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의 서울CC 부지 불하와 한양CC 개장
박정희 정부의 서울CC 부지 불하와 한양CC 개장
  • 강인구
  • 승인 2021.07.26 07: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울CC의 탄생과 그 뒤안길 연재 ⑥

 

1980년대 효릉 전경
1980년대 효릉 전경

 

“원래 토지소유권이 생긴 것은 인류가 부족사회를 구성할 때부터 비롯하였지만 원시사회 및 봉건사회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항시 문제되는 것은 개인 소유권과 공동사회와의 상호이해관계를 명확히 가려낼 것을 요구한 점이다. 즉 역사를 통해서 볼 때, 토지에 대한 개인의 절대소유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국가 자신도 공동사회에 의해 시시(時時)로 마련된 조건에 종속되어 왔다는 것이다…” (윤치영/서울시장, 『국회보』 36, 1964.5.)

 

프롤로그

 

“문(問) : 국유지를 불하(拂下)받으려는데 그 절차와 방법을 말씀해주십시오. 그리고 불하한 후의 조건은 어떻게 결정하는 것인지요?

답(答) : ①1962년 7월 14일 이전에 대부를 받았거나 점유한 자에 대하여는 수의계약으로 매각할 수 있습니다. ②농경지는 시, 읍, 면장이 추천하는 자에 대하여 수의 또는 지명입찰케 하고, ③기타는 일반공매에 부치게 되는데 전기 ①②의 경우 신청인은 토지대장등본과 도면 및 거주증명서 각 1통씩을 첨부하여 당해 관재국에 신청하면 됩니다. ④불하자격은 관계없으며 불하 후의 조건은 계약 당시 조문으로 5개년 기한으로 분납 또는 일시불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 이는 매수자의 요구에 의합니다. -재무부 관재국-” (『경향신문』, 1963.6.28.)

 

현재 가짜뉴스의 나쁜 토양은 직업인으로서 윤리의식의 고갈이고, 그 원천은 기사라는 상품을 만드는 자료를 누가, 어디서, 어떻게 공급하는지를 밝히지 않고 ‘self made’인 것처럼 거짓부렁 하는 위선적 행위이다.

 

서삼릉 땅 불하와 한양칸트리구락부의 개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보면, 서삼릉은 사적 제200호로 조선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 씨의 능인 희릉지로 선택된 곳이고,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 박 씨의 효릉이 자리 잡아 중종과 인종 2대 능지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뒤 1864년 철종과 그의 비 철인왕후 김 씨의 예릉이 들어서면서 ‘서삼릉’이라는 명칭을 얻게 됐다고 한다. 지금 서삼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상황인데, 아직도 효릉은 유일한 비공개 왕릉이다.

최초로 편찬된 ‘한국골프사’라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한국골프총람』에는 한양CC(현 서울한양CC: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소재)의 골프장 건설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1972년 그랜드호텔 모습
1972년 그랜드호텔 모습

 

“조봉구는 당시 그랜드빌딩 모체기업인 동광기업을 운영, 그 방계회사로 한양관광주식회사를 출범시켰다. 한양칸트리클럽은 창설 당시 민병도를 대표이사로 조봉구, 안중희, 유창순, 전예용, 김영원, 장호식 등을 이사진으로 해서 출발했다. 한양관광주식회사의 설립은 1963년 12월 3일이었고, 사무실은 그랜드호텔 내에 두었다. 칸트리클럽 기공은 1964년 3월 1일, 골프장 개장은 착공 6개월만인 1964년 9월 28일이었다. 경성골프구락부 전신인 효창원 코스가 개장한 때로부터 정확히 44년 만에(효창원 골프장이 1921년 6월 1일에 개장됐기 때문에 43년 4개월이 정확함:필자) 생겨났다는 숫자풀이가 된다.” (『한국골프총람』, 1973)

1960년대 ‘부동산 왕’으로 이름난 조봉구는 선린상고를 졸업했고, 경남모방, 동강산업, 화동탄자(炭資), 동광기업 등을 설립했다. 한때 지금처럼 강남이 개발되기 전 서울 잠실벌은 모두 그의 땅이었다. 지금도 인터넷 포털 사이트 구글(Google)에서 ‘돈병철 땅봉구’을 치면 뜬다.  

한양칸트리구락부 대표이사 민병도는 일제 강점기 때 자작 작위를 받은 민영휘의 손자로 태어나 일본 게이오(慶應)대학에서 유학했다. 1920-30년대 부친 민대식은 조선견직, 조선주조, 영흥탄광, 조선저축은행 등을 설립했고 한일은행장을 하면서 재계 거물로 부상했다. 일찍이 민병도는 민대식을 중심으로 한 민씨 일가가 설립한 부동산 임차사업체인 계성주식회사와 조선신탁주식회사 등의 대주주로 그의 부친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부산대 오미일 교수에 따르면, 1세대 민영휘에서 시작된 자본의 형성과 2세대 민대식에 의한 자본 축적과정이야말로 한국 자본주의 발달사에서 관료로 출발해 기업가로 변신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한다.(『근대한국의 자본가들』, 2014) 민대식도 식민지 때 경성골프구락부 회원이었다.

 

1965년 한일협정 조인식 장면
1965년 한일협정 조인식 장면

 

민병도는 문화 방면에도 남다른 소양이 있어서 해방 직후 을유문화사를 설립했고, 최초의 교향악단 고려교향악단의 창립에도 참여했다. 5.16 군사정권에서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하면서 군부 내 소위 ‘일본파’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민병도는 1965년 남이섬(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소재) 매수자가 됐다.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당리 산 38번지에 건설된 한양CC가 들어선 서삼릉 주변은 당시 그 부지의 시가가 평당 10원 정도였다고 한다. 1963년 조봉구 그랜드호텔 사장은 경매 때 평당 38원에 입찰해 낙찰받았지만, 부동산 대금업으로 손꼽히던 단사천은 36원으로 입찰에 참여해 유찰됐다. 단사천은 1950년대부터 명동 사채 시장을 주름잡던 ‘현금왕’으로 꼽혔다. 나중에 해성그룹을 세웠다. 서울CC 군자리 골프장 부지문제를 통해서도 확인되었듯이 당시 5.16 군사정권의 입장에서는 수의계약보다 공개 입찰을 통해 수익을 더 많이 남기려고 했다.(『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 2004) 

서삼릉 일대의 땅은 구황실 재산으로써 문교부 문화재관리국에서 관리하는 국유지였다. 5.16 군사정부는 구황실 재산을 역사적, 고전적 문화재로써 영구히 보존 관리하기 위해 제정, 시행해오던 구황실재산법을 폐지하고, 새롭게 1962년 <문화재보호법>을 공포하고 1963년에 <문화재관리특별회계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계속된 공무원 비리사건 때문에 해당 부처 기관장의 잦은 교체가 끊이지 않았다. 1963년 4월에 정문순 육군준장이 문화재관리국장으로 임명돼왔다. 발 빠르게 조봉구 사장은 서울CC에서 성동구 군자리골프장 부지를 불하받기도 전에 서삼릉 주변의 구황실 소유지 20만 평(『한국골프총람』: 23만 평)을 골프장 부지로 불하받는 데 성공했다.(『서울컨트리클럽 60년사』, 2016) 당시 세간에서 구황실 재산에 대해 얘기될 때면 표시 안 나게 묘한 욕망의 시기심을 자극하곤 했다.

 

“… 구황실 재산으로 관리되고 있는데 그 임야가 서울에만도 1백만 평, 지방은 1억만 평, 모두 통틀어 무려 1억1백만 평이나 되고, 대지는 서울에 50만 평, 지방에 60만 평, 모두 1백10만 평으로 엄청난 재산이다…. 1억만 평을 훨씬 넘는 임야와 대지는 전국 근 30개소에 흩어져 있는데 서울에서 가까운 곳은 서삼릉, 서오릉, 광릉, 동구릉, 태릉, 금곡, 사릉 등이 있고, 멀리는 간성, 해운대, 서산까지 그 푸르고 넓은 수풀을 뽐내고 있다.“ (『조선일보』, 1962.5.30.)

 

한양CC 초창기 코스 배치도
한양CC 초창기 코스 배치도

 

1964년 9월 28일에 전장 6,716 야드, 18홀로 개장을 한 한양컨트리클럽은 서울 서북방 불광동 박석고개를 넘어 산야가 청순하기로 정평이 있는 고양군 원당면에 명승지 서삼릉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한양CC는 골프장을 개장하기 전에 회원모집을 시작했는데, 우선 1차 회원 200명에 가입비 18만 원이었다. 당시 한양CC 전무 김중렬의 증언에 따르면, 한양CC 회원모집을 위해 첫째는 1차 회원 200명, 둘째는 가입금 18만 원, 셋째는 회원으로 가입한 후 언제든지 탈퇴할 수 있으며 타인에게 양도 가능, 넷째는 탈퇴할 때는 가입금을 반환한다는 내용을 담은 안내서를 배포했다고 한다.(『한국골프총람』, 1973) 1964년 말까지 한양CC 회원명부에는 일부 서울CC 회원들을 포함해서 380명이 등록됐다. 일본에서 유행한 소위 예탁금제 회원제를 도입한 한국 최초의 민간 기업 골프장이 탄생했다.

 

박두병 이사장의 능동 골프장 부지 불하

 

박정희 정부에서 서울컨트리클럽 집행부는 군자리 골프장 부지 문제의 해결방식을 임차방식에서 국공유지 불하로 갈아탔다. 5.16 군사정권은 <국공유재산처리임시특례법>에 근거해 국공유 재산을 대부받거나 점유한 자에게 수의계약에 의해 불하해주는 특전을 시행하고, 그 가격은 시가를 기준으로 해서 매수자가 그 대금을 일시에 납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부득이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할 때는 5년간 분할납부를 할 수 있게 했다.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에 보면, 박두병 이사장은 취임 직후 1965년 5월 서울CC의 ‘사활’이 걸린 능동 골프장 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위 <부지 불하 추진위원회>를 당시 ‘실세’로 구성하고 그 위원장직을 맡았다. 당시 <부지 불하 추진위원회>의 면면을 보면, 전 주미대사 김정렬, 한일은행 상무 김종락(공화당 의장 김종필의 친형), 공화당 의원 김성곤, 김진만, 민관식, 법무부 장관 민복기, 전 헌병총사령관 원용덕, 한일회담 대표 최세황, 대한체육회 부회장 허정구 등이었다.

<국공유재산처리임시특례법>은 정부가 연고자에게 국유재산을 수의계약으로 매각할 수 있는 기간을 1965년 6월 말로 한정하고 있었다.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에는 서울CC 코스 부지의 매수원서에 각서를 첨부해서 문화재관리국에 제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각서 내용은 골프장 부지가 도시 계획상 공원용지로 지정되어 있는 만큼 서울CC도 골프장 이외 부지 사용 목적을 결코 변경하지 않는다는 서약이었다.

1965년 6월 3일 박두병 이사장은 또다시 교체된 신임 문교부 문화재관리국장 하갑청을 직접 찾아가 골프장 부지 매수요구서를 제출했다. 전년도에 구속된 전임 문화재관리국장  정문순 대신에 이승만 정부 때 육군특무부대장(특무부대/1950년→국군보안사령부/1977→기무사령부/1991→군사안보지원사령부/2018) 출신의 하갑청이 임명됐었다. 하갑청 신임 문화재관리국장은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고, 정문순 전임 국장은 ‘구황실 임야부정불하사건’으로 구속됐다. 

박두병 서울CC 이사장은 1934년경 조선은행에서 재직할 때 골프를 처음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일찍 경성골프구락부 회원으로 가입했다. 그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 때 거상 박승직이다. 박승직은 <경성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했고, 또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과 <동민회> 평의원에 선임됐다. 서울CC 초창기부터 회원간 친선 경기로 ‘OB배(盃) 골프대회’가 성황을 이루었다. 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골프장에는 생맥주 통이 줄을 섰고, 동양맥주 주최 측에서 OB맥주와 청량음료를 무상으로 무제한 제공해 축제 분위를 만들곤 했다

당시 처음이자 유일무이한 민간회사 주최의 ‘OB배 골프대회’에 대한 추억의 한 장면으로 최인철 동양맥주 부사장은 『한국골프의 요람기』에서 “박두병 씨의 칸트리(서울CC:필자)에 대한 공헌도 있었지만, 그때 이사회에서 OB배(盃) 경기 때는 모든 비용, 식사, 음료수 끝난 후의 파티를 포함해서 이를테면 그린피까지도 OB 회사에서 전부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승인을 했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경기 때는 하도 맥주를 많이 마셔서 술에 취해 경기를 도중에서 포기한 분이 참 많았답니다“라고 회고한다. 하지만 경쟁업체인 조선맥주도 ‘크라운배(盃)’를 만들려는 가열된 모습 끝에 OB맥주 골프대회는 중단되고 말았다. 박두병 이사장의 골프 사랑은 그대로 자손들에게도 이어져 나중에 장남인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은 춘천CC(현 라데나CC)를 건립하게 된다.  

서울CC 박두병 이사장이 하갑청 국장을 방문한 뒤, 문화재관리국과 상업은행, 국민은행에서 관계자들이 능동 서울CC의 코스 부지 가격을 감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에 따르면, 군자리 골프장 부지의 불하 과정 역시 순탄치 못했다. 처음부터 국공유지 불하를 위한 시가 감정만 해도 해당 부처 실무선에서는 골프장 부지 같은 공원용지를 감정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감정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혼선이 초래됐다. 그다음 건설부에서는 골프장 부지가 도시계획공원 목적에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소유권이 이전된 이후에도 계속 코스 용지로 사용될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서울시 측에서는 이견을 드러내 부지 불하가 지체되었다. 서울컨트리클럽은 부지 불하에 원만한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서 당시 서울시장 윤치영을 서울CC의 명예회원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지금 같으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서 수사받고 구속되지 않을까?

어쨌든, 능동 골프장 부지에 대한 몇 차례의 은행 감정을 받고 나서야 문교부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원래 내정가격 3억원을 절충해서 감정시가 총 2억 2천 3백만원으로 결정했다. 1965년 9월 7일 서울CC 이사회에서 이 사실이 보고됐다. 불하 가격은 당국이 시가를 기준해서 정하고 계약 체결된 후 동시에 대금을 납부하면 3할 공제의 혜택이 주어졌다. 분납의 경우 대금의 1/5을 납부하여 계약을 한 후 잔액을 5년 이내 연이율 5% 이자와 함께 납부하는 조건으로 협의가 이루어져 나갔다.(『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 2004)

 

한국골프협회(KGA) 창립

 

박두병 이사장 시절 때 한국 골프계를 총괄할 기구로써 국제 교류의 대외 창구역을 전담할 한국골프협회의 설립문제가 또다시 제기됐다. 사단법인 한국골프협회에서 1985년 편찬된 『한국골프사』에 보면, 이미 1957년 5월경부터 서울CC 내부에 일명 ‘한국골프협회’를 두고 대외적으로 공식화가 필요할 때는 ‘한국골프협회 회장 홍진기’ 명의로 해서 공문서를 발송했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서울CC 이외에 1956년에 부산칸트리구락부(부산CC)의 코스가 건설된 뒤 8년 만에 한양CC가 개장됨으로써 골프협회의 신설이 가시화됐다. 먼저 1965년 7월 서울칸트리구락부 이사회에서 ‘한국골프협회창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추진위원으로 박두병, 최세황, 박건석을 선출했다. 9월 23일 남대문 사거리 그랜드호텔에서 서울CC, 부산CC, 한양CC 대표들이 참석해 한국골프협회(KGA: 1985년 대한골프협회로 명칭 변경)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초대 이사진은 회장 박두병, 부회장 구인회, 이사 김동준, 민병도, 박경규, 조봉구, 최세황 등이 선출됐다. 결국, 서울CC가 한국골프협회 탄생의 산파 역할을 했다. 

한편, 군자리 골프장 부지 불하의 담당 부처인 문교부에서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여전히 ‘해당 그린벨트 지역을 완전히 해제한 후에야 매각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에 의하면, 신임 문교부 장관 권오병은 서울CC 안희경 부이사장을 따로 불러서 공원용지부터 해제된 후 매각해야만 사회적인 비난도 없을 것이니 우선 그 행정절차를 밟으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서울CC 집행부는 국무총리, 기획원장관 등을 만나 협조를 구했지만, 성과를 얻지 못하다가, 1966년 1월에 가서야 결국 박두병 이사장은 ‘공원용지 해제와 적정 가격 불하’에 대한 진정서를 국무총리, 기획원장관, 문교부장관과 서울시장에게 제출했다.

하지만 서울CC 능동 골프장 부지 불하건은 1966년 9월경 문교부 장관의 교체로 또 지연됐다. 신임 문홍주 문교부 장관은 국유지 불하건의 선처를 요청하기 위해 방문한 박두병 이사장에게 “코스 부지 불하는 신중을 기해야 하는 문제인 바 내년의 총선이나 끝난 다음에 추진하게 될 것이다”라고 언질만 주었다. 10월 중순 박두병 이사장은 돌연 사퇴서를 던졌다.    

 

박정희 대통령과 태릉CC

 

1966년 태릉CC 개장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라운드 광경
1966년 태릉CC 개장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라운드 광경

 

1960년대 경향신문의 종이신문 1면에는 ‘기자석’이라는 고정된 정치 기사란이 있었다. 1964년 초여름 어느 날 청와대에 취재 나온 기자의 눈에 비친 박정희 대통령의 인상이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뒤뜰에서 골프를 즐기며 망중한의 한때를 가졌다. 귀염둥이 지만 군을 거느린 대통령은 짜임새 있는 몸매로 드라이버를 신나게 돌려 백구를 곧잘 날렸지만 간혹은 제대로 맞지 않아 백구의 진출은 인색하기도 했다. 한창 열을 쏟고 있던 대통령이 얼굴에 미소를 담은 것은 기자군(群)이 예고 없이 접근했을 때였다. ‘계엄령 하라서 기자 여러분도 일거리가 없어 파리 날리겠군.’ 대통령은 구김살 없는 조크에 담뿍 웃음을 심고선 기자들에게 골프를 권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1964.6.19.) 

 

1964년 6월 초에 ‘한일굴욕회담’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데모를 빌미로 대통령 취임 후 6개월여 만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6월 3일 밤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민기식 대장을 임명했다. 비상계엄은 3개월 뒤에 해제됐다. 민기식 대장 역시 1964년도 서울CC 신규 회원명단에 들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언제부터 골프를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1962년 6월경 군 복무를 하던 한장상 프로는 김종오 육군참모총장의 지시에 따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잠시 레슨했다고 증언한다. 최영정 전 조선일보 기자의 표현에 따르면, ‘연덕춘이 차분한 무드라면 한장상은 거친 야생마 타입’이라고 했다. 당시 서울 장충동에 소재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관 안에 한장상 프로가 직접 실내연습장을 만들었다. 박정희 의장의 골프채는 엔틱한 ‘스팔딩(Spalding)’이었다고 한다.(『한국경제』, 2001.5.9.)

5.16 군사정부에서는 심지어 경복궁 내에 잔디밭을 이용해 간이 골프장을 만들 계획까지 세웠다. 당시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1963년 10월 말경 문교부에서 경복궁 안에 현대적 오락 시설을 갖춘 골프장을 다음 해에 착공하기로 사업계획을 세웠다. 골프장 설치사업 계획안은 문화재관리국에서 작성해서 최종검토를 마치고 승인까지 받았다. 그 사업계획의 내용은 ‘경회루 동쪽 약 7천 평의 잔디밭 위에 오락 시설을 갖춘 골프장의 설치였고, 공사 자금은 문화재관리국에서 관리하는 여러 고궁과 구황실 재산에서 나오는 수입(연 7억원)을 기금으로 하여 추진’한다는 것이었다.(『조선일보』, 1963.10.22.) 여론을 의식한 듯 문교부 스스로 고궁 내 골프장 설치계획을 철회했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CC에서 라운드를 하려고 처음으로 찾은 때는 1966년 5월쯤이었다. 서울CC에서 처음 골프 머리를 올린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클럽하우스 안에 아직 귀빈실이 없었기 때문에 1번홀 티잉그라운드 잔디 위에서 그냥 골프화를 갈아신어야 했다. 대통령 경호문제 때문에 일반 라커룸으로 안내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신용남 한일은행 고문이 라운드 코치로 레슨했다. 그날 박정희 대통령의 티샷과 아이언샷은 엉망이었다고 한다.(최영정, 『골프 100년 인물사』, 2000)  박정희 대통령은 그 뒤 성북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뒷산 잔디밭에 사관생도, 현역 및 예비역 장교들을 위한 골프장 건설을 지시했다. 당시만 해도 태릉 하면 배 밭으로 유명해서 서울 시민들을 위한 유원지로써 야유회 단골 장소였다. 처음에 육군사관학교 뒷산 부지는 약 1만여 평 정도였는데 사관생도들의 교련장으로 적합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윤허가 떨어지자 교련장을 관리하던 장교들은 당시 서울CC 신태화 전무와 연덕춘 프로를 찾아가 현장 답사와 적합성 여부 등 자문을 요청했다.(『한국골프총람』, 1973) 급한 대로 태릉CC는 9홀 코스를 임시로 개장했다.

1966년 11월 5일 아침부터 태릉 육군사관학교 구내에 새로 마련된 태릉CC 개장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은 정래혁 육사교장으로부터 클럽의 명예회원증을 받았고 기념 시구를 했다. 개장식이 끝난 후 박정희 대통령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김성은 국방부 장관, 엄민영 내무부 장관과 한 조로 라운드를 했다.(『조선일보』, 1966.11.6.)

 

한양CC 구코스 1번홀
한양CC 구코스 1번홀

 

태릉CC의 설립목적이 현역 또는 퇴역 장성급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회원자격을 엄격하게 제한했지만, 골프장을 건설할 때 찬조한 박두병, 이병철 등 재계, 금융계, 정계 인사들로 구성된 공로회원들은 예외였다고 한다. 태릉CC로 시작된 군 골프장(체력단련장)은 현재 전국에 33개나 된다. GJ

 

 

By 강인구(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사진 서울CC,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