷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참으로 좋은 환경 속에서 연습은 계속됐다.

 

프로와의 동반라운드

프로의 지도하에 연습공을 치기 시작해서 3개월쯤 지났을 때다. 이쯤 되면 코스에 나가도 파플레이를 할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혀 프로에게 코스 라운드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다음날 일요일 오후 드디어 대망의 라운드는 시작됐다. 첫 홀의 티샷은 프로만큼 페어웨이 복판으로 날아갔다. 그 다음부터가 미스 샷의 연속이다. 페어웨이가 연습장처럼 평탄한데가 한군데도 없다. 왼발이 높을 때도 있고 볼이 발끝보다 높은 때도 수시로 나타난다. 이렇게 어렵게 어렵게 프로와의 첫 번째 라운드는 끝이 났다. 스코어를 따지지는 않았지만 볼 1박스(12개)를 갖고 가서 18홀 돌고나니 2개가 남아있었던 기억이 난다. 공이 산으로 들어가면 찾지 않고 그냥 다른 공으로 다시 쳤다. 굳이 스코어를 따지자면 아마 130타 쯤 친 것으로 생각된다. 연습장과 실제 코스가 이렇게도 차이가 나는 줄은 처음 알게 됐다.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않았다. 공 10개를 잃어버리는 첫 번째 라운드에서 배운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도 생각났지만 아무리 좋은 재능을 가지고 훌륭한 지도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직도 더 많은 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통감하게 됐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평범한 진리를 늦게나마 되씹게 된 것도 5전 5승 무패의 클럽챔피언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유지한 채 50년이 넘는 골프인생을 자랑스럽게 되돌아 볼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이때의 아픈 경험이 약이 된 것이다.

 

별명 ‘우승컵’

프로와의 첫 번째 실전지도를 받은 후 2~3주가 지났을 때 다시 한 번 도전하기로 했다. 프로와의 두 번째 라운드에서 98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게 되었다. 골프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100을 깬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공인 핸디캡 30으로 인정받아 클럽에 등록하게 되었다.

핸디캡 30을 부여 받고나니 클럽에서 개최하는 각종 경기에 참가 할 수 있게 되었다. 핸디캡 1~18까지는 A조, 19~30까지는 B조로 구분해서 출전자격을 주는 것이다. 첫 번째 참가한 경기에서 86이라는 놀라운 기록이 나왔다. B조 우승은 물론 공인 핸디캡이 30에서 18로 내려오는 어마어마한 영광까지 않게 된 순간이다. 공인 핸디캡 18에서 10까지 내려오는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시 나는 서울 JC(청년회의소)의 국제이사로 봉사하고 있었다. 한국 JC중앙회 회장은 동아제약의 강신호 회장님이셨다. 주말이면 강신호 회장님과 고인이 된 한국남 박사님 산업은행의 엄익채 이사님 그리고 나 4인이 자주 골프장에서 회동하게 됐다. 이때 강신호 회장님이 “mr. 우는 경기에 나갈 때마다 우승을 하니 아예 우승컵이라고 부르자”하고 제 별명을 붙여주셨다. 얼마나 재치 있는 발상인지 모른다. 이 별명은 지금도 애용하고 있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강신호 회장님! 고맙습니다.”(위에 열거한 세분은 당시 KBS방송국이 남산에 있을 때 재치문답 3총사로 유명했다. 골프는 언제 시작해도 죽는 날까지 할 수 있는 스포츠다. 골프는 걸을 수 있으면 시작해서 걸을 수 없을 때 끝이 난다. 핸디캡 30에서 시작한 골프가 스크래치 플레이어가 된다 해도 천수를 다 할 때가 되면 골프기량은 다시 원점(핸디캡30)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나의 골프인생 후회는 없다

핸디캡 30에서 시작한 골프가 핸디캡 3까지 내려갔다. 베스트스코어 68(안양CC), 클럽챔피언 5회, 그것도 클럽 챔피언경기에서 져 본 일이 없는 5전 5승 무패 기록. 골프해설 30년(MBC, KBS, SBS, JTBC), 골프칼럼 스포츠서울 신문연재(3.750회) 언더 에이지 슈터 72세 때 71타(일본 미야자키 아오시마CC), 한국 최초의 대학 학점제 강의(1990, 한국체육대학), KGA 경기위원장을 거쳐 지금까지도 BMW KOREA의 경기위원장의 중책을 맡아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이것이 굵직한 나의 골프이력들이다. 이 모두가 대학시절(연세대 영문과) 학생회장을 엮임 했던 사명감과 남달리 강한 프라이드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렇게 화려한 골프 인생을 살아온 나에게도 아직도 남은 소박한 꿈이 있다. 그것은 99세(白壽)때 99타의 에이슈터가 되는 것이다. 그 날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걷는다 하루에 6km 씩 한강변을 걷기도 하고 집근처 중앙도서관 뒤 몽마르트 공원을 거쳐 서울 성모병원 뒷산까지 오르내리면서 체력을 비축하는 것이다. 매일 걸으면서 넋두리 같은 자작시도 만들었다.

한 시간을 걸으면 하루가 즐겁고

한 달을 걸으면 일 년이 건강하고

일 년을 걸으면 십년이 젊어진다.

A day is happy, if I walk for one hour.

A year is healthy, if I walk for one month.

Ten years are young, if I walk for one year.

에이지슈터의 꿈을 안고 백수는 자작시를 되새기며 오늘도 걷고 있다. 인생은 골프를 통해서 아름다운 것이다.

 

안양CC 회원이 된 비화

당시 서울에는 서울CC, 한양CC, 뉴코리아CC, 관악CC, 안양CC가 있었다.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심사가 있기는 했지만 돈만 내면 회원이 될 수 있었던 그런 시절이다. 안양CC는 1968년에 개장했다. 1972년 4월 정식으로 회원승인이 나기 전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비회원 자격으로 자주 찾아갔던 골프장이다. 매우 아름답고. 코스는 어렵고 그러면서도 편안한 곳이 안양CC였던 것이다. 그래서 안양CC의 회원이 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루는 안양CC의 회원이었던 집안 어른이 안양CC에서 회원 모집을 하니 입회원서를 제출하라는 연락이 왔다. 입회원서를 작성하다보니 안양CC 회원 2명의 보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입회자격의 연령은 만40세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그때 내 나이 35세였으니 나이야 어쩔 수 없지만 보증인만은 확실한 분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궁리 끝에 떠오른 분이 이병철 회장님의 사돈인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님과 민복기 법무부 장관님이셨다. 입회원서를 제출하고 나서 4개월이 지났을 때다. 운영위원회에서 입회 승인이 났으니 수속을 밟으라는 내용이었다.(당시 운영위원장은 이병철 회장님이셨다.) 친구 4명이 함께 신청했는데 연락을 받은 것은 나 혼자 뿐이었다. 만 40세가 안 돼 결격사유가 분명한데 입회 할 수 있었던 것은 100% 보증인 두 분의 영향이라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입회 후에도 검증은 계속 되었다. 하루는 민복기 장관님께서 연락이 왔다. 미스터 우가 제출한 입회원서에 잘못이 있으니 안양CC 사무실에 확인해 보라는 것이었다. 입회원서에는 빨간 글씨로 고쳐진 두 군데가 있었다. 그때 나는 관악CC와 한양CC의 공인 핸디캡이 6이었다. 그대로 6이라고 기입하면 젊은이가 공만 친다고 꾸지람을 들을까봐 9라고 적었던 것이다. 이병철 회장님의 지시에 따라 회사에서 관악과 한양에 직접 확인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9가 6으로 정정되었고 나는 허위신고를 한 셈이 되고 말았다. 검증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루는 육군 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지내셨던 김정렬 회장님이 연락이 왔다. 다음 일요일 안양CC에서 같이 골프를 하자는 내용이었다. 그 날 라운드가 끝나고 식당에서 하시는 말씀이 사실은 회장님(이병철 회장님을 지칭)이 자네가 입회를 했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노이지 않으니 시험을 해보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어른들 앞에서 골프를 배웠으니 에티켓, 룰, 매너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는 부분이었다. 이렇게 해서 진정한 의미의 안양CC의 회원이 되었고 클럽 챔피언을 할 때마다 클럽하우스에서 회장님한테 저녁을 대접받은 일이 잊혀 지지가 않는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일요일이면 출발 시간 전에 연습그린 옆에서 벙커 샷도 같이하고 퍼팅도 함께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참 좋은 세월을 보냈던 나의 골프인생이 아니었던가. 안양CC에서 받은 사랑은 이것뿐이 아니다. 당시 각 골프장은 회원 수가 적었기 때문에 회원은 각각 자기의 지정 락커가 있었다. 대개 입회순에 따라 락커가 배정됐다. 관악CC는 16번(관악CC 6번이지만 1번부터 15번까지는 명예회원들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입회비를 내고 회원이 된 순서로는 내가 1번 회원이었다.) 이었고, 한양CC는 250번이었다. 그런데 안양CC만은 달랐다. 락커실로 들어가 맨 끝인 욕실 앞줄이 소위 말하는 VIP의 락커다. 한 줄에 5개 락커가 붙어 있었다. 왼쪽부터 1번이 홍진기 회장님, 2번이 민복기 장관님, 3번이 이승만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안휘경 변호사님, 4번이 을유문화사 정진숙 회장님 그리고 끝번인 5번이 내 락카로 지정됐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당시에는 락커에 골프채를 비롯해서 갈아입을 옷가지 등 한 살림을 전부 놓고 다니던 시절이니 그 VIP줄에 배정 받았다는 것은 이만 저만한 배려고 아니고서는 받기 어려운 사랑이고 특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곳이 안양CC다. 지금도 골프를 생각하면 안양CC 시절이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다. Forever Anyang CC!!

 

환갑을 바라보는 골프인생, 이제 겨우 철이 들고

내가 골프채를 처음 잡은 지 어느새 환갑(60년)을 바라보게 되었으니 새삼스럽게 세월의 빠름을 실감할 수 있다. 흔히 골프를 인생행로에 비유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추억 속에 잠겨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날이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정신없이 골프채를 휘둘러대던 젊은 시절에는 스코어에 매달려 골프의 참 모습을 모르고 지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골프와 만날 수 있었던 제 인생의 행운을 고맙게 생각하며 새삼스럽게 골프의 참 뜻을 깨닫게 되었다. 호쾌한 1타를 추구하면서 아무리 연습을 거듭해도 굿샷 보다는 미스 샷이 많았던 지난날들. 그러나 미스 샷이 났을 때 자학과 후회보다는 반성과 인내 속에서 좀 더 노력하고 분발했던 골프인생이 아니었던가. 골프는 이긴 경기보다는 진 경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 했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이듯 미스 샷 뒤에 나타나기 쉬운 불쾌한 감정을 억제하는 겸허한 마음이 앞서야 한다는 것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알게 되었다. 골프는 한 홀 속에 굿샷과 미스 샷이 성공과 실패가 거듭되는 인생살이처럼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이제 겨우 알 것만 같다. 살아온 날 보다는 떠나야 할 날이 많지 않은 지금에 와서 늦게나마 철이 들어가고 있는가 보다. 이런 골프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골프채 14개 외에 또 한 개의 비밀클럽을 갖고 다녀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지성’ 이라는 이름의 클럽이고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속 깊이 담겨있는 ‘품격 있는 도구’다. 마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지성’이라는 클럽이 한 홀의 플레이를 마무리하는 퍼터보다도 더 소중하고 고귀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앞으로 여생 ‘지성’이라는 비밀클럽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품격 있는 골프인생’을 살아갈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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