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과 서울 군자리 골프장의 복구
이승만 대통령과 서울 군자리 골프장의 복구
  • 강인구
  • 승인 2020.11.11 15:4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21년 개장한 효창원코스에서 골프를 즐기는 일본인들

 

한국 골프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서울CC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 골프 역사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서울CC가 일제 말기 폐장된 군자리 골프장을 해방 이후에 재건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정부 수립 후 군자리 골프장(서울CC)의 시작과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울CC의 발자취를 5회에 걸쳐 알아보자.

 

1924년 12월 7일 개장한 경성골프구락부 청량리 코스

 

요즘 서울 시내에 유일한 골프장으로 남아있는 태릉CC가 위태롭다. 정부 부동산 정책의 일환으로 골프장 부지를 활용한 아파트 건설이 추진될 모양이다. 아쉽지만 서울의 마지막 골프장 풍경이 가까운 미래에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서울 시내에 위치했던 대표적인 골프장은 역시 공익성에 떠밀려 사라진 서울CC 아닐까? 
1970년대 초 어린이대공원으로 바뀐 서울CC는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 골프계의 모체이자 산실이었다. 당시에 서울CC도 신도시 계획과 어린이 놀이공원이라는 공공의 이익에 떠밀려 서울 근교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골프 역사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서울CC가 일제 말기 폐장된 군자리 골프장을 해방 이후에 재건한 것이라는 팩트 정도는 상식일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정부 수립 후 군자리 골프장(서울CC)의 시작과 우여곡절 끝에 이룬 결말을 팩트 체크를 통해 확인해보자.
지금 세태를 보면 가짜뉴스가 팩트 조차도 위협하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팩트의 오류는 지금 당장 수정되어야만 한다. 가짜뉴스는 바로잡을 때를 놓쳐 시간이 흘러가면 그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모두 질곡 속에 빠뜨린다. 가짜뉴스는 팩트와 진실 왜곡을 넘어 역사왜곡 또 가짜역사로 변질될 것이다. 우리한테 가짜뉴스도 그렇지만 가짜역사도 ‘핀셋’ 대책이 필요한 때이다.

 

해방 후 군자리 골프장 복구 계기는?

 

  군자리 코스의 마을 소년 캐디들(1930년대)

 

1942년부터 일제 총독부는 경성, 부산, 대구, 평양, 원산 등지의 골프장을 하나 둘 씩 없애기 시작했다. 어떤 골프장은 식량 증산을 위한 농경지가 됐고, 어떤 골프장은 글라이더 연습장이나 신병 훈련장, 또 어떤 골프장은 비행장으로 탈바꿈 됐다.
『매일신보』 1944년 3월 19일자에 보면, 경성골프구락부는 임시총회를 열고 20년 동안 존속했던 구락부의 해체를 선언하고 군자리 골프장의 폐장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해산 당시 경성골프구락부 회원은 600여 명에 달했다. 일제는 골프장 부지에 활공훈련도장을 만들기로 했고, 농경지로 개간함으로써 일제강점기 한국 골프사는 일단락 되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한국골프 100년』에서는 해방 후 군자리 골프장 복구문제를 1949년 8월 정부 수립 1주년 기념 축하연에서 불거져 나왔다고 서술한다. 이날 행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초청된 한국 내 외교관들, 미군 장성들과 환담하면서 주말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대해 물었다. 미군 장성들이 한국에 골프장이 없어 휴일이면 부득이 일본으로 군용기 편으로 날아가 골프를 치고 돌아온다는 얘기를 듣고 이승만 대통령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당장 총무처장을 불러 빠른 시일 내에 골프장을 재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위와 같이 이승만 대통령은 골프장 복구의 필요성을 확인한 뒤에 전규홍 총무처장에게 조속한 시일 내에 미군들을 위한 위락시설을 만들도록 재촉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1949년 초 반민족행위 피의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4월 말에는 우여곡절 끝에 <농지개혁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복잡한 정국이었다. 미군의 철수도 이미 1949년 여름까지 완료된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는 아이러니하다. 
당시 전규홍 총무처장은 골프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골프에 조예가 깊은 김동준 합동통신사장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골프장 복구문제에 대해 협의했다.

 

군자리 골프장 복구위원회 설립

 

1938년 여름, 군자리코스에서 시범샷중인 연덕춘 프로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에 따르면 1949년 11월경 골프장 복구위원회가 구성되어 전규홍 총무처장이 위원장을 맡았고, 구자옥, 김동준, 오한영, 이용설, 전용순, 조주영이 위원으로 선출됐다. 실무는 전용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간사는 최창규 총무처장 비서실장과 송병희 대한상공회의소 사무국장이 맡았고, 골프장 현장 공사는 연덕춘 프로에게 모두 맡겼다. 연덕춘은 일본 강점기에 일본 골프 유학을 떠나 한국 최초의 프로골퍼로서 1941년 일본오픈에서 우승한 뒤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프로선수로서 오랜 공백기를 갖고 있었다.
여기서 군자리 골프장 복구위원들의 당시 이력을 좀 들여다보면, 일제 때 구자옥은 흥업구락부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고 해방 이후에 경기도지사를 역임하다 6·25전쟁 때 납북됐다. 김동준은 일본 명치대학에서 유학했고 일제 때 매일신보 기자로 근무하다가 해방 후 서울신문사 전무, 합동통신사장 등을 역임했다. 이용설은 미국과 일본에서 유학했고 세브란스 의전 교수를 하다가 해방 후 미군정청 보건후생국장과 세브란스의대 학장을 지냈다. 오한영도 미국 에모리대학 유학파로서 일본에서 의학박사 취득 후 세브란스 의전 내과 과장을 지내다가 해방 후 세브란스 병원장, 6·25전쟁 시기에 보건부 장관에 임명됐다.
한편, 전용순은 일본 강점기에 일본 유학 후 금강제약소를 설립해 운영하다가 해방 직후에 미군정청 경제고문역을 맡으면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대한물자운영조합연합회 회장 등 요직을 역임한 인물이다. 조주영 역시 일본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한 뒤 변호사로 활동하다 해방 후 미군정청 경무부 감찰장을 맡았고 6.25 전쟁 시기에는 체신부장관을 역임했다. 특히 김동준, 오한영, 전용순, 조주영은 일제 때 존속했던 경성골프구락부 회원들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일제 때 경성골프구락부 회원들을 중심으로 골프장 복구위원회가 조직된 것은 당연했다. 이들은 자연스레 예전 군자리 골프장 부지를 최선의 골프장 후보지로 추천해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당시에 골프장 복구위원회는 오히려 일반인들에게 ‘구(舊) 경성골프구락부’로 인식됐을 가능성이 높다.

 

소작농민들의 반발

 

군자리코스 11번홀 (1954년)

 

『한국골프 100년』을 보면 우선적으로 골프장 복구위원회는 코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일제 말 골프장 폐쇄 이후 그곳에서 농사를 지어오던 소작농민들의 소작권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요청했다.
일제 때 군자리 골프장은 1930년 경성 일대 구왕실소유지에 세 번째로 건설된 골프코스로서 전시 동원정책의 일환으로 농경지화 되었다. 일제 시기에 군자리 골프장 부지의 소유 및 관리 주체는 총독부 산하 이왕직(李王職)에 두고 있었는데,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청 법령에 의거해 구왕궁사무청으로 옮겨갔다. 정부 수립 이후에는 1949년 2월 구왕궁 재산처분법안이 통과되면서 구왕궁재산관리사무국을 새롭게 두게 되었다. 또한, 일제 때 군자리 골프장 부지는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군 뚝섬 면에 속했고, 정부 수립 후 1949년 8월부터 서울에 편입됐다. 옛 군자리 골프장 일대의 농경지는 약 20만여 평에 달했다.
이 지역 농민들은 정부의 골프장 건설 소식을 전해 듣자 강하게 반발했다. 1949년 11월부터 주변 지역 농민 360여 세대의 대표들은 골프장 건설을 반대하면서 소작권 보장을 요구했다.  
『국도신문』 1949년 12월 5일자에 의하면 골프장 건설 반대의 슬로건은 < 1. 소작권 강제해제 결사 반대, 2. 골프장 재건 결사 반대, 3. 국민의 재산권 보장, 4. 유흥시설을 위해서 백성의 고혈의 결정인 국고금 지출 반대 > 등을 내걸었고, 정부 당국에 진정서까지 제출함으로써 세간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정부와 농민 사이의 대립

 

군자리코스 5번홀 페어웨이(1954년)

 

『한국골프 100년(89p)』에 따르면 농민들의 청원문제가 국회에까지 비화되자 전규홍 총무처장은 농림위원회에 출석해, ‘정부 측에서는 소작인들의 생계에 어려움이 없도록 상당한 보상을 해 줄 것과 또 군자리 골프코스 주변 마을 사람들의 생계 보장을 위해 골프코스에서 필요로 하는 고용인은 현지 주민을 채용할 것’이라는 타협책을 제시하는 등 소작권 분쟁의 해결에 애를 썼다고 한다. 
그러나 군자리 골프장 부지를 놓고 정부와 농민 사이에 알력은 해소되지 못하고 1950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한성일보』 1950년 2월 25일자 ‘구 왕실 소유지 뚝섬 지역에 골프장을 설치하기로 하여 농민이 반발’이라는 기사 내용을 보면 당시 상황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 총무처에서는 골프 구락부의 요청에 따라 수도 서울 부근에 적당한 골프장을 물색하여 오던 바…. 당국에서는 강력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어 부근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고 있다 하는데 과연 이번 처사는 당국의 강권 발동으로써 무난히 추진될 것인지 또는 전 소작인들의 선처 요망을 참고 삼아 그들의 생계를 보장할 만한 대책을 강구한 후 추진할 것인지 앞으로 그 귀추가 매우 주목되는 바이며….” 
( 『한성일보』 1950년 2월 25일자)

 

서울CC의 재건

 

군자리코스에서 라운드중인 골퍼 

 

또한, 총무처 당국이 농민들의 ‘골프장 건설 반대 이유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기존 방침을 계속 추진하는 한 다른 방도는 없어 보였다. 결과적으로 현지 소작농민들 대다수는 소작권을 포기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서울컨트리클럽 50년사(172p)』에 따르면 이 같은 소작농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군자리 골프장을 재건하려는 강한 의지뿐 아니라, 현장 시찰과 격려 등을 통해 복구공사를 긴급하게 추진시켜 6·25전쟁 한 달여 전에 일단 마무리 지었다. 
『자유신문』 1950년 5월 12일자를 보면, 정부 수립 후 새롭게 복구된 서울 군자리 골프장에서 5월 10일 전규홍 총무처장을 비롯해 전예용 서울시 부시장, 전용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윤호병 상업은행장 등과 그밖에 미국대사관 및 유엔 ECA(미경제협조처) 관계자 등 다수가 참석하여 개장식을 개최하였다. 개장식이 끝난 뒤에는 시구식과 한미 양측 골퍼들의 시범경기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 당시 골프장 복구 현장에서 직접 진두지휘한 연덕춘 프로의 증언을 통해 결론을 대신한다
.

“… 그해 겨울과 봄까지 애 많이 썼지요. 논밭에다가 나무 한 포기가 있나요? 골프장의 여건은 그저 땅만 있다는 것뿐이었지요. 있다는 건 사람의 손과 호미와 괭이뿐이었어요. 그래서 서울칸트리(현 서울CC)의 페어웨이는 ‘스탠스’가 모두 다르게 돼요. 모두 손 하나로 만들었기 때문에 고르지가 못하지요. 천연적인 조건을 그대로 놔둔 채 다듬기만 했으니까요…. 잔디가 살았습니까? 풀이 있을 턱도 없고. 그래서 맨땅에서 플레이를 했죠. 그래도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죠….” 
( 『한국골프총람』, 한국문화사, 1973, 96~97p)

 

 

GJ 글 강인구 이미지 GJ DB, 서울CC 60년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하단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