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시대부터 #현대골프까지 History Of Golf
#로마시대부터 #현대골프까지 History Of Golf
  • 김상현
  • 승인 2020.11.2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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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는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그리고 처음 만들어진 후 어떻게 발전하여 오늘날에까지 이르렀을까? 알면 알수록 더 재미있는 골프의 역사. 

 

골프의 기원과 발전

 

골프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지 학설이 있지만, 가장 널리 인정받는 건 스코틀랜드 기원설이다. 이후 골프는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골프의 창시자는 누구?

 

골퍼라면 누구나 한 번쯤 품어볼 만한 질문이지만,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기도 하다. 골프는 스쿼시나 사이클, 소프트볼처럼 창시자나 기원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오히려 야구나 축구, 테니스처럼 창시자나 기원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기 어려운 스포츠다.
골프의 창시자를 따지는 건 불가능하다. 처음 골프를 만든 사람에 대한 믿을 수 있는 기록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골프의 기원을 따지는 것 역시 어렵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신들이 골프의 원조라고 주장하고 있어서다. 
누군가는 로마 시대의 스포츠인 ‘파가니카’를 골프의 원조로 꼽는다. 파가니카는 깃털로 속을 채운 가죽 공을 끝이 둥근 막대기로 치는 형태의 게임이었다. 경기방식이나 룰이 골프와 흡사한 면이 많기에 결국 골프의 기원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는 중국이 원조라고 주장한다. 당나라 시절부터 시작된 ‘추이환’ 놀이가 골프의 원조라는 것이다. 추이환은 나무로 만든 공을 목재 채로 쳐내는 형태의 게임이었으며, 지금까지 남아있는 기록과 몇몇 그림을 근거로 중국이 골프의 원조라는 설을 내세우기도 한다.

 

스코틀랜드 기원설에 주목하는 이유

 

이 밖에도 골프의 원조에 대한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널리 인정받는 건 스코틀랜드 기원설이다. 골프라는 단어 자체가 ‘치다’ 는 뜻을 가진 스코틀랜드의 고어 고프(Gouft)에서 나왔으며 그 밖에도 볼, 페어웨이, 그린, 홀 등 골퍼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하게 들릴 용어들이 스코틀랜드에서 나왔다는 점, 장비나 경기방식이 보다 현대 골프에 가깝다는 점 등이 현대 골프의 기원은 스코틀랜드라는 설에 힘을 실어주는 이유다.

 

골프 금지령의 아이러니

 

 

아이러니하게도 스코틀랜드는 현대 골프의 기원지로 유력한 곳이지만 동시에 세계 최초로 골프 금지령을 내린 곳이기도 하다. 사실 골프에 대한 첫 번째 공식 기록은 대회 개최나 수상 기록이 아닌, 골프 금지령이다. 잉글랜드와 긴장 관계를 유지하던 스코틀랜드의 국왕 제임스 2세가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국민이 군사 훈련이 아닌 축구와 골프에 빠졌다는 이유로 1457년 두 종목에 대한 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국왕이 직접 종목을 거명하며 금지령을 내릴 정도니 이 시기부터 골프의 인기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1457년 내려진 세계 최초의 골프 금지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13년 뒤 1470년에 다시 골프 금지령이 내려졌으며, 1491년에 세 번째 금지령이 내려졌다. 국왕이 세 번이나 거듭하여 금지령을 내렸다는 건 ‘지엄한 어명’으로도 당시 사람들의 골프 사랑을 막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이후 1502년에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강화 조약을 맺으면서 골프 금지령도 폐지됐고 스코틀랜드 국민은 골프의 자유를 되찾았다.

 

골프의 발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골프는 이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즉,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세계 최초의 골프클럽으로 꼽는 ‘리스 젠틀맨 골프회’도 1744년 스코틀랜드의 리스에서 만들어졌다. 리스 젠틀맨 골프회는 세계 최초의 골프클럽으로 인정받는 것은 물론, 최초로 통일되고 명문화된 골프 규칙을 13개의 조항으로 만들어 발표한 곳이기도 하다. 리스 젠틀맨 골프회에서 발표한 13개의 조항을 살펴보면 오늘날의 골프 규칙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 오늘날의 골프 규칙이 좀 더 복잡하고, 발전되었지만 18세기 골프 규칙이 오늘날과 큰 차이가 없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18세기에 현대 골프의 기초가 어느 정도 완성된 것이다. 이처럼 골프 업계에서 큰 업적을 세운 리스 젠틀맨 골프회는 세계 최초로 오픈 게임까지 개최하는 등 골프 역사에 여러모로 거대한 발자국을 남겼다.

 

골프 종주국 영국

 

이후 골프는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20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골프의 종주국이자 중심지는 누가 뭐라 해도 영국이었다. 규칙과 장비의 발달도 영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메이저대회’가 처음 열린 곳도 영국이다. 
오늘날까지 세계 4대 메이저 대회 중 하나로 꼽히며 그 중 필두로 여겨지는 디 오픈 챔피언십, 혹은 브리티시 오픈은 영국에서 1860년에 처음으로 개최됐다. 
초창기 디 오픈은 오늘날처럼 우승자를 돈방석에 앉혀주는 대회가 아닌 명예만을 안겨주는 대회였다. 우승자는 상금 대신 챔피언 벨트를 받았으며, 그나마도 1년만 소유할 수 있었다. 
디 오픈 주최 측에서는 3년 연속 대회 우승자에게 챔피언 벨트를 영구적으로 소유하게 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1870년에야 톰 모리스 주니어가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챔피언 벨트를 영구히 본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후 디 오픈의 우승 상품이 벨트에서 트로피로 바뀌고, 상금이 추가되는 등 변화를 거친 끝에 오늘날에는 200만 달러에 가까운 우승 상금을 받을 수 있는 대회가 되었다.

 

신흥 강국 미국의 역습

 

이처럼 19세기 말까지 현대 골프의 종주국이자 수도는 누가 뭐래도 영국이었다. 하지만 19세기 말부터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이라는 신흥 강대국이 나타난 것이다. 
미국골프협회는 1894년에 창립됐고, 프로골프협회는 1901년에 설립됐을 만큼 미국 골프의 역사는 영국보다 훨씬 짧지만, 미국의 국력과 재력, 그리고 골프 사랑은 수십 년 만에 미국을 세계 골프의 수도로 만들었다. 영국이 군사력, 경제력에서 미국에 밀리며 세계 최강대국 자리를 넘겨주었듯, 골프계에도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졌다. 
19세기까지는 영국이 현대 골프의 기원이자 골프의 중심지로서 명성을 누렸지만, 20세기 이후 주도권이 미국으로 넘어간 것이다.

 

20세기 세계 골프의 중심 미국

 

 

20세기 골프의 중심지는 미국이었고, 지금까지 그 위상은 변함이 없다. 영국에서 시작된 현대 골프는 20세기 들어 미국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미국 골프의 역사

 

미국의 골프 역사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다. 미국 골프의 역사가 길다고 볼 수 있는 것은 ‘미국’이라는 국가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골프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건국 이전인 1650년에 미국 지역에서 골프와 비슷한 형태의 놀이인 콜프(KOLF) 게임을 즐겼다는 기록이 나오며, 1739년에는 미국 지역에 골프 장비를 선적한 기록이 등장한다.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이던 1779년에는 골프클럽에 대한 광고 기록까지 찾아볼 수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탄생하기 전부터 미국 땅에서 골프를 즐기는 사람이 조금은 있었던 모양이다. 반면 ‘현대 골프의 시작’이라는 잣대로 보면 미국의 골프 역사는 길다고 하기 어렵다. 
현재 북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골프클럽으로 인정받는 곳은 규모와 정체도 알기 어렵고 광고로만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 어느 이름 없는 클럽이 아닌, 캐나다 현대 골프의 시조로 불리는 ‘로얄 몬트리올 골프클럽’이다. 이 클럽은 1873년에 만들어졌는데 미국에서는 15년이 지난 뒤에야 미국 최초의 골프클럽으로 여겨지는 폭스버그 골프클럽이 만들어졌다. 미국의 첫 번째 아마추어 골프선수권대회도 1895년에 비로소 열렸다. 영국의 ‘디 오픈’이 1860년에 열렸다는 것을 고려하면 미국에서 현대 골프의 시작은 영국에 비해 늦어도 한참 늦은 셈이다.

 

미국골프협회의 출범

 

하지만 미국이 경제, 군사에서 놀랄 만큼 급성장하며 영국을 밀어내고 세계 최강대국 자리를 차지했듯 골프계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캐나다보다도 본격적인 출범이 늦었던 미국 골프는 USGA(미국골프협회)가 출범하면서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본래 ‘미국 아마추어골프협회’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뒤 미국골프협회로 새로 시작한 USGA는 빠르게 발전하며 조직 규모를 불려 나갔다. 출범 당시 5개 클럽으로 구성되었던 조직이 1910년에는 267개, 1932년에는 무려 1138개의 클럽이 가입하며 수십 년 만에 규모를 수백 배로 키웠다. 이후 세계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클럽 가입 수가 감소하는 등 침체기를 맞기도 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다시 회복세로 돌아섰다. 
1980년대에는 5000개가 넘는 클럽이 가입했고, 현재는 9700개가 넘는 클럽 수를 자랑하는 등 USGA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규모의 골프협회로 자리매김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4대 남성 메이저 대회인 US 오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5대 여성 메이저 대회인 US 우먼스 오픈도 시작은 타 단체에서 했지만, USGA 산하에 들어오면서 발전을 거듭해 세계를 대표하는 메이저 대회 중 하나가 됐다.

 

장비 발전에 절대적 영향력을 끼친 미국

 

20세기 미국 골프의 발전은 곧 현대 골프의 발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현대 골프 장비의 발전에 있어 미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골프공만 해도 그렇다. 1898년, 미국에 살던 코번 하스켈은 그때껏 사용되던 구티 공, 페더리 공 등을 대체할 최초의 고무공인 하스켈 공을 발명했다. 하스켈 공을 대히트시켜 큰돈을 번 하스켈은 이후 본인의 특허를 모두 기존 회사에 판매하고 업계에서 은퇴했지만, 그가 발명한 하스켈 공은 골프 장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명 중 하나로 기록됐다. 
미국의 영향력은 골프공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까지 골프장을 운영하는 데 많이 쓰이는 페어웨이 관개 시스템은 1925년 미국 텍사스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최초의 샌드웨지는 1932년 미국의 프로 골퍼 진 사라젠에 의해 처음 등장했다. 이 밖에도 테일러메이드 등 20세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명품 클럽 회사의 등장, 수백 년간 나무 재질로 만들어지던 우드 클럽이 금속 재질로 세대교체를 이룬 것 등 오늘날까지 쓰이는 수많은 장비와 물건들이 미국에서 발명되거나 개선됐다.

 

최초 핸디캡 지수의 출연

 

장비뿐만이 아니라 현대 골프의 규칙, 제도에도 미국이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세계 최초로 국가적으로 통일된 핸디캡 지수를 도입한 나라도 미국이다. 이전에도 핸디캡 시스템은 존재했지만, 1911년 미국에서 처음 국가 전체가 인정하는 통일된 핸디캡 지수를 도입함으로써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핸디캡 시스템을 완성했다.
이 밖에도 미국이 현대 골프에 미친 영향은 수없이 많다. 1947년에는 미국 최초의 골프 잡지이며 세계적인 골프 잡지로 꼽히는 골프월드가 창간됐고, TV에 메이저 골프 대회가 본격적으로 방영된 것도 미국에서부터 시작됐다. 

 

20세기 골프 역사의 중심 미국

 

 

1960년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프 선수로 불리는 잭 니클라우스가 20세의 나이로 US 오픈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처음 주목받았다. 이후 그는 1962년 US오픈에서 첫 메이저 우승을 기록하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프 선수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20세기 골프의 역사에서 미국의 존재감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미국에 기반을 둔 단체의 성장과 확장에, 잭 니클라우스와 타이거 우즈 같은 골프계의 슈퍼스타 배출까지 20세기 골프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순간은 대부분 미국에서 시작됐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뭐래도 20세기 골프의 중심지는 미국이었고, 지금까지 그 위상은 변함이 없다. 
영국에서 시작된 현대 골프는 20세기 들어 미국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골프는 언제 시작되어 어떻게 발전해 지금에 이르렀을까? 

 

한국 골프의 태동과 발전

 

 

19세기까지 골프의 중심지는 영국이었고, 이후 미국이 새로운 골프 중심지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골프 역사는 언제 시작됐고, 어떻게 황금기를 누리게 됐을까?

 

한국 골프의 기원

 

세계 각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골프와 비슷한 형태의 ‘막대로 공을 치는 놀이’는 한반도에도 있었다. 말을 타고 막대로 공을 치는 ‘격구’, 그리고 말을 타지 않고 보행하며 즐기는 ‘격방’ 이 대표적이다. 다만 격구나 격방에서 현대 골프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사실 한반도에서 현대 골프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대한골프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1897년 무렵부터 시작했다고 여겨진다. 당시 조선이 쇄국정책을 파기하고 개항을 시작한 가운데, 원산항에 영국인들이 들어와 유목산 중턱에 6홀 규모의 간이 코스를 만들어 골프를 즐겼다고 한다. 이때가 1897년 무렵이었다고 하며, 이 영국인들은 한반도에 처음 골프를 가져온 사람들로 여겨지고 있다.

 

한국 골프의 태동

 

짧은 개화기가 지나고 일제 강점기가 찾아왔다. 달갑지 않을 수 있지만, 한국의 골프 역사를 이야기할 때 일제 강점기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골프가 태동한 건 일제 강점기였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로 상업적인 목적으로 개장한 골프장은 일제 강점기에 지금의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이 있는 자리에 만들어진 ‘효창원골프코스’다. 당시 일본인들은 일본에 몇몇 골프장이 들어선 것처럼 한국 땅에도 골프장을 짓고 싶어했다. 이처럼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들을 위해 시작된 효창원골프코스 프로젝트였지만,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오늘날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뒤흔들듯 당시에는 스페인 독감이 전 세계를 뒤흔들었고, 이후 3.1운동 등이 이어지며 골프장 사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결국, 예정보다 훨씬 늦은 1921년이 되어서야 7홀 규모의 효창원골프코스가 완공됐고, 이곳은 몇몇 외국인들이 취미 생활을 위해 대충 만든 코스가 아닌 제대로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상업 골프장’이었다.

 

한반도 최초의 골프클럽 경성골프구락부

 

 

효창원골프코스는 일본인들을 위해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당시 경성, 즉 서울의 한국인 상류층들에게도 인기를 끌었다. 수요가 늘어나자 한반도에서의 골프장 건설도 줄을 이었다. 1924년에는 원산 송도원골프장이 문을 열었고, 그로부터 한 달 뒤 대구골프장도 문을 열었다. 몇 달 뒤에는 경성 청량리골프장도 문을 열었다. 
1924년 한 해에만 조선 땅에 세 개의 골프장이 문을 연 것이다. 이처럼 골프장이 늘어나면서 골퍼들의 숫자도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골프장과 골프 인구가 늘어나며 한반도 최초의 골프 클럽, 경성골프구락부도 등장했다. 최초의 한국인 프로골퍼 연덕춘도 경성골프구락부의 지원 하에 프로 데뷔를 하며 일본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

 

서울컨트리구락부의 창설

 

 

이후 일제의 패망, 남북 분단, 6.25 등 다사다난한 현대사 속에 한동안 정체되었던 한국 골프는 6.25가 끝나며 다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1953년 사단법인 서울컨트리구락부의 창설이었다. 서울컨트리구락부는 이후 서울컨트리클럽으로 개명했고, 이 단체는 1966년 한국골프협회가 설립되기 전까지 골프장과 골프 커뮤니티 운영, 선수 육성 등 여러 업적을 남기며 한국 골프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한국 최초의 스타 플레이어’ 한장상도 서울컨트리클럽의 양성자 과정을 통해 골프 선수로 성장하는 등 당시 프로 중 서울컨트리클럽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 골프의 발전

 

이후 1960년대 들어 오늘날 대한골프협회의 전신인 한국골프협회, 그리고 프로 골퍼들을 위한 한국프로골프협회가 연이어 창설되며 한국 골프계는 갖출 것을 거의 다 갖추었다. 한국골프협회는 국제골프연맹에 가입하고 보다 많은 사람에게 골프를 전파했으며, 한국프로골프협회는 프로 골퍼 양성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한국 골프가 발전하면서 여자프로골프도 서서히 수면에 오르기 시작했다. 한국 여자 프로골프의 역사는 공적인 자리에서 처음 여자 프로 골퍼 육성 문제가 논의된 1975년 11월 KPGA 이사회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1977년에 여자프로골퍼들을 육성하기 위한 후원회 경기가 개최되기 시작했고, 1978년에 한명현, 안종현 등 8명의 프로가 등장하며 본격적으로 여자프로골프 시대가 열렸다. 여자프로골프는 한동안 KPGA의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 1988년 KLPGA가 별도의 사단법인으로 분리되며 여자프로골프도 독립했다. 
이렇게 골프의 인기는 점점 높아졌고 프로들도 많이 배출되며 한국 골프는 황금기에 접어들었다. 1990년 KPGA 사상 최초로 상금 1억 원을 넘기며 당대 최고의 스타로 군림한 이강선, 국내 11승의 기록을 남긴 최윤수,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며 한국 여자 프로골프의 대모라 불린 구옥희 등 한국인 프로들의 선전도 이어졌다.

 

골프의 이미지를 높여준 박세리

 

1997년 IMF라는 전대미문의 경제난 속에서도 골프의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니, IMF 사태로 전 국민이 고난에 빠졌을 때 등장한 국민 영웅 박세리는 개인의 영광은 물론, 골프의 지명도와 이미지를 크게 높여주었다. 
박세리는 한국 역사상 최초의 명실상부한 세계 최정상급 프로 선수였으며, 이후 신지애, 박인비, 유소연 등 후배들이 박세리도 미처 기록하지 못한 LPGA 세계 랭킹 1위를 기록하며 한국을 명실상부한 세계적인 여자골프 강국으로 만들었다. 남성 프로들 역시 최경주, 양용은, 배상문, 임성재 등 국제적 수준의 스타들이 등장하며 인기를 견인하고 있다.

 

골프 강국으로 성장하다

 

한국 골프의 역사는 상당히 다사다난했다. 혼란스러운 개화기에 시작되었고, 일제의 지배를 받던 일제 강점기에 기틀을 잡았으며 남북분단과 6.25라는 현대사의 비극 속에 정체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난관을 이겨낸 현재 한국 골프는 국제적 수준의 프로들과 수많은 골프 인구를 보유한 명실상부한 골프 강국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의 골프 역사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이유다.

 

 

GJ 김상현 이미지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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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프로야 2020-11-27 15:43:57
한국 여자골프시합이 77년도에 최초시합인가요? 78년도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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