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 18홀은 군자리 코스부터
정규 18홀은 군자리 코스부터
  • 남길우
  • 승인 2017.03.02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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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18홀은 군자리 코스부터

30만평 부지, 남쪽 18만평 경사면에 7,000야드 규모 

골프장은 홀수로 골프장의 스펙을 나타내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1라운드라는 것은 18홀을 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규 코스는 최소한 18홀을 소유해야 가능하다. 그 이하의 홀을 가진 코스는 간이 코스로 치부해 버리고 만다. 최소한 거리나 파수, 그리고 난이도 등을 정한 그 영역 안에 들어야 정규 코스라 칭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정규 코스는 언제부터인가?

 

1987년도 원산 유목산 중턱에 만든 간이 코스는 6홀 정도로 그이말로 간이 코스라고 할 수 있겠다. 소위 말해서 동네 아이들이 겨울철 동네 빈 논이나 밭에서 축구를 하듯이 그런 형태의 코스로 위탁 받은 영국인 세관원들이 무료한 시간을 즐기기 위해 만든 간이식 코스였다. 어떻든 그때 이 땅에 골프 형태로 도입된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외국 선교사들이나 외국인들이 들어와 원산부근 갈문반도의 외인촌이나 휴가지였던 황해도 구미포 해안가 등에서 간이식 코스가 회자되다가 드디어 1921년 현재 효창원에 9홀 규모의 골프코스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능자리를 개조해서 만드는 만큼 장소는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경비 조달이 어려워 처음엔 7홀을 만들어 개장했다가 나중에 2개홀을 만들어 9홀로 증설했으나 결국 관리 부실로 인해 2개홀은 방치하고 7개홀만 사용했다.

이후 골프의 욕구에 휩쓸린 골퍼들의 욕망에 의해 18홀 코스를 꿈꾸면서 1924년 그 당시 한갓진 능자리 청량리 코스로 이전하게 되면서 새로운 골프생활을 꿈꾸었으나 부지가 10만여 평밖에 안돼서 2개홀이 부족해 18홀 정규 코스를 만들지 못했다.

이에 만족 못하고 결국 옮겨간 곳이 현재 어린이 대공원자리인 군자리 코스다. 30여만평 부지라 거뜬히 18홀 규모의 정규 코스를 만들어 이전한 것이다. 이곳도 능자리인데 1930년 이전해서 1941년 태평양 전쟁과 1950년 6. 25전쟁을 겪으면서 파괴, 복구, 재복구의 아픔을 겪으면서 한국 사회의 아픔과 함께 부침을 거듭해 오다가 결국 1972년 자라나는 2세인 어린이들에게 놀이공원으로 물러 주고 원당의 한양골프장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군자리 코스를 가졌던 서울컨트리클럽 회원들이 36홀 규모의 한양컨트리클럽의 전 주식을 사들이면서 옮겨가게 된 것이다.

효창원 코스 9홀

효창원 코스는 홀마다 영·미(英·美)풍을 따서 각각 멋진 별명이 붙어 있다. 그 대신 파(Par)의 표시는 없고 전장은 2천3백22야드. 9홀의 길이와 홀 별명은 아래와 같다.

효창원 코스 9홀의 보기(현재의 파)가 얼마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각 홀 모두 일률적으로 4이고, 합계 36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길이가 비교적 짧은 1, 3, 5, 8번 홀은 파3, 나머지 2, 4, 5, 7, 9번홀은 파4로 합계 파27인 듯도 하다. 당시의 코스 상태, 알량한 클럽 및 볼, 거기에 플레이어의 낮은 솜씨로 미루어 그리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효창원 코스의 그린이 야지라도 심은 잔디였는지 아니면 그냥 모래로 된 샌드그린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1921년 당시는 그냥 샌드그린이었을 확률이 높다. 일본의 골프사가들은 그냥 그린이라고 기술, 잔디그린인지 샌드그린인지를 밝히지 않았지만, 초창기 골퍼인 윤호병 씨나 프로 1호 연덕춘은 한결같이 ‘샌드그린이었다’고 증언한 적이 있다.

효창원 코스 홀별 길이와 별명 (9홀)

홀 야 드 별 명

1번홀 188야드 Unknown (不明)

2번홀 195야드 Paradise (낙원)

3번홀 200야드 Alps (알프스)

4번홀 385야드 Punch Bowl (펀치 볼)

5번홀 200야드 Toge (일본어로 고개)

6번홀 263야드 Green Leaves (푸른 잎)

7번홀 250야드 Wrestler (레슬링 선수)

8번홀 220야드 Pukhan (北漢山)

9번홀 361야드 F. D. A. (Free drink for all)

계 2,322야드

청량리 코스 16홀, 경성골프구락부 주도

효창원 코스의 애용층은 만철(滿鐵)의 고위 관계자, 조선호텔의 관계자 그리고 호텔 투숙 외국인들이지만 조선은행 등 은행계 일본인이 주류였다.

효창원 코스는 당시 서울의 명소가 되어 시민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효창원 코스의 문제로 부각됐다.

효창원 코스가 서울 중심부에 위치하고 교통이 편리해 시민들의 산책길이 효창원 코스 근처까지 뻗어나가면서 시민들은 코스 안의 녹지대를 포함, 일대를 시민공원으로 조성하도록 당국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 “효창원 코스는 너무 비좁다”는 골퍼들의 의견도 날로 커지는 판국이어서 개장 2년 만에 코스 이전설이 나돌게 됐고, 회원들 사이에 넓은 새 부지를 구해 본격적으로 코스를 건설키로 이야기가 무르익어갔다. 그런 과제와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 최초의 골프클럽인 경성골프구락부가 결성된 것이다. 주목할 사실은 경성GC 결성을 계기로 골프장이 철도국과 조선호텔의 관할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운영케 됐다는 사실이다.

청량리에 만드는 코스는 16홀 규모로 계획해 건설비를 4만엔으로 잡고 자금 염출 방법으로 각 멤버에게서 1천엔씩 각출하고 나머지는 일반으로부터 기부를 기대한 듯 했다. 원래 골프코스는 호텔에 부속되어 운영되는 것으로 되어 있어 경성철도국의 호텔이 건설하리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철도국은 이를 부인했다. 새 코스 건설에 드는 비용은 엄청난 액수인데 무엇보다 부지 매수 자금이 한 푼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서울 근교 청량리(당시는 석곶리) 근처 이씨 왕조 소유의 능림을 차용하기로 한다. 그 절충을 시노다 이왕직 차관이 맡았고 이왕조의 승낙도 얻어냈다.

1924년 3월 1일 사단법인 경성GC 창립총회에서 정관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선출했다. 청량리의 새 코스의 설계는 이노우에에게 위촉했다. 1924년 4월 20일 경성GC가 사단법인으로 인가났지만 청량리 근교, 석곶리에 확보된 부지는 겨우 10만평이었다.

청량리역에서 춘천 가도를 가다 왼쪽으로 들어가 공동묘지의 언덕 건너 일대의 송림이 이왕조 능림이었고 경성GC는 인근의 산림을 더 사서 보탠 것이 그 정도였다. 부지가 산비탈의 경사지이어서 본격 골프 코스, 즉 18홀을 만들기에는 크게 부족했다. 이노우에가 가까스로 16홀을 그려 넣기까지 그 고생이 매우 컸을 것은 분명하다. 홀의 거리도 짧고 모양새도 안 좋고 부대시설도 허름할 수밖에 별 수 없는 코스이었다.

공사 자금은 만철 경성철도국이 마지못해 낸 2만엔에 멤버들이 낸 2만엔 등 4만엔이 조달됐지만 공사가 진행되면서 턱없이 부족해 자금난으로 완벽하게 시공되지 못했다. 그린에 고려잔디를 깔려던 계획을 버리고 그냥 야지를 깔아 참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모자란 공사비 때문이었다.

청량리 코스는 변칙 18홀 라운드 시스템으로 1번홀에서 스타트, 순차로 돌아 마지막 16번홀을 홀아웃 한 후 다시 1번홀과 2번홀을 돌아 토털 18홀 라운드로 끝내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청량리 코스의 각 홀의 야디지별 파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1번홀에서 16번홀까지 야디지는 1,641야드이고 이에 1, 2번 홀 길이를 합치면 토털 야디지는 2,147야드가 됐다. 파는 1∼16번 홀까지는 62이나 18홀로는 70(33, 37)이다. 이에 관한 당시의 기록에는 파가 아니고 보기로 기재되어 있다. 당시 영국에서 보기는 파였으며 이를 일본인들도 본받아 파를 보기로 사용했던 것이다.

홀이 16개인만큼 그린도 16개였다. 1번∼16번홀 후 1∼2번 홀을 돌아 18개홀을 끝내는 시스템인 관계로 2개의 홀은 티마크를 각각 두 개씩 갖고 있었다. 16번홀 라운드 후에 이어지는 17번홀, 18번홀째의 티마크는 딴 위치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청량리 코스의 준공은 예정보다 늦어져 1924년 11월 하순이었다.

경성골프클럽 청량리 코스는 그간 공사가 잘 진척되어 얼마 전 코스와 클럽하우스 등이 완성됐음으로 효창원 코스는 12월 2일로 폐장되고 12월 7일부터 청량리 코스에 이전했다.

신설 청량리 코스는 경성 철도 청량리역에서 동북에 위치한 총 면적 약 10만평을 차지하는 고지역에 자리했다.

교통편이 매우 나빠 골프 클럽 당국은 자동차 회사와 계약을 맺어 동대문에서 코스까지 셔틀버스를 운행, 운임으로 4명 단위로 왕복 1원씩을 받았다.

개장식은 12월 7일에 열렸다. 이렇게 하여 청량리 코스 시절이 활짝 열린다.

“좁고 짧은 코스였다. 그래서 우드로 치기가 어려웠고 아이언을 주로 써야하는 코스였다. 거기에 그린은 샌드그린이어서 모래 위에서 퍼트를 해야 하는 불편이 따랐다. 그보다 서울 도심에서 너무 먼 곳에 있어 한번 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당시 동일은행 근무의 윤호병 씨가 코스 상황을 증언했다.

청량리 코스의 샌드그린은 글자 그대로 모래그린이었다. 볼이 온 되면 볼은 모래에 파묻힌다. 벙커안의 조금 단단한 모래에 볼이 박힐 때와 같았다. 플레이어는 그 볼을 집어 올리고 볼 마크(볼 낙하 자국)를 그린 주변에 비치된 고무래로 골라 평탄하게 수정한 후 볼을 리플레이스(되 갖다 놓기)하여 퍼트를 하는 시스템이다. 플레이어는 다시 고무래로 볼이 굴러간 자국까지 수정하고 나서 그린을 떠나야 했다.

골프코스는 이렇듯 난점이 있었으나 코스 전체의 경관은 뛰어났었다. 북한산 취악(翠岳)을 뒤로 불암산, 수락산 그리고 도봉산 등의 기봉을 낙송 나뭇가지 사이로 보는 경관은 웅대무비 했다. 소나무로 뒤덮인 코스 곳곳에 이름 모를 들꽃이 계절마다 빛을 달리하며 피어나서 정적 속의 진외경(塵外境)이었다는 묘사가 있다.

이때쯤 플레이어들이 쓰는 클럽의 수가 늘어나 우드 3개, 아이언 4∼6개에 퍼터 1개 등 10개로 플레이했다. 7번 이하의 숏아이언이 나오지 않았던 때이다. 그들은 6번 아이언으로 어프로치와 벙커 플레이도 해야 했다.

플레이어 중 일찍이 외국인에게서 골프를 배운 세브란스병원 약품담당 박용균 씨의 솜씨가 가장 좋았다. 그는 첫 한국인 골퍼로 지목된다. 윤호병 씨와 함께 동일은행에 근무한 민대식, 임긍순, 김한규 씨 등의 기량은 에버리지 골퍼수준 정도였다고 한다.

경성GC는 재정난이 심각해 코스의 샌드그린을 고려잔디로 바꾸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별 수 없이 야지로 깔아 울퉁불퉁한 그린면을 참아야만 했다.

청량리 코스 홀별 길이 (16홀)

홀 야 드 파 홀 야 드파

1 258 4 10 82 3

2 248 4 11 2985

3 288 5 12 2574

4 155 3 13 943

5 167 3 14 2724

6 251 4 15 3305

7 179 3 16 3085

8 147 3 17 2584

9 102 3 18 2484

계1,759 33 계2,147 37

* 토탈3,906 70 (17, 18번홀은 1, 2번홀 겸용)

 

한국 최초의 정규 18홀, 군자리 코스

경성GC 청량리 코스에서 골프를 즐기던 멤버들의 기량이 날로 향상되면서 그들은 좁고 짧은 청량리 코스에 차차 만족하지 못했다. 그들은 더 넓은 터에 긴 홀을 가진 뛰어난 코스를 욕심내기 시작한 것이다.

‘청량리 코스의 전장(全長)은 너무 짧다 그리고 벙커도 작고 이런 코스 컨디션으로 좋은 플레이가 될 리 없다’라는 자각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솜씨는 낮은데도 클럽만은 턱없이 값비싼 것을 갖고 쓰며 우쭐대고 클럽 당국에 불평이나 큰소리치기를 좋아하는 멤버는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기 마련, 청량리 코스 멤버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코스 이전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기에 이른 때가 1927년 가을이었다.

개장한지 겨우 4년만에 이전 이야기가 나오다니 경망스럽지만 사태는 급류를 타고 거세게 진전되어 갔다. 청량리 코스가 경성에서 너무 먼데다가 땅도 각박해 잔디 생육에 부적합한 것은 고사하고 부지 면적이 10만평으로 너무 좁다는 이유였다. 다시 말하면 홀 16개에 전장 5,000야드로 재미있는 골프 플레이가 되지 못했다.

광조문 밖이란 뚝도 군자리 근처의 지역이다. 클럽의 간부들이 신코스 용지 후보지를 분담해 물색한 결과 경성의 서쪽 교외로 옛날 이왕조의 능묘가 있던 바로 군자리 일대 30만평이 좋은 터로 확정됐다. 이곳 이왕가의 능묘는 이미 금곡리에 이장이 완료된 지 오래였고, 일대의 아름다운 송림은 새로 생길 코스를 즐겨 맞으려는 듯 숙연해 보였다는 것이다.

약 30만평의 넓이로 땅이 비옥해 잔디가 매우 잘 자라고 남쪽 18만평의 경사면에 18홀 7,000야드 규모로 만들어졌다. 이 단계에서 이 땅의 골프코스 건설에 영친왕이 주역이 됐다.

경성GC 멤버이자 이왕직 차관을 맡고 있는 시노다가 영친왕을 뵙고 신코스 건설 계획과 뚝섬 군자리의 구 유릉적(裕陵跡)의 땅 사용을 간청하자 영친왕은 이미 일본에서 골프를 하던 터여서 그 자리에서 응낙했다.

영친왕은 부지를 무상대여 할뿐만 아니라 건설비로써 2만엔을 낼 것이며 금후 3년간 매년 5천엔씩의 보조금도 하사하겠다고 까지 약속한다. 이런 점에서 영친왕 이야 말로 한국 골프사상 결코 허술히 다루어서는 안 되는 높은 비중의 중요 공로자로 치지 않을 수 없다. 패망한 나라의 비운을 씹으며 어려서 일본에 볼모로 납치된 영친왕은 비전하인 이방자(일본 황족 梨本宮 方子)여사와 함께 골프로 울분을 달래는 생활을 이어갔다.

영친왕의 하사금과 클럽의 기금 2만엔, 기타 유지로부터의 기부금 및 부지내 벌목 매각대금 1만엔 등 6만엔의 예산으로 군자리의 경성GC 신 코스 건설은 그 첫 발을 내디디게 된다.

1929년 1월 공사는 시작됐다. 코스내의 수목벌채는 이왕직 쪽이 맡아 2월 하순에 끝나고 레이아웃에 따라 홀의 형태를 갖추는 한편 잔디심기 등을 장마 전까지 끝내고 클럽하우스 등은 이른 가을 이전에 준공키로 착착 진행됐다.

기후 풍토를 고려해 퍼팅그린을 모래로 한다하여 논란을 일으킨 것 말고는 조성 공사가 순조롭게 진척되어 가을쯤 거의 완성됐다. 클럽이사가 고려잔디를 일본에서 가져와서 그린을 잔디그린으로 하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에 멤버들도 동의해 코스 개장이 1930년 다음해로 연기됐다.

경성GC 군자리 코스 자체는 1930년 초여름에야 완성되어 클럽은 청량리 코스에서 군자리 코스로 6월 22일에 이전, 오픈했다. 전장 6,045야드(아웃 3,015 야드 인 3,030야드)에 파69(34·35)의 정규 라운드를 보장하는 본격적인 18홀 코스가 탄생한 것이다. 이로써 이 땅의 골프사상 처음으로 본격적인 코스가 만들어졌다.

군자리 코스 홀별 길이 (18홀)

홀야 드 파 홀야 드 파

1385 4 10305 4

2360 4 11155 3

3190 3 12410 4

4370 4 13405 4

5415 4 14190 3

6425 4 15155 3

7140 3 16540 5

8360 4 17450 5

9370 4 18420 4

계 3,015 34 계 3,030 35

* 토탈6,045 69 (1930년 개장 당시의 야드)

 

글|정노천(골프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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