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독재정권과 서울CC 군자리 골프장 시대의 마감
박정희 독재정권과 서울CC 군자리 골프장 시대의 마감
  • 강인구
  • 승인 2021.08.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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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CC의 탄생과 그 뒤안길 연재 마지막

 

프롤로그

 

2021년 여름이 ‘쥴리’의 스캔들로 더욱 뜨겁다. 누군가의 과거가 미화되고 왜곡되는 것은 식민지성에 속앓이하는 한국 사회에서 다반사다. 
‘조국의 시간’ 속에 한때 ‘영웅’ 취급받던 전 검찰총장의 과거사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착각이나 오류 그리고 무지(無智) 조차도 자유라고 한다면 미군은 ‘점령군’이고, 5.16은 쿠데타이고, 유신은 독재이고, BBK는 MB 소유이고,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귀결이고,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정책’은 실패하고 성상납도 독직이고, 윤석열은 위험한 ‘정치 검사’라는 팩트도 불편한 진실 아닐까? 우리가 과거사를 들여다보는 짓도 불편한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 아닌가? 

 

서울컨트리클럽의 골프장 부지 매입

 

군자리 코스 1번홀 풍경(1972년)
군자리 코스 1번홀 풍경(1972년)

 

박두병 서울CC 이사장의 사퇴로 김종락 이사가 새롭게 이사장에 선출되었다. 김종락 이사장은 당시 5.16 군사쿠데타 실세인 김종필 공화당 의장의 친형이다. 서울CC 부지 불하 문제를 넘겨받은 신임 김종락 이사장과 최재봉 전무이사 체제는 가장 먼저 1개월 뒤 1968년 5월에 그동안 누적된 불공정으로 발생한 서울CC 캐디들의 총파업부터 맞닥뜨리게 됐다. 
남녀 캐디 230여 명은 정규근무 외 무보수 잡역을 시키지 말라며, 군대식으로 캐디를 다루려는 최재봉 전무의 사퇴 등 요구사항을 제시하면서 파업에 들어갔다.(『동아일보』, 1968.5.17.)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에 보면, 직접적인 도화선은 그린 보수공사에 캐디들을 무보수로 동원시키고, 캐디팁을 폐지시켰기 때문이었다. 또한, 캐디 총파업을 겪으면서 서울CC에서 남자 캐디는 줄어들고, 여자 캐디 중심으로 변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서울칸트리구락부(서울CC) 창설이후 숙원사업이던 골프장 부지 문제가 15년 만에 부지 매입으로 타결을 보게 됐다. 서울CC 집행부는 1968년 5월 19일 임시총회를 소집했고, 김종락 이사장은 골프장 부지 불하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코스 부지 불하 문제는 입찰 전에 임시총회에 부의 하기로 했으나 부득이 우선 입찰에 응해야 했다. 그래서 10억 5백만원으로 낙찰이 되었다. 곧 정시계약을 하게 된다. 이제 총평수 21만 3천평을 10억 5백만원으로 사야 하는 데 그 매수 자금 염출이 다음의 큰 문제이다.”(『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 2004)

 

김종락 이사장의 생각

 

서울CC 집행부는 골프장 부지 불하대금의 마련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그동안 부지 불하에 공이 큰 관계기관 공무원들에게 그 대가로 서울CC 대우회원증을 발급해 주었다. 지금은 불법이 당시에는 관행이었나 보다. 대우회원증을 받은 공직자들 명단은 문화재관리국 국장 하갑청, 문화재관리국 관리과장 엄정흠, 청와대 의전비서관 조상호, 재무부 재정차관보 이재설, 재무부 세정차관보 김용환, 서울시 제1부시장 이기수 등이었다.(『용감한 개척자들:한국골프의 요람기』, 1987)
또한, 서울CC 골프장 부지 불하대금은 10억 5백만원을 일시에 납부할 경우에 3할 공제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서울CC 집행부는 7억원을 일시에 납부해서 부지를 매입하기로 결정하고, 예금 잔고 2억원에 실제 부족액 5억을 모금하는 방식으로 대금 마련을 추진해 나갔다. 부족액은 신규회원 200명을 유치해서 2억원을 만들고 은행융자로 나머지 3억을 충당하기로 했다.(『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 2004) 김종락 이사장은 어떻게 하든 기존 회원들에게 부지 불하대금에 대한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을 선택했다.

 

김성곤 이사장의 방식

 

그러나 1969년 4월 김종락 이사장 후임으로 서울CC 부지 불하대금의 완납과제를 떠맡은 신임 이사장 김성곤(동양통신 사장)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김성곤 이사장은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고 있던 당시 정계와 재계의 거두였다. 신용남의 회고록에 보면, 당시 김성곤의 ‘정치자금’ 심부름은 나중에 쌍용엔지니어링 사장까지 오른 임봉규가 도맡아 했다고 한다.(『골프 교우 50년』, 2004)  
김성곤 이사장은 공화당 의장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공화당 당무위원 김석수 등과 함께 4인 골프팀(일명 4K)을 구성할 정도였다. 김성곤 신임 이사장의 집행부는 먼저 신입회원 가입금을 개인 150만원, 법인 500만원으로 각각 인상했다. 김성곤 이사장은 재계 인맥을 동원해서 2개월 만에 11개 법인회원을 모았다. 낙희화학, 한국나이론, 대한농산, 일신산업, 건설실업, 연합철강, 기아산업, 현대건설, 대한일보사, 대한금융단, 대명광업 등이었다.(『용감한 개척자들:한국골프의 요람기』, 1987) 이같은 신임 이사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골프장 부지 불하대금을 마련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김성곤 서울CC 이사장은 골프장 부지 불하대금에 대한 이전 집행부의 결정에 직접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높은 신분의 권리에는 의무가 따르게 마련이다.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를 안 지려 해서는 신사의 도리가 아니다. 코스 부지 매수금과 클럽하우스의 신축 대금을 회원에게 부담시키지 않기로 한다는 이전의 총회 결의는 잘못된 것이다. 회원이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권리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했다.(『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 2004) 그는 서울CC 부지 매입자금 해결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 회원 공동부담 방식을 택했다. 
1969년 5월 28일 서울컨트리클럽에서 개최된 아시아골프연맹(AGC) 총회에서 김성곤 이사장이 신임 연맹회장으로 선출됐고, 제4회 아시아 아마골프선수권대회가 한국, 일본, 대만 등 7개국 국가대표 골퍼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CC에서 열렸다. 한국 대표로 출전한 재일교포 김영창 선수가 개인전에서 9위, 한국 대표단은 단체전에서 5위를 차지했다.(『경향신문』, 1969.6.2.) 제5회 아시아아마골프선수권대회는 인도의 뉴델리에서 열기로 결정됐다. 
마침내, 1969년 말 또다시 소집된 서울CC 임시총회를 통해 김성곤 이사장을 재신임하고, 당시 실세인 박종규, 최세황을 신임 부이사장, 최용관을 전무이사로 교체했다. 공청회까지 거쳐서 골프장 부지 불하대금에 대한 서울CC 회원들의 공동 부담을 확정하고, 서울CC 회원수를 1969년 11월 15일 현재 1,156명으로 제한시켜 회원들 각자에게 부지 불하 대금으로 4년에 걸쳐 매년 10만원씩 납부하도록 했다. 
골프장 부지 불하대금의 충당을 위한 회원 분담금 10만원은 다음 해에 2만원이 인상되어 12만원으로 됐다.(『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 2004)
서울CC 군자리 골프장 개장 이래로 코스 부지 문제는 임차방식으로 시작해서 최종적으로 국공유지 불하방식을 통한 매입으로 완결되는 듯 보였다.

 

한국프로골프협회 창립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기자회견 모습(1965년)

 

1968년에 한국프로골프협회가 탄생하는데 산파역을 한 사람이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라는 것은 모두들 인정한다. 한국프로골프협회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프로골퍼 친목회’ 정도가 있었다. 
당시 연덕춘을 비롯한 몇몇 프로골퍼들이 국내 골프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프로골프협회의 필요성을 호소했다고 한다. 1968년 5월쯤 박명출, 배용산, 연덕춘, 이일안, 조태운, 한장상 등 프로골퍼들이 ‘창립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한국골프 100년』, 2001) 김형욱 중정부장은 평소 골프경기를 통한 국위 선양이나 프로골퍼 협회의 역할을 자주 언급했다. 프로골프협회 준비위원회 위원장직을 수락한 김형욱의 물심양면 뒷받침과 재계 인사들의 협력에 기반해서 한국프로골프협회(KPGA)가 창립되었다.
1968년 5월 22일 서울컨트리클럽에서 개최된 창립총회 석상에서 김형욱 준비위원장은 개회사를 통해 “아직까지도 골프에 대해 일부 비판적인 여론이 없지 않으나 골프가 지니고 있는 체육적 친선의 비중으로 보아 기필코 건전한 방향으로 육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할 프로골프협회의 창설이 국제적인 동향으로 보아서도 시급한 때에 오늘 PGA의 창립을 보게 되었다”고 강조했다.(『한국골프총람』, 1973) 

 

한국프로골프협회 창립 임원

 

한국프로골프협회 창립에 김형욱의 역할은 특별했다. 1968년 여름 서울CC 헤드프로 박명출과 홍덕산의 요청을 받은 김형욱은 프로골프협회에 필요한 기금을 모으는데 발 벗고 나섰다. 재계인사 21명으로부터 각각 1백만원씩 모두 2천여만원을 모금했다. 김형욱이 한국프로골프협회를 만들다시피 했고, 당시에 ‘서울CC 이사 허정구를 프로골프협회 이사장으로 앉히고 기금모금에 협조했던 일부 재계 인사들을 이사로 그리고 본인은 고문에 앉았다’고 한다.(『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 2004) 1968년 7월 말경 한국프로골프협회는 문교부에 법인체 인가신청을 냈다. 
당시 골프광으로 알려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무소불위 권력을 쥐고 있었다. 한장상 프로골퍼의 회고에 의하면,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 취임 직후 골프를 배웠고, 중앙정보부 안에 인도어 연습장을 만들어 김성윤 프로를 데려다 레슨을 받았다’고 한다.(『중앙일보』, 2007.6.3.) 공교롭게도 김성윤 프로는 김형욱 중정부장 때문에 고초를 겪게 된다.
한국프로골프협회의 창립 임원에는 김형욱(고문), 허정구(회장), 박용학(부회장), 김흥조(전무이사), 연덕춘(상무이사), 이사에 구철회, 권철현, 김광균, 김종희, 김창원, 박건석, 유희춘, 이원천, 전택보, 정영호, 정주영, 정천석, 조봉구, 최준문, 하태 15인, 감사에 성상영, 장상태를 선임했다.(『서울컨트리클럽 60년사』, 2016) 
한국프로골프협회 초대 회장 허정구의 골프 인연은 1954년 수도 환도 직후 제일제당 전무 시절에 이병철 사장이 일본 출장 후 느닷없이 골프채를 주면서 함께 골프를 하자고 한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삼성’의 ‘3’자가 바로 이병철, 조홍제, 허정구를 가리킨다는 말도 있다.(『골프 교우 50년』, 2004) 
당시 협회에 소속된 프로골퍼의 실력을 팩트체크 해보면, 한장상 프로 1위(72.1), 이일안 프로 2위(73.5), 조태운 프로 3위(75.1) 등을 기록하고 있었다. 외국 프로골퍼들은 언더파를 치는 선수들이 다수였지만, 한국 내 프로골퍼들은 아직 오버파 수준에 머물렀다.(『조선일보』, 1969.12.28.)

 

서울CC의 군자리 골프장 부지 매도

 

박정희 대통령의 골프스윙 모습(1968년)
박정희 대통령의 골프스윙 모습(1968년)

 

1969년 국내 최대 이슈는 ‘3선 개헌’이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 조차도 “지금 한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출마를 허용하게 하는 개헌문제를 둘러싸고 정치적 소용돌이가 움트고 있다”고 보도할 지경이었다.(『경향신문』, 1969.2.3.) 
<네이버 지식백과>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연일 대학가를 중심으로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을 저지하기 위한 3선 개헌 반대투쟁이 벌어지고, 야당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개최해 개헌 저지투쟁에 나섰다. 하지만 1969년 9월 14일 일요일 새벽 2시에 국회에서 개헌저지 점거 농성을 하던 야당 의원들을 따돌리고 별관에서 집권당 의원 122명만이 모여 개헌안을 변칙통과시켰다. 3선 개헌은 영구집권을 획책하던 박정희 군사정권에게 실마리를 제공했다. 
1969년 말 서울CC 내부에서는 골프장 부지 불하대금 처리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중에 골프장이 곧 매각될 것이라는 풍문이 돌고 있었다. 우연에 일치인지, 벌써 오래전에 부동산 하면 ‘땅봉구’라던 한양CC 창업자 조봉구는 서울CC의 운명에 대해 예언한 적이 있었다.

 

1971년 한국오픈 겸 아시아서키트 대회 현수막. 군자리 코스가 폐쇄되기 1년 전이다.
1971년 한국오픈 겸 아시아서키트 대회 현수막. 군자리 코스가 폐쇄되기 1년 전이다.

 

서울CC 이사이자 한양CC 창업자 조봉구 사장의 1964년 초 발언이 주목되는데, “한양CC의 회원증을 23만원에 분양 중인데 가입 희망자가 많다… 서울CC가 이렇게 성장한 만큼 입회금을 30만원으로 올려도 지나치지 않다. 클럽하우스 신축, 코스 부지의 불하 그리고 제2의 서울CC 부지 선정 등 그 용도에 따라 회원을 100명에서 200명까지 모집함이 바람직하다”고 했다.(『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 2004) 조봉구는 ‘부동산 왕’답게 이미 5년 전에 서울 능동 소재 군자리 골프장 부지의 앞날을 예견하고 있었다.

 

‘어른의 낙원’에서 ‘어린이 낙원’으로

 

능동 서울CC 자리에 지어진 어린이대공원 개장식에서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어린이 대표
능동 서울CC 자리에 지어진 어린이대공원 개장식에서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어린이 대표

 

1970년 12월 4일 서울시청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시정 브리핑을 통해 “이(서울CC:필자) 주위는 이미 도시화되었고 마이카로 골프를 치는 사람들에게는 골프장이 도심지에서 떨어져 있어도 골프를 칠 수 있으니 이곳에 대규모의 어린이공원을 만들라”고 전격적으로 지시를 내렸다.(『경향신문』, 1970.12.5.) 
당시 시중의 여론은 서울 성동구 능동 438번지에 소재한 서울컨트리클럽을 미국의 디즈니랜드처럼 만들어 ‘어린이 낙원’으로 조성될 것이라고 한껏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서울CC 입장에서는 오랜 숙원사업이던 골프장 부지 문제의 해결을 거의 완성단계에 도달한 시점에 느닷없이 날벼락 맞은 셈이었다. 코스 부지 불하대금도 절반가량 지불한 상태였고, 새 클럽하우스에 막 입주하려던 차에 그 충격 속에서 서울CC 이사회가 열렸다. 12월 15일 회의에서는 골프장 새 부지 물색과 함께 군자리 골프장의 부지 보상을 위한 대책 마련과 대토를 받아 새 코스를 마련할 준비를 서두르자는 결론을 내렸고, 서울CC 집행부를 주축으로 회원 총 48명이 포함된 ‘군자리 코스 대책위원회’를 급히 구성했다.(『서울컨트리클럽 60년사』, 2016)
『서울컨트리클럽 60년사』에 보면, 사실상 김성곤 이사장은 1970년 7월경에 군자리 골프장의 공원화에 대해서 서울시로부터 ‘제안’을 받았으면서도 3개월 이상을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 김성곤 이사장은 당시 세간에 알려지기로 집권당의 ‘금고지기’로 유명했지만, 서울CC에서는 클럽의 지배인이 집이 없음을 알자 13번홀 좌측 언덕에 사재로 집을 지어준 의인이기도 했다.(『골프 교우 50년』, 2004) 서울CC는 서울시와 ‘흥정’하기 전에 골프장 부지 불하대금을 완납해야만 불하계약도 유효할 수 있었다. 
서울시는 1971년 4월에 ‘서울 어린이 대공원’의 마스터플랜을 확정하고 발표했다. 당시 『경향신문』 4월 20일자를 보면, “서울시 성동구 능동 438 번지에 위치한 서울CC 21만 2천 9백 91평에 들어설 대공원을 서울시 예산 17억 5천 2백 70만원, 민간자본 7억 1백 30만 원 등 총 24억 5천 4백만원을 들여 8월에 착공해서 2년 뒤에 완공할 것”처럼 포부를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서울CC는 골프장 이전 후보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서울시는 어린이 대공원의 규모를 대폭 축소하게 되어 박정희 대통령의 전격적인 지시사항에도 불구하고 다소 김이 빠진 채 해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 휴전 다음 해 군자리 골프장이 개장된 뒤 서울CC의 최대 숙원사업이던 ‘부동산’ 문제가 우여곡절 끝에 완결단계에 도달하자마자 서울CC는 외형적으로 서울시 도시개발정책에 떠밀려 그 골프장 부지를 비우고 옮겨가야만 했다. 김성곤 이사장은 그동안 ‘어른의 낙원’이던  군자리 골프장의 폐쇄에 봉착하게 됐다. 1971년 6.3개각 조치 후 김종필 전 공화당 의장이 국무총리로 기용된 뒤 서울CC 집행부의 악재는 계속 겹쳐 10.2 항명 파동의 주동자로 지목된 김성곤 이사장이 ‘금고지기’로부터 물러나 의원직까지도 상실되고, 심지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까지 당하게 됐다고 한다. 소위 유신독재의 검은 연기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군자리 골프장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의 미국기자 접견 모습(1968년)

 

1971년 말 군자리 골프장 이전 문제를 떠안은 서울CC 새로운 집행부는 이사장에 서정귀 호남정유 사장, 부이사장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이보형 범한화재보험 사장을 각각 선출했다. 서정귀 신임 이사장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대구사범대 동기동창이고, 줄곧 대통령 경호를 도맡아 한 박종규 부이사장은 대통령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실세 중 실세였다. 
박종규 경호실장의 서울CC 이전 문제에 대한 공개적인 발언에 대해서 『서울컨트리클럽 60년사』에 보면, “(서울CC) 이사 각자는 코스 이전 문제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확립해야 한다. 클럽의 이전은 불가피하고 이미 결정된 사항인 만큼 동상이몽을 해서는 안 된다. 서울시의 계획에도 협조해야 한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박종규 부이사장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출범과 함께 예편한 육군 대령답게 서울CC 이전 문제에 단호했다.결국, 1972년 10월 말일 ‘어린이 낙원’을 위해 마침내 서울CC 군자리 골프장은 문을 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최종적으로 서정귀 서울CC 이사장은 ‘골프장 부지 21만 3천평 가운데 12만평을 서울시에 무상으로 기증하고, 나머지 9만 3천여평을 한신부동산 측에 27억원(평당 3만원)에 매도’한 것으로 세간에 알려졌다.(『매일경제』, 1972. 7. 20)

 

군자리 시대를 마감하며 회원들이 펴낸 책자. 코스 사진과 함께 회원 명단이 게재돼 있다.
군자리 시대를 마감하며 회원들이 펴낸 책자. 코스 사진과 함께 회원 명단이 게재돼 있다.

 

이렇게 서울CC는 군자리 코스를 어린이공원을 위해 기증한 후 고양시 원당으로 옮기게 됐다. GJ

 

 

By 강인구(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사진 서울CC,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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