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CC 친목 단체와 이승만 정부의 파워 엘리트
서울CC 친목 단체와 이승만 정부의 파워 엘리트
  • 강인구
  • 승인 2021.04.19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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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CC의 탄생과 그 뒤안길 연재 ➍

 

1973년경 천일백화점 전경(출처:국가기록원)

 

“현대 미국사회의 맨 꼭대기는 갈수록 통합되고 있으며, 종종 의도적으로 조화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기서 파워를 가진 엘리트 계층이 출현했다. 중간층은 예전엔 균형을 잡는 세력이었으나 지금은 궁지로 몰리며 떠돌고 있다. 중간층은 바닥층과 꼭대기층을 연결하지 못하고 있다. 이 사회의 바닥은 정치적으로 파편화되어 있으며 점점 더 무력해지고 있다. 그 바닥에서 지금 대중사회가 생겨나고 있다.” - C.W. 밀스, 『파워 엘리트』, 1956

 

프롤로그

1955년 11월 26일자 『경향신문』에 기획, 연재된 ‘코리아의 이방지대 ⑤: 놀고먹는 20만평 대호화판의 컨추리클럽 꼴푸장, 금력과 권력의 특수지’ 기사 중 일부 발췌내용이다.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수많은 고급 승용차들은 분뇨 냄새와 파리 많기로 유명하다는 서울의 서민부락 왕십리를 향하여 달리곤 한다. 어디로 가는 차들인가?
도대체 그곳에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채소밭 사이를 지나 얼마 동안 달리면 서양옥이 보이고 서양옥 앞 멀리 푸른 잔디가 깔려져 있는 별천지에 이른다.
이곳이다. 이곳이 바로 광나루 입구 컨추리클럽이라는 이름의 이방지대 골프장이다.
연못이 있고 언덕이 있는 20만평이란 방대한 터전 이 클럽은 그곳 전체가 하나의 공원 같은 잔디밭으로 꾸며져 있어 이국의 목장과 같은 감을 준다…

 

경성골프구락부 출신 골퍼들

 

1950년대 군자리골프장 1번홀

 

1954년 여름 군자리골프장이 개장될 당시에 우리는 관록있는 골퍼들 가운데 김건영, 김동준, 김정렬, 김진형, 김흥조, 오한영, 윤치왕, 윤호병, 이상옥, 이순용, 전용순, 조주영, 조권중, 한홍 등을 기억한다. 특히 김건영, 김흥조, 김동준, 윤호병, 이상옥, 전용순, 조주영, 조권중 등은 일제 때 경성골프구락부 시절부터 클럽회원이었다고 한다. 

김건영은 박흥식과 함께 조선양지주식회사를 경영하면서 관서체육회 이사와 평양부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서울CC 당시에는 명동에서 인도어(indoor)골프장 운영에 관여했다고 한다. 김흥조는 약관 23세 때 1940년 ‘전조선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 경성 대표선수로 출전해 결승에서 전년도 챔피언 서정식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골프 실력이 대단했다. 당시 대회에 출전한 김건영은 평양 대표선수였다. 해방 후 김흥조는 삼우해운을 경영하다가 나중에 1968년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초대 전무이사를 역임했고, 한국 최초의 골프전문잡지 『코리아 골프 다이제스트』를 창간했다. 

일본 명치대학에서 유학한 김동준은 매일신보 기자로 근무하다가 해방 후 서울신문사 전무, 합동통신사장 등을 역임했고, 1965년 한국골프협회(KGA) 설립의 주역이었다. 윤호병은 일제 때 일본 동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입사한 후 경일은행과 동일은행에서 근무했고, 정부 수립 후에는 상업은행장, 흥업은행장, 서울은행장을 거쳐 재무부장관을 역임한다. 이상옥은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고 원산 구세병원에 근무할 때 일본인 의사가 골프하는 것을 보고 골프를 배우게 된 직접적인 계기였다고 한다.(신용남, 『골프교우 50년』) 해방 후 그는 서울교통병원장을 오랫동안 역임했다.

전용순은 일본 유학 후 금강제약소를 설립해 운영하다가 해방 후 미군정청 경제고문역을 맡았고,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금강무역 사장 그리고 4.19혁명 후 초대 참의원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조주영 역시 일본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한 뒤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 미군정청 경무부 감찰장을 맡았고, 체신부장관, 국회의원, 반공투쟁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한편, 조권중은 일제 때 종로5가 어의동에서 창업한 ‘조고약’ 집안의 손자였다. 그의 조부 한의사 조근창은 <천일약방>을 하다가 <천일제약>을 창업했고, 부친 조인섭은 천일약방과 천일제약의 경영을 전담해 가업을 이었다. 1918년 한국 전역을 휩쓴 팬데믹 ‘스페인독감’이 퍼졌을 때, 한약과 양약을 가리지 않고 해열제 약제가 모두 품절되었는데 오직 천일약방만이 재고가 많아서 큰돈을 벌었다는 일화가 있다. 일제 때부터 종기약으로 유명한 ‘조고약’은 매월 수만 포씩 전국 각지에서 팔지 않는 약방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에 조인섭은 서울대 생약연구소 전신인 <계농생약연구소>도 창설했다. 조권중의 부친 역시 일제 때 경성골프구락부 회원을 했었고 그때부터 아들과 함께 라운드를 했다고 한다. 부자간 골프 사랑이 남달랐던지 조권중은 <천일백화점>을 개점한 뒤 그곳에 자신의 전용 골프연습장을 만들어 주야로 공을 쳤다고 한다. 1957년 최초의 해외 원정경기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던 아마 골퍼 조권중은 싱글 핸디캡이었다.

 

1950년대 서울칸트리구락부의 친목단체

 

1954년 군자리골프장 3번홀

 

1954년 서울CC는 사단법인으로 인가받으면서 200여명의 회원들 가운데 주류 멤버들은 끼리끼리 모여 친목 단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목성회, 목동회, 군자회, 상록회 그리고 서울CC 부인회가 그것이다. 요즘에는 주로 동호회라고 말하지만, 당시는 친목 단체 또는 서클이라고 더 많이 썼다. 이들 골프서클의 목적은 회원 골퍼들 모임을 통해 각계 인사들의 친목 도모를 돈독히 하고 그들의 공동이익을 추구하는데 상부상조하는 것이었다. 친목 단체를 구성한 그들은 이미 일제 때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서 국가주의 또는 권위주의를 내면화하면서 자연스레 엘리트주의로 변모해갔다.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에 보면, 이순용 이사장도 이들 친목 단체들을 적극 육성 후원하는 편이었다고 기록된다.

 

1. 목성회

가장 먼저 모인 목성회는 주로 서울CC가 창립될 때 입회한 회원들 중심으로 일제 때부터 골프를 즐긴 인사들이 다수 포함됐다. 일제 때부터 공을 쳤던 김건영, 김동준, 김흥조, 박두병, 안중희, 이상옥, 조권중, 한홍이 있었고, 해방 후 공을 치기 시작한 골퍼로는 김정렬, 김진형, 송인상, 임문환, 함성용 등이었다. 이 친목 단체 멤버들의 약력과 특징적인 경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개인 신상에 대한 정보는 네이버 지식백과와 뉴스 라이브러리,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역사정보 통합시스템과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등을 활용했다.

박두병 (동양맥주 사장/1947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1957년, 합동통신사장/1961년), 안중희 (전일본학생빙상선수권대회 우승/1939년, 대한체육회 이사/1951년, 빙상연맹 이사/1954년), 이상옥 (원산구세병원 산부인과장, 경성교통병원 과장/1945년, 서울교통병원장/1951-1960년), 조권중 (천일백화점 설립/1952년), 한홍 (미국 더뷰크대학 졸업, 조선수지주식회사 전무, 외자관리청 차장, 한미합동경제위원회/1955년, 한국골프협회 전무이사/1970년)

김정렬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공군참모총장/1954년, 국방장관/1957년), 김진형 (일본 산구상고[山口商高] 졸업/1926년, 조선은행 입사/1926년, 조선은행 이사/1945년, 한국은행 부총재/1950년, 한국은행 총재/1956년), 송인상 (경성고등상업 졸업/1935년, 한국은행 부총재/1954년, 한미합동경제위원회/1955년, 부흥부 장관/1957-1959년, 재무부 장관/1959년), 임문환 (도쿄제국대학 졸업/1935년, 농림부 장관/1951년, 한국무역협회장/1953년, 조선상선 사장/1954년, 동화제지 사장/1958년), 함성용 (외자관리청 부국장/1954년, 외자관리청 국장/1959년)

 

1958년 한미합동경제위원회 회담 모습(출처: 국가기록원)

 

목성회 회원들의 사회적 지위는 경제 관료, 군장성, 기업가, 의사 등으로 이승만 정부 때 지배 엘리트들이었다. 특별히 우리의 시선을 끄는 목성회의 멤버는 <한미합동경제위원회>에 참여한 송인상과 한홍이다. 『淮南 송인상 회고록: 부흥과 성장』에 보면, 이 합동경제위원회(Combined Economic Board)는 1952년 5월 24일 한국 대표 백두진 재무부장관과 미국 대표 마이어(Clarence E. Meyer)가 서명한 한국 정부와 유엔군사령부간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일명 ‘마이어 협정’)의 산물이었다. 또한, 한국전쟁 휴전 2주 뒤인 1953년 8월 7일에 미국 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하여 2억 달러를 제공했고, 첫 번째 경제조정관 테일러 우드(Tyler Wood)를 임명하였다. 주한 경제조정관이 한미합동경제위원회의 미국 측 대표역도 맡았다. 

당시 유엔군사령부 산하에 설치된 경제조정관실(OEC)는 한국 경제정책의 계획과 조정에 책임을 지는 기관이었다. 1950년대 이승만 정부의 전후 재건과 경제부흥은 전적으로 미국의 대한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원조정책에 대응해 가장 앞장서서 활약했던 관료 엘리트들의 역할도 막중할 수밖에 없었다.

 

2. 목동회

1954년 목동회도 서울CC에 입회한 회원들 중심으로 모임을 갖기 시작했는데, 이 친목 단체는 특히 엘리트 의식이 강한 사람들의 집합체였다는 점에서 유별났다. 김성곤, 민복기, 박기순, 서정익, 안희경, 유창준, 장기영, 장병찬, 조평재, 천병규, 최세황, 허정구, 홍진기 등 12명이 그 멤버였다. 당시 권력기관 고위층, 재계 오너들, 언론사주 등 파워 엘리트가 포진하고 있었다.

신용남의 『골프 교우 50년』에 보면, 목동회란 이름은 안희경이 골프를 친 후 일행들과 당시 추어탕으로 유명한 동대문 밖 <형제주점>에 갔을 때 여흥으로 ‘아 목동아’란 노래를 부른 데서 착안해 지어졌다고 한다. 골프 기원이 스코틀랜드 목동들의 오락에서 시작되었다는 뜻도 내포되어 골프 동호회로써는 제격인 셈이었다. 

『서울컨트리클럽 50년』에서 골프서클 목동회와 관련해 특히 흥미로운 대목 중, 이 동호회에는 가입하기도 무척 어렵고, 골프장에서 ‘라운드 중에 오간 대화를 딴 사람에게 결코 발설하지 않는다’는 규칙으로 유명했다는 점이 우리의 눈길을 끈다.

김성곤 (보성전문학교 졸업/1937년, 삼공유지합자회사 설립/1939년, 금성방직 설립/1948년, 동양통신 창간/1952년, 연합신문 인수/1953년, 태평방직과 아주방직 인수/1956년, 민의원 의원/1958년, 쌍용양회 설립/1962년), 민복기 (경성제국대 졸업/1937년, 서울지방검찰청장/1952년, 외자구매처 차장/1954년, 검찰총장/1955년, 대법원판사/1961년, 법무부 장관/1963년, 대법원장/1968년), 박기순 (대동석유 사장), 서정익 (동양방적공사 이사장/1948년, 동양방직 사장/1955년, 동일방직 사장/1966년), 안희경 (서울지방검찰청 부장검사/1950년, 대통령비서관/1952년, 외자관리청장/1958년), 유창준 (대통령 비서실장/1953-1960년)

장기영 (체신부 장관/1950년, 조선일보 사장/1952년, 태양신문/한국일보 전신 사장/1954년, 대한중석회사 사장/1957년, 한국석유주식회사 취체역/1959년), 장병찬 (도쿄제국대학 졸업/1941년, 조선비행공업 입사/1943년, 대동공업 사장/1950년, 이천전기 사장/1958년), 조평재 (변호사/1943년, 서울제일변호사회장/1963년, 대한중석과 삼성물산 법률고문), 천병규 (한국은행 홍콩지점장/1953년, 한국은행 외국부장/1955년, 재무차관/1956년, 한국은행 부총재/1958년)

최세황 (일본 중앙대학 졸업/1941년), 법무부 국장/1951년, 전주지검사장/1952년, 국방부 차관/1957년), 허정구 (제일제당 전무/1952년, 삼성물산 사장/1958년, 삼양통상 사장/1961년, 한국프로골프협회 초대 이사장/1968년), 홍진기 (경성제국대학 졸업/1940년, 법무부 국장/1950년, 법무부 차관/1954년, 해무청장/1955년, 법무부 장관/1958년, 내무부장관/1960년, 중앙일보사 사장/1968년)

당시 한국 상류층 사회에 골프붐이 불기 시작할 때 민복기 전 대법원장도 골프에 입문했다. 법조계 관료 엘리트들 가운데 일찍 골프장에 다닌 인사로는 안희경, 최세황, 홍진기 등을 들 수 있다. 민복기의 골프 인연도 홍진기의 권유라는 얘기가 있다. 당시 민복기와 서울CC의 인연 가운데 흥미로운 얘기는 신용남의 회고록에 나오는데, 군자리골프장 부지의 임차문제로 정부 내 담당부처 구황실재산사무총국과 계약을 맺을 때 외자구매처 차장으로 있던 그가 계약을 체결하고 직접 서명을 한 장본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한편, 홍진기 전 <중앙일보사> 사장은 민복기와 경성제대 선후배 관계일 뿐만 아니라 관직의 선후배 관계로 골프장에서도 각별한 관계였다. 홍진기는 해방 후 미군정청 법제부 법제관으로 시작해서 법무부 조사국장, 법전편찬위원회 위원, 대검찰청 검사, 법무부 법무국장, 법무부 차관, 해무청장, 법무부 장관까지 대한민국 초기 법조계 엘리트 관료로서 잔뼈가 굵었다. 그는 1960년 3월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어 재직 중 4.19혁명이 일어나, 3.15 부정선거와 4.19 발포명령의 책임자로 구속 기소된다.  또한 이승만 정부 때 파워 엘리트 홍진기는 요즘 한국에서 대표적인 싱크탱크로써 자리 잡은 <여시재> 때문에 자주 언급되는 홍석현 중앙일보사와 JTBC 회장의 부친이다.

 

3. 군자회

 

군자회 회원들, 제4회 구락부 단체대항전을 마치고

 

1955년 5월에 만들어진 군자회는 처음에는 ‘55클럽’이라고 불렀다가, 얼마 뒤 멤버들 스스로 ‘군자’(젠틀맨)라 호칭하면서 친목 단체 호칭을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는 설과 군자리골프장이 자리 잡고 있던 코스부지의 지역이 6개 마을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 중심지가 ‘군자리’였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 있다. 군자회는 당시 ‘럭키치약’으로 유명했던 <낙희화학> 구인회 사장이 주도해서 만들어진 친목 단체였고, 김기탁, 나익진, 문홍조, 신용남, 유재흥, 이재형, 조홍제, 하상용, 홍재선 등이 멤버였다. 최근까지 현존하는 친목 단체로써 가장 오래된 군자회는 회원 수가 많을 때도 60명 선을 유지했다.  

 

1962년경 낙희화학공업사의 럭키치약 제조시설(출처: 국가기록원)

 

1950년대 한국 신흥 자본가들은 주로 귀속기업체의 불하, 원조물자 및 원조자금의 배정 그리고 은행융자와 같은 국가의 각종 특혜를 계기로 성장했다. 이승만 정부의 귀속재산 불하는 국가적 특혜로 신흥 자본가의 본원적 축적과정이었다. 정부가 귀속된 구황실 소유지를 군자리골프장 부지로 서울CC에 임대해준 것도 일종의 귀속재산 불하 아닐까? 당시 귀속기업체를 불하받아 신흥 자본가로 성장한 경우는 목성회의 박두병, 목동회의 김성곤일 수 있고, 반면에 구인회는 원조자금에 의존하기보다는 산업은행이나 시중은행의 융자를 통해 요즘식으로 말하면 ‘스타트업 창업주’로 성공한 경우일 수 있다.(공제욱, 「한국전쟁과 재벌의 형성」, 2000.6)   

김기탁 (삼화실업 사장/1949년, 한국무역협회 이사/1956년, 삼화제지 사장/1967년), 나익진 (제동산업 사장/1954년, 산업개발위원회 고문/1958년, 체신부 차관/1960년), 문홍조 (문치과 원장/1953년), 신용남 (일본 중앙대학 졸업/1943년, 미군정청 사법부 과장/1945년, 법무부 과장/1948년, 대한국민항공사장/1960년, 국회의원/1967년), 유재흥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육군참모차장/1953년), 연합참모본부총장/1957년, 국방부장관/1971년), 이재형 (일본 중앙대학 졸업/1938년, 국회 재정경제위원장/1951년, 상공부장관/1952년, 민의원/1958년, 국회부의장/1960년)

조홍제 (일본 법정대학 졸업/1935년, 삼성물산 부사장/1948년) 효성물산 설립/1957년, 제일제당 사장/1961년, 동양나일론 설립/1966년, 한국타이어 인수/1966년, 동양폴리에스터 설립/1973년, 효성중공업 개편/1975년), 하상용 (일본 산구상고[山口商高] 졸업, 대한금융조합연합회장/1950년, 한국연합증권 사장, 대한석탄공사 총재/1967년), 홍재선 (금성방직 이사/1948년, 고려화재해상보험 사장/1958년, 쌍용양회 사장/1962년, 한국개발금융 회장/1967년)

또 한편, 구인회 <낙희화학공업사> 사장은 1931년 진주에서 첫 사업으로 <구인회상점>을 시작했다. 해방 후 <낙희화학>을 설립했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화장품 제조업체로 성공했다. 부산에 공장을 둔 까닭에 전쟁의 참화를 모면하면서 ‘낙희크림’이 부산국제시장에서 도약의 기회를 맞았다. 1952년 <동양전기화학공업사>를 설립해 최초의 합성수지제품 ‘오리엔탈’상표의 빗과 비눗갑을 제조했다. 낙희화학은 한국 플라스틱공업을 견인했다. 1955년에는 ‘럭키치약’도 생산을 시작해 그 후 오랫동안 국내시장을 독점함으로써 미래의 ‘럭키금성그룹’(현 LG)의 기반을 닦았다. 다음 해 구인회는 본격적인 무역상사 체제를 위해 <낙희산업>을 반도상사로 상호 변경하고, 사무실도 반도호텔 504호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반도호텔은 한국의 무역업 본거지로써 <반도상사>와 <삼성물산>이 유일하게 입주해 있었다고 한다.(『LG 50년사』, 1997)

서울시내 명동 인도어(indoor)연습장에도 자주 나간 구인회 사장은 골프 파트너로 조홍제, 홍재선, 신용남과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신용남이 기억하기로, ‘때때로 이병철 회장과도 라운드를 했는데, 삼성 오너의 실력이 좀 나았다’고 한다. 또한 그의 골프 사랑은 나중에 1967년 여수에 호남정유(현 GS칼텍스) 공장을 지을 때도 단지 내에 9홀 골프장을 건립하고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4. 상록회

 

1970년 박건석 범양전용선(주) 사장의 스윙 모습(『매일경제』, 1970.11.5)

 

1956년 미륭상사의 박건석이 주도해서 김원회, 박승찬, 신영수, 최종환 등 엘리트 신예들로 또 하나의 친목 단체가 만들어졌다. 당시에 김원회는 토목건축업과 무역업을 겸하는 신건산업을 경영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국제골프대회에 한국대표선수로 참가했다. 1958년에는 필리핀 선수권대회, 1959년에는 홍콩 아마추어대회에 신용남, 조권중, 한홍 등과 함께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당시에 박승찬은 낙희산업 상무였고, 나중에 호남정유 감사와 금성사 사장에 재직했다. <연합신문> 경제부 차장이던 신영수는 부친 신선호가 이순용 이사장과 죽마고우였던 까닭에 각별한 인연이었고, 장기영, 김성곤, 박두병 등 언론계 사주들한테도 신임을 받았던 것 같다. 나중에 그는 설립자 장기영에 이어 <서울경제신문> 사장도 역임한다. 신영수는 서울CC에서 제일 먼저 공을 친 신문기자로 기록될 만하다. 또한 <삼환기업> 사장이던 최종환은 해방 직후 건설사로 설립해서 6·25전쟁 후 복구사업을 통해서 사세 확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 후 1966년 베트남에 처음으로 진출해 해외건설시장을 개척하면서 한국 최초의 건설회사로써 위상을 다졌다. 최근 삼환기업은 유력한 대선후보의 ‘혈육’이 회사 대표직에 올랐기 때문에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또한, 석유판매 대리점 <미륭상사>는 박건석의 부친 박미수에 의해 설립됐고, 1958년부터 박건석이 사장에 올랐다. 정부 수립 후 체결된 ‘한미석유운영협정’에 근거해서 주한 미군의 통제하에 대한석유저장회사(KOCKO)를 통해 전국의 대리점에 석유를 배급하는 유통 질서가 만들어졌다. 1957년경 한국 정부에서 승인한 전국에 석유판매 대리점은 총 35개소였다. 당시 서울 지역의 대리점 현황을 보면, 대동석유, 미륭상사, 삼일사, 제일사, 조양상사, 한미석유 총 6개 업체가 각각 5~6개 주유소를 직영 또는 위탁 경영하고 있었다. 미국 시라큐스대학을 졸업한 박건석은 부친이 작고한 뒤 미륭상사를 물려받았고, 1966년 <범양전용선>을 설립해 미래의 <범양상선그룹>의 기틀을 마련했다. 서울CC 친목단체 멤버들 가운데 최연소 골퍼였던 박건석 전 범양상선 회장은 별명이 ‘노력형’이라고 불릴 정도로 열정적이었는데, 한창 때는 매일 골프공을 1,000개씩 치다가 몸살이 자주 났다고 한다.(『매일경제』, 1969.8.19) 특히 그의 골프 스윙은 리드미컬하기로 소문이 나서 주변 골퍼들의 부러움을 샀다. 

서울CC의 4개 친목 단체는 1957년부터 매년 3-4회 동호회 대항전을 가졌다. 제1회 4단체 대항전에서 목성회가 압승했고 군자회가 꼴찌를 했다. 하지만 2회 대회부터는 매번 군자회가 우승을 독차지했다고 한다.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에 보면, 당시의 경기 방식은 각 팀 11명 출전, 1인당 기본점수 1점, 27홀 핸디캡 플레이로 1위에 4점, 2위에 3점, 3위에 2점, 4위에 1점씩 단체별 합산식으로 우승팀을 가렸다. 그 당시 ‘이국의 목장과 같은’ 군자리골프장에는 일요일이면 자주 친목단체 가족들이 골퍼들을 따라 나오는 풍습이 있었다. ‘이방지대’에서 골퍼 가족과 함께 하루를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5. 서울칸트리구락부 부인회

 

초창기 여성골퍼들

 

여성 엘리트들의 친목단체 서울CC 부인회는 1957년 8월 발족했다. 부인회 회장은 당시 한국 여성의 인권 신장에 앞장서서 활동하던 손인실 YMCA 대외부 위원장이 맡았다. 처음에 부인회 회원들은 16명이었는데 남편들이 모두 서울CC 회원이었다. 손인실 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의 남편은 당시 연세대 의대 정형외과장 문병기였다. 손인실은 초창기 서울CC 부인회의 형편에 대해 다음처럼 증언한다. “순전히 골프만을 하기 위한 부인회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여가선용을 위한다는 친목의 목적은 있었으나 부인회 안에 사업부, 교양강좌부, 프로그램부 등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남편을 따라 나오는 부인들이라고 해서 골프를 모두 잘 치는 사람들만 있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못 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회원들은 자기의 특성을 살려 사업부에서는 회비를 거두어 교양강좌의 프로를 마련한다든가 해서 자신의 취미시간을 갖게 하는 한편 작은 힘이나마 사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도 했으며 YMCA 건물 건립 때는 1백 여 만원을 모아 희사한 일도 있었다.”(『국제골프』, 1970년 5월호) GJ

 

 

By강인구(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사진 서울CC, 역사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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