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스토리
초기 골프플레이와 명골퍼들
장병량, 서정식, 김흥조로 이어지는 초기 한국아마골프의 맥
1987년도 원산 유목산 중턱에 만든 코스는 6홀 정도로 그이말로 간이 코스라고 할 수 있겠다. 소위 말해서 동네 아이들이 겨울철 동네 빈 논이나 밭에서 축구를 하듯이 그런 형태로 이해하면 무난할 것 같다. 어쨌든 이 땅의 본격적인 골프는 효창원부터라고 이야기 한다. 그 뒤 청량리 코스부터 한국인 명골퍼들이 등장하면서 공식적인 대회를 통해서 그들 면면들이 밝혀지고 있다.
이 나라 초기의 이름 난 골퍼 치고 서울CC의 회원이 아닌 사람은 거의 없다. 대한 암흑기 때 조선아마추어골프대회 우승자 김흥조, 서정식 등은 물론 광복 후에 뛰어난 활약을 보인 김건영, 한 홍, 김찬수, 신용남, 이병희 등은 서울CC가 배출한 명골퍼들이다.
글 | 정노천(골프컬럼니스트)
골프 사랑 지극했던 영친왕과 이승만 대통령
“아이젠하워라는 대통령이 없었다면 미국 골프가 오늘만큼 융성 번창해 인기 높은 스포츠로 올라설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미국투어에서 11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명프로 바이런 넬슨(미국)이다.
실제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미국 골프의 융성에 기여한 공로는 지대했다. 미국 역대 대통령들은 대개 골프를 좋아했다. 그 중 몇몇은 ‘광(狂)’, ‘중독자’의 뜻인 애딕트(addict) 또는 너트(nut)로 불릴 만큼 골프에 깊숙이 빠졌었다. 클린턴이나 부시 대통령도 골프 애딕트들이지만 아이젠하워는 그들보다 더한 ‘골프광’이었다.
우리의 역대 통치자 즉, 왕이나 대통령 중 아이젠하워와 같은 애딕트나 너트성 골프광은 없다. 한 나라의 골프 융성이 그 나라를 통치한 최고 권력자의 골프 열광도에 비례하게 마련이고 보면 오늘날 세계무대를 주름잡는 우리 여자골프 상황은 의외의 현상이기도 하다.
통치자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골프에 있어 첫째가는 공로자로 영친왕을 꼽는다. 영친왕은 일본에서 망국의 한을 부인 이방자 여사와의 골프로 풀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18홀 정규 규모 골프 코스인 군자리 코스는 영친왕의 선물이다.
이왕실 차관이 영친왕에게 코스 건설계획을 상신하자 쾌히 응락하고 건설비로 2만엔과 향후 3년 매년 5천엔씩의 하사도 약속해 골프코스 건설을 적극 후원하기에 이른다. 영친왕이 코스 건설을 꺼렸던들 군자리 코스의 탄생은 무산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렇게 하여 한반도 최초의 국제적 챔피언십 코스가 경성골프클럽이란 이름 아래 1930년에 군자리에 완공되어 한국 골프의 ‘메카’로 탄생했다.
영친왕 부부는 일본에서 볼모로 살면서 골프를 익혔다. 일본의 황족, 귀족들이 주된 멤버인 명문 클럽 도쿄골프클럽의 멤버이던 이방자(일본 왕족) 여사의 골프 솜씨는 영친왕을 조금 앞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방자 여사는 공식적으로 ‘한국 최초의 여성 골퍼’이기도 하다.
유서 깊은 군자리의 서울CC 코스가 1972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없어지는 비운을 겪었으니 영친왕에게 면목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태평양전쟁과 6·25 동란 등 거듭된 전란으로 황폐해진 군자리 코스의 복구를 강행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로 또한 크게 평가받아 마땅하다. 우리 골프는 영친왕에서 비롯되고 이 대통령으로 그 명맥이 이어진 셈이며 이들 두 명을 앞세우지 않고 초기의 우리 골프를 결코 말할 수 없는 일이다.
1954년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가 군자리의 서울CC에서 처음 열렸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나와 참관 했다. 미국인 토마스 L. 메츠카에게 우승을 빼앗기자 이 대통령은 못내 섭섭해 했다. 이듬해 55년에도 이 대통령은 참석, 전년에 분패한 김흥조를 열렬히 격려했고 그가 우승하자 만면의 웃음으로 기뻐하며 직접 시상하고 악수까지 했다.
이 대회 이름에는 이 대통령이 내린 ‘대통령배’가 붙어 있었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도 신용남이 이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청와대로 입상자 전원을 초대한 자리에서 대통령배를 직접 시상했었다.
이후 대통령이 시상하는 일은 다시 없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배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에서 ‘대통령배’라는 명칭까지 없앴다. 당시 총무처는 트로피에 부착된 ‘대통령배’란 네 글자를 제거한 후 트로피를 골프협회(KGA)에 되돌려 주었다. 이후 이 대회는 그냥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친왕과 부인
효창원, 청량리, 군자리로 한국골프의 맥 이어져
일부사가들은 본격적인 이 땅의 골프 도입을 1921년 효창원 코스부터 잡는다. 하지만 서울의 명소가 되고 만주로 가는 중간 경유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 경성이었다. 조선호텔에서 묵고 효창원에 가서 골프를 즐겼던 시절이었다. 효창원 코스는 시내 남대문에서 자동차로 3~4분 거리여서 요지였다.
하지만 효창원 코스는 영 말이 아니었다. 만철(滿鐵) 조선철도국이 코스 수리를 했다. 코스 상황은 조금씩 나아졌다지만 깎인 산허리는 붉은 땅을 그대로 드러냈고 잔디가 자라지 못해 나토 상태가 심했다. 당시 이 땅에 단 하나 뿐인 코스 내용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빈약한 코스 토목공사, 황폐한 홀, 잔디가 벗겨져 황색이 된 그린, 거기에 플레이어들은 제 각각 자기 멋대로 스윙을 하여 이래저래 플레이 행태는 엉망이었다.
일본인 골퍼 중에는 모자, 골프화 등 골프 복장을 하지 않은 채 일본 민속의상인 하카마옷에 다비라는 버선을 신고 머리에는 띠를 두른 장사치 같은 차림으로 “에잇!” 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클럽을 휘두르는 등 ‘무매너’ 플레이가 감행됐다.
“볼을 굴려서 구멍에 넣는 퍼트 따위는 귀찮아. 이제부터는 하지 않기로 해! 우린 일본 남아가 아니던가. 시시하게 볼 굴리기 같은 짓일랑 그만 두자. 우리는 무사도를 따르자!”고 외쳤다. 그들은 ‘퍼트 안하기’로 골프라는 게임을 욕되게 하고 농락했던 것이다.
효창원 코스 9홀의 ‘보기’(현재의 파)가 얼마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각 홀 모두 일률적으로 4이고, 합계 36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길이가 비교적 짧은 1, 3, 5, 8번 홀은 파3, 나머지 2, 4, 5, 7, 9번 홀은 파4로 합계 파27인 분석도 나오고 있다. 당시의 코스 상태, 미숙한 클럽 및 볼, 거기에 플레이어의 낮은 솜씨로 미루어 그렇게 추정하는 것이다. 플레이어들 대부분이 풋내기 실력이어서 친 볼이 코스 밖으로 날아가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결국 1924년 청량리 코스로 이전을 했지만 지금에 비하면 빈약했었다. 청량리코스 시대에 플레이어들이 쓰는 클럽의 수는 늘어 나 우드 3개, 아이언 4~6개에 퍼터 1개 등 10개로 플레이했다. 7번 이하의 숏아이언이 나오지 않았던 때이다. 그들은 6번 아이언으로 어프로치와 벙커 플레이도 해야 했다.
한국인 플레이어 중 일찍이 외국인에게서 골프를 배운 세브란스병원 약품담당 박용균 씨의 솜씨가 가장 좋았다. 그는 첫 한국인 골퍼로 지목된다. 윤호병 씨와 함께 동일은행에 근무한 민대식, 임긍순, 김한규 씨 등의 솜씨는 에버리지 골퍼수준 정도였다고 전한다.
청량리 코스 시절 이름난 쟁쟁한 골퍼로는 네다섯 명 정도였다. 회원 40명 중 이들이 뛰어난 골프 솜씨로 클럽 챔피언 등을 휩쓸었다. 회원들은 이들에게서 원포인트 레슨을 받았으며 요즘 대회를 관람하는 갤러리처럼 그들의 플레이를 졸졸 따라가며 구경할 정도였다.
청량리 코스가 갖는 큰 의미는 우리나라 첫 골프대회가 개최됐다는 점이다. 1925년 제1회 전조선골프선수권대회가 치러진 곳이다. 홀매치 플레이로 예선과 결선 방식으로 치러졌다. 첫 대회에서 많은 에피소드가 만들어졌다. 대회는 일인 골퍼들 주축으로 치러졌는데 그 중에서 대구코스의 사이토와 경성골퍼의 나카무라가 열전을 벌렸고 일몰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렇게 치열한 각축전은 이어져 3일간에 걸쳐 무려 53홀의 플레이를 계속한 끝에 경성의 군자리 코스 소속인 나가무라가 우승을 거둔 진기록이 남아있다.
1937년 제1회 조선골프선수권대회 개최
1930년 이전한 군자리 코스는 이 땅에서 골프계의 심장이자 중심으로 굳혀졌다. 골프 발상지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루즈의 올드 코스처럼 조선 반도의 골프 메카로 나날이 관록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 상징의 하나로 조선골프연맹의 창립을 들 수 있다. 1931년 청량리에서 군자리로 이전한 후 1937년 9월 23일 경성GC의 주도아래 이 땅의 골프사상 최초의 조선골프연맹의 창립총회가 개최됐다.
경성을 비롯 대구, 평양, 부산 및 원산 등 5개 골프 클럽으로 조선골프연맹이 구성됐고 그 날 군자리 코스에서 연맹주최 제1회 전조선 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이 경기 또한 이 땅의 골프사상 최초의 연맹 즉, 오늘로 치자면 골프협회(GA)가 주최하는 공식경기이다. 비록 대한 암흑기 체제이긴 하지만 한반도 최초의 아마선수권대회임에는 틀림없다.
한반도 각지에서 30명의 고수들이 출전했다. 36홀 스트로크플레이로 예선전을 치르고 상위 16명이 매치플레이로 우승자를 가려내는 경기 방식이었다. 예선 통과의 16명 즉, 16강중에 조선인 선수가 5명이나 들어갔다. 경성GC가 자랑하는 실력자 장병량과 강호 김종선, 노련한 박용균, 오한영 및 만주 안동 코스에서 칼을 갈았던 임영식 등이 출전했다.
일본인 선수로는 당시 24세의 오바시, 54세의 사가타 및 육군대좌이며 47세의 하기하다 등 11명이었다. 치열한 열전 끝에 대구GC의 오바시가 순조롭게 이기며 결승에서 경성GC의 장병량을 눌러 우승해 제1회 전조선아마추어골프 챔피언에 올랐다. 전국 규모 대회에서 조선인 선수가 처음 2강에 올라 겪은 최초의 고배이기도 했다.
경기 시작까지 비가 내려 코스 컨디션이 걱정됐으나 시작 때는 비가 멎고 바람도 개어 경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인을 클로즈하고 아웃 9홀만을 써서 행해지는 경기였다. 개조된 인 9홀은 한 여름 가뭄으로 잔디의 생육이 매우 나쁜데다가 빗물에 잠기어 사용 불능 상태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웃 9홀만을 사용해야 했던 것이 제1회 전조선 아마골프선수권대회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재미있는 것은 30명이 벌인 예선의 36홀 스트로크 플레이(메달 플레이라고도 함)에서 오바시, 장병량, 김종선 등 3명이 똑같이 173으로 타이스코어를 냈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우 다음 매치플레이의 시드를 배정하기 위해서 1위 즉, 메달리스트(베스트 스코어를 낸 선수)를 가려내야 했다. 그래서 실시된 18홀의 플레이오프(연장전)에서도 오바시와 장병량은 또 타이가 됐다. 그래서 이 두 선수끼리만 다시 9홀 경기를 겨룬 끝에 24세의 오바시가 이긴 것이다.
이튿날 16명에 의한 매치 플레이에서 준결승에서 오바시가 고이즈미를 이겼고 장병량은 마쓰다를 2-1로 이겼다. 결승에서 33세의 장병량은 오바시와 붙어 2-1로 분패한 치욕을 갖게 됐다.
장병량이 만일 이 땅에서 열린 바로 그 최초의 전국 규모 공식 내셔널타이틀경기인 제1회 전조선 아마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더라면 ‘제1회 전조선 아마챔피언’으로 그의 업적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크게 달랐을 것이다.
그의 준우승은 안타까운 러너업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기량은 클럽챔피언전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장병량은 1주일 후 경성GC 1937년도 클럽선수권대회의 결승에서 고이즈미를 물리치고 전년(1936)도에 이어 챔피언 2연패로 설욕하고 울분도 깨끗이 씻어냈다. 이어 그는 1938년에도 챔피언에 올라 3년 연속 클럽 챔피언의 새 기록을 세우는 등 초기 한국 골프의 첫째가는 아마추어 선수임을 과시했다.
화려한 플레이 장병량, 서정식, 김흥조로 이어져
1940년 10월 15일. 경성GC 군자리 코스. 제4회 전조선 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의 첫날. 경성을 비롯해 대구, 부산, 평양클럽에서 30여명의 싱글핸디캐퍼들이 출전해 오전 9시부터 차례로 티오프 해나갔다.
오전·오후 36홀 스트로크 플레이로 예선을 치르고 2일부터는 매치 플레이로 예선통과 된 16명이 자웅을 겨루는 방식은 종전과 다를 바 없다.
경성GC에서는 장병량, 오한영, 김흥조, 박용균, 조주영, 윤치왕, 박용수 씨 등 18명, 부산에서는 등 6명, 대구에서는 1935년의 명선수 서정식, 정운용. 그리고 평양에서는 명선수 김건영, 김운영 형제 등 전국의 강호가 총 출전했다.
결승전은 경성의 김흥조와 대구의 서정식 두 선수로 좁혀졌다. 예상은 ‘서정식 우승’으로 모아졌으나 의외로 김흥조가 영예를 안았다. 서정식은 39년도 우승자이고 김흥조는 당시 23세의 애송이로 일본에서 기량을 쌓은 북한 부호의 아들이었다. 그 김흥조가 준결승에서 천하제일의 장병량과 맞붙어 일진일퇴의 시소 끝에 물리침으로써 승세를 굳히게 된다. 겨우 1홀을 이기는 그야말로 신승이었다. 35세의 장병량은 젊은 김흥조의 예기에 눌렸던 셈이다.
그 여세로 다음날 결승(36홀)에서 강호 서정식도 무난히 물리칠 수 있었다. 김흥조는 그해 전조선 아마 챔피언에 경성GC 챔피언 등 2관왕을 자랑하게 된다. 1941년 경성GC 챔피언에는 장병량, 김연만, 임연달, 정보라, 오한영 등 5명이 예선통과 했었다.
1930년 이전 1943년 군자리 코스 폐장까지 전조선아마골프선수권 대회 14년간 전반기는 일본인의 득세였으나 후반기는 조선인 선수의 실력 향상으로 일본인 선수를 연거푸 제압해 전조선 타이틀은 물론 경성GC의 챔피언 자리까지 휩쓸게 된 것이다. 이들 한국인 선수들이 계속 챔피언을 차지하면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선수를 물리친 쾌거는 대단했다. 아마골프경기를 계속 석권한 것은 우리 골프사에 길이 남을 만한 업적이다.
약관 김흥조의 당시 핸디캡은 8이었다. 장병량은 3 그리고 서정식은 5였다. 당시 이들이야말로 진짜 싱글골퍼들이었다. 싱글은 되기도 힘든 데다 인정받기는 더 힘들고 까다로웠다고 한다. 클럽 심사위원회의 엄격한 심사에 통과해야 하는데 그 주도권이 다수인 일본인에게 있어 그들은 조선인의 솜씨에 질시한 나머지 싱글핸디캡 부여에 인색했다는 얘기가 있다. 경기에서 싱글급 스코어를 내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좀체 조정해 주지 않았다고 차별을 했었다.
당시의 골프클럽은 미국제 윌슨, 맥그리거 혹은 던롭 아니면 일본제 미즈노 일색이었다. 볼은 던롭, 스팔딩. 볼1개 1원. 쌀 한가마 6~8원씩 하던 때인 만큼 얼마나 비싼 가격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지체 높은 골퍼들의 복장은 대개 니커보커(Knicker Bockers)였다. 무릎 부분이 느슨한 반바지로 무릎 아래를 묶어 줄였고 스타킹이나 긴 양말로 아래 다리를 감싸는 골프의 고전 복장이다. 17세기 뉴욕에 이민 온 네덜란드 사람들이 즐겨 입었다하여 그들의 별명이 됐고 복장 이름도 그렇게 붙여졌다. 머리에는 헌팅 모자를 대개 썼으며 넥타이까지 메는 전통 고수파도 있었다.
대통령이 직접 참관 격려한 골프대회
이승만 대통령이나 이순용 이사장이 없었더라면 한국의 골프가 10~20년가량 늦어졌을 것이라고 평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승만 대통령의 엉뚱하기까지 한 ‘골프 사랑’이 새삼 돋보이는 사건이었다.
제1회 한국아마추어선수권대회가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했다. 1954년 서울CC에서 열려 토마스 메츠커(미국인)에게 이 땅에서 열린 첫 패권을 빼앗겨 속이 상할 대로 상한 사람은 2위의 김흥조가 아니라 서울CC 이사장 이순용이었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면서 제대로 골프를 익힌 김흥조를 투입해 다음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는 패권을 기필코 쟁취해 설욕하리라는 결의에 불타올랐다.
이듬해 1955년 10월 제2회 대회를 앞두고 이순용은 김흥조를 자신의 사저에 유숙시킨다. 큰 경기를 앞두고 부인을 가까이 하면 안 된다는 금기였다.
“작년 미국인에게 타이틀을 빼앗겼는데 올해에는 꼭 이겨야 해. 이승만 대통령이 또 참관하는 데 그 어른 앞에서 우리가 꼭 이겨야 하는 거야!”하고 이순용은 격려했다.
결승까지 순항한 김흥조의 상대는 미8군 캡틴 R. E. Lee였다. 리 대위는 김흥조의 상대가 못됐다. 거기에 캡틴 리는 ‘퍼트 라인의 잔디를 뜯었다’는 클레임으로 하여 2벌타까지 부가 받는 악전(?) 끝에 패했고 김흥조는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 제2대 챔피언의 자리에 고생 않고 올랐다. 이순용의 작전이 들어맞은 것이다.
“17번 홀에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이 구경하고 계셨다. 이 대통령이 내손을 꼭 잡더니 ‘자네 꼭 이겨야 하네, 미국사람에게 져서는 안 돼’하며 격려해 주셨다.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고 김흥조는 당시를 회상했다.
군자리 코스에서 자란 한국 최초 프로 연덕춘
경성GC에는 전속프로가 없었고 있을 리도 없었다. 한반도에는 아마추어 골퍼들을 기술 지도를 할 만한 프로가 단 한 명도 없었던 때이다. 당시 경성GC는 효창원 코스 시대와 청량리 코스 시대 때 일본에서 명성과 실력을 갖춘 프로들을 초빙해 멤버들의 기술 향상에 노력을 기울였다.
숙원의 18홀 짜리 본격적 코스인 군자리 코스를 건설해낸 경성GC는 코스의 내용과 질이 충실해지면서 코스를 제대로 공략할 멤버들의 기술 향상도 절실해지고 멤버들의 의욕도 왕성해 감에 따라 일본에서 매년 정례적으로 프로를 불러들여 레슨을 실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30년대초 경성GC의 멤버는 1백70명 내외로 그중 조선인 회원의 수는 50명에 이르렀다. 김동준, 윤호병, 김흥조 등도 있었는데 그중 뛰어난 기량을 가진 조선인 골퍼로 박용균과 장병량 두 사람이다. 박용균은 세브란스병원(현 연세대부속병원)의 의약 공급업자였다. 당시 서양인 의사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일찍이 골프를 배워 함께 라운드 할 기회를 많이 가졌던 그는 하도 열심히 골프를 했기에 “새가 울지 않는 날은 있어도 코스에 박용균이 안 보이는 날은 없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한국골프의 선각자로써 중년 실업가였던 것이다. 또 장병량은 1934년에서 태평양전쟁이 서서히 끝나가는 무렵의 1943년까지 조선 제일의 명 플레이어로 명성을 날렸다. 북녘 신의주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경성GC의 멤버 중 조선인 골퍼 유일의 핸디캡 3의 무서운 솜씨를 자랑한 로우 핸디골퍼였다.
이들에 의해 자극 받아 실력 있는 조선인 플레이어들이 차차 증가해 가는 판국임에도 조선인 프로는 좀체 태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아마추어 골퍼들이 득세하던 가운데 프로골퍼의 탄생이 예고되고 있었다. 군자리 코스 주변 능동에 살던 소년 연덕춘이 출현하게 된다. 연덕춘은 한국프로골퍼 1호로 일본 유학까지 가면서 1941년 일본 오픈 타이틀을 따낸 프로골퍼로 우뚝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