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골프장 가는 길은 참 멀고도 험한 길
초창기 골프장 가는 길은 참 멀고도 험한 길
  • 남길우
  • 승인 2017.01.3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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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골프장 가는 길은 참 멀고도 험한 길

조립식 셔틀버스나 전동차 이용

골프는 플레이를 하기 위해서 여러 조건들이 충족 돼야 가능하다. 먼저 골프를 좋아해야 골프 입문이 가능할 것이고, 골프를 즐기기 위해선 재력이 있어야 하고, 같이 즐길 지우들 그리고 스코어를 낼 수 있는 지력 등이 필요해진다. 그 외 부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클럽이나 웨어 등 도구들이다. 그리고 코스가 주로 도심에서 뚝 떨어진 관계로 이동 수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통수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초창기 탈 것은 주로 이동수단으로 쓰였다. 훗날 골프장 출입에서는 과시욕까지 보태져 고급 승용차라는 부대효과까지 가미되면서 자동차 문화에 상당한 발전과 의미를 부가시켰다. 과거 초창기 골프장엔 어떻게 이동했을까?

글 정노천(골프컬럼니스트)

1950년대 조종사 자격을 획득해 대한국민항공사를 창설한 신용욱 씨가 있다. 당시 여의도에 비행장이 있을 때인데 그는 시간이 나면 직접 헬리콥터를 조종해 서울CC 군자리 코스까지 왕래하면서 플레이했다. 그러자 헬리콥터의 소음과 먼지로 골프장의 조용한 분위기를 해쳐 빈축을 사기 마련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하늘에서 내려와 공을 치고 하늘로 올라간다며 신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변에서 그런 행각이 골프장 분위기에 맞지 않으며 타인에게 방해가 되므로 자동차로 왕래하도록 권고했으나 끝내는 골프를 그만 두었다는 사례가 있다. 골프장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골프를 그만둔 케이스다. 후일 이순용 이사장이 “헬기장을 만들어 줄걸!….”하면서 애석해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한양컨트리클럽에도 같은 사례가 있다. 개장 2년간은 적자 운영이더니 3년부터 흑자가 나기 시작했을 때였다. 코스 인근 서삼릉에 소풍 나온 소풍객들이 코스 안으로 대거 침입, 부드러운 그린위에서 뒹굴기도 하여 플레이어들과 실랑이가 잦았던 시기였다. 코스 주변에 미군부대가 많았는데 미군들이 플레이하러 올 때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와 혼란이 거듭되자 아예 14홀과 15홀 티의 중간에 헬리포트를 만들어 주었다. 미군 플레이어들이 헬리콥터에서 뿌연 먼지를 뒤집어쓰며 뛰쳐나오는 모습이 요란했다. 그들에게는 쿼터제 멤버십 즉, 매분기(3개월)마다 20달러씩 내는 멤버십 카드가 발급됐다.

골프 붐이 한창일 때 지방의 모 골프장에서 ‘이동수단으로 헬기를 이용하자’는 안이 여러 번 나왔으나 결국 현실적으로 실행되지 못한 사례도 있었다.

 

골프와 교통은 비례한다

국내 골프장 초창기인 1920년대 효창원 코스는 당시 서울의 명소중 하나로 시민의 관심을 끌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효창원 코스의 악재로 부각됐다.

차츰 도심이 확대되면서 효창원 코스가 서울 중심부로 들어왔고 교통이 편리해 시민들의 산책길이 효창원 코스의 근처에까지 뻗어 나가면서 시민들은 코스 안의 녹지대를 포함, 일대를 시민공원으로 조성하도록 당국에 목소리를 높였다.

“효창원 코스는 너무 비좁다”는 골퍼들의 의견도 날로 커지는 판국이어서 개장 2년 만에 코스 이전설이 나돌게 됐다. 마침내 골프장 측은 더 넓은 새 부지를 구해 본격적으로 코스를 건설키로 이야기가 무르익어 간 것이다.

그런 과제와 문제 해결을 위해 한반도 최초의 골프클럽인 경성골프구락부(경성GC)가 결성된 것이다.

새 코스 건설에 드는 비용은 엄청난 액수인데 무엇보다 부지 매수 자금이 한 푼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서울 근교 청량리(당시는 석곶리(石串里)) 근처 이왕족 소유의 능림을 차용하기로 한다.

이렇게 되어 탄생한 것이 16홀 청량리 코스이다. 주목할 사실은 경성GC 결성을 계기로 골프장이 철도국과 조선호텔의 관할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운영케 됐다. 경성GC 창립총회를 보도하면서 경성일보는 이렇게 썼다. “동양제일이라고 뽐낸 효창원 코스가 2년 후 공원으로 편입되는 관계로 폐쇄돼야 함으로 골퍼들이 사단법인체를 구성해, 청량리 근처 석곶리에 신코스를 건설하려고 한다. 청량리에 만드는 코스는 규모 16홀로 계획해 건설비를 4만엔으로 잡고 있다는데 자금 염출 방법으로 각 멤버에게서 1천엔씩 각출하고 나머지는 일반으로부터 기부를 기대한 듯 했다. 원래 골프코스는 호텔에 부속되어 운영되는 것으로 되어 있어 경성철도국의 호텔이 건설하리라는 소문이었으나 이번에 철도국은 이를 부인했다. 어떻든 효창원 코스가 폐쇄되기 전까지 청량리에 이상적인 코스가 건설될 것으로 보인다.”

청량리 근교, 석곶리에 확보된 부지는 겨우 10만평이었다. 청량리역에서 춘천 가도를 가다 왼쪽으로 들어가 공동묘지의 언덕 건너 일대의 송림이 이왕족의 능림이었고 경성GC는 인근의 산림을 더 사서 보탠 것이 그 정도였다. 부지가 산비탈의 경사지이어서 본격 골프코스, 즉 18홀을 만들기에는 크게 부족했다. 설계가가 가까스로 16홀을 그려 넣기까지 그 고생이 매우 컸을 것은 분명하다. 홀의 거리도 짧고 모양새도 안 좋고 부대시설도 허름할 수밖에 없는 코스였다.

하지만 티잉그라운드, 연못, 벙커 및 그린의 위치를 정해 도면에 옮겨놓았다. 공사 자금은 만철 경성철도국이 마지못해 낸 2만엔에 멤버들이 낸 2만엔 등 4만엔이 조달됐지만 공사가 진행되면서 턱없이 부족해 자금난으로 완벽하게 시공되지 못했다. 그린에 고려잔디를 깔려던 계획을 버리고 그냥 야지를 깔 수밖에 없었던 것도 모자란 공사비 때문이었다.

청량리 코스는 ‘변칙’의 18홀 라운드 시스템이다. 1번홀에서 스타트, 순차로 돌아 마지막 16번홀을 홀 아웃 한 후 다시 1번홀과 2번홀을 돌아 토털 18홀 라운드로 끝내는 시스템이다.

청량리 코스의 각 홀의 야디지별 파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1번홀에서 16번홀까지 야디지는 1,641야드이고 이에 1, 2번 홀 길이를 합치면 토털 야디지는 2,147야드가 됐다. 파(par)는 1∼16번 홀까지는 62이나 18홀로는 70(33, 37)이다. 이에 관한 당시의 기록에는 파(par)가 아니고 보기(bogey)로 기재되어 있다. 당시 영국에서 보기(bogey)는 파였으며 이를 본받아 ‘파’를 ‘보기’로 사용했던 것이다.

교통환경 나빴던 청량리 코스

청량리 코스의 준공은 예정보다 늦어져 1924년 11월 하순이었다. “경성골프클럽 청량리 코스는 그간 공사가 잘 진척되어 얼마 전 코스와 클럽하우스 등이 완성돼 효창원 코스는 12월 2일로 폐장되고 12월 7일부터 청량리 코스에 이전케 됐다. 신설 청량리 코스는 경성철도 청량리역에서 동북에 위치한 총 면적 약 10만평을 차지하는 높은 지역에 자리한다.”

개장식은 12월 7일에 열렸다. 골프장 관계자들과 은행과 각종 기업체의 고위 간부 골퍼 40명 그리고 신문기자들이 참석해 테이프를 끊고 축하라운드도 했다.

이렇게 하여 청량리 코스 시절이 활짝 열린다. 행정의 고위 간부나 관리들이 주말이면 떼 지어 청량리 코스를 찾아 플레이를 즐겼다. 이들에 의한 골프 붐과 골프 열풍으로 이색적인 부작용이 생겼다.

“××국장을 만나려면 청량리 골프장에 가야 된다”며 “제기랄, 집에 안 있고 무슨 골프람” 등의 불만이 그것이다. 일부 실업가나 정상배(政商輩)들의 사정이 어려워진 것이다. 주말에 고관의 사택을 방문해 진정이나 민원도 할 수 없게 되어 내뱉게 된 불평, 불만이었다. 어차피 골프장에서 소일하는 그들을 만나려면 당시 사대문에서 뚝 떨어진 청량리 코스까지 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교통편이 매우 나빠 골프클럽 당국은 자동차 회사와 계약을 맺어 동대문에서 코스까지 셔틀버스를 운행, 운임으로 4명 단위로 왕복 1원씩을 받았다.

당시 동일은행에 근무했던 윤호병은 “청량리 코스는 좁고 짧은 코스였다. 그래서 우드로 치기가 어려웠고 아이언을 주로 써야하는 코스였다. 거기에 그린은 샌드그린이어서 모래 위에서 퍼트를 해야 하는 불편이 따랐다. 그보다 서울 도심에서 너무 먼 곳에 있어 한번 가기가 매우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골프코스는 이렇듯 난점이 있었으나 코스 전체의 경관은 뛰어났었다. 북한산 취악(翠岳)을 뒤로 불암산, 수락산 그리고 도봉산 등의 기봉을 낙송 나뭇가지 사이로 보는 경관은 웅대무비 했다. 소나무로 뒤덮인 코스 곳곳에 이름 모를 들꽃이 계절마다 빛을 달리하며 피어나서 정적 속의 진외경(塵外境)이었다”는 묘사가 있다. 골퍼들은 주말이면 이 ‘진외경’에서의 골프에 취해 무료함을 달랬다.

경성GC 청량리 코스에서 골프를 즐기던 멤버들의 기량이 날로 향상되면서 그들은 좁고 짧은 청량리 코스에 차차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그들은 더 넓은 터에 긴 홀을 가진 뛰어난 코스를 욕심내기 시작한 것이다.

“청량리 코스의 전장(全長)은 너무 짧다.”

“벙커도 큼직하게 제대로 만들어야지.”

“이런 코스 컨디션으로 좋은 플레이가 될 리 없다.”

솜씨는 낮은데도 클럽만은 턱없이 값비싼 것을 갖고 쓰며 우쭐대고 클럽 당국에 불평이나 큰소리치기를 좋아하는 멤버는 동서고금 어디에나 있기 마련, 청량리 코스 멤버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코스 이전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기에 이르렀다. 그때가 1927년 가을이었다. 특히 교통편도 너무 나빠 어디든 그렇겠지만 비만 오면 청량리 코스는 늪이 되어 질퍽거렸기 때문이다.

 

골퍼들 전동차를 타고 모진역까지

그렇게 새로운 대안으로 만들어진 코스가 군자리 코스다. 현재 어린이 대공원 자리다. 서울 사대문 안에서 군자리 코스까지는 꽤 먼 거리이다. 그래서 교통편이 항상 문제였다. 한 은행에 자동차가 겨우 한두 대 뿐이던 1930년대 서울CC의 골퍼들 대부분은 전동차를 이용해 ‘골프장 행’을 해야 했다. 골프채 등은 아예 클럽하우스의 라커룸에 맡겨놓고 손가방만 들고 전동차를 타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지상전차인 이 기동차는 동대문 옆에서 시발했다. 경성의 궤도청(軌道廳)이 운영하는 기동차는 동대문에서 뚝섬 간을 운행했으며 그래서 골퍼들에게 편리한 교통수단이 됐다. 도중에 행당, 모진을 거치는 이 기동차편은 오늘의 버스처럼 인기 있는 대중교통 수단으로 승객들로 가득 찼었다.

한때 그 전동차를 타고 다녔던 신용남 씨는 “당시 뚝섬이나 강남지역은 들녘으로 허허벌판이었고 배추, 무 농사를 많이 지었던 관계로 인분을 주로 거름으로 이용했다. 그러다보니 냄새가 나고 그 곳에 들끓는 똥파리들이 엄지손가락만 할 정도로 커서 징그러울 정도였다. 그것이 달려가는 전동차 유리창에 엉겨 붙기 일쑤였”다고 전한다.

주말이면 뚝섬유원지를 찾는 행락객들로 더욱 붐볐으며 자동차 없는 골퍼들은 그들 사이에 끼어 모진역에서 하차했다.

현 건국대 출입구 근처에 있던 모진역은 판자로 만들어진 아담한 건물이었다. 여기서 골프장 정문까지는 꽤 멀고 돌아가야만 했다. 그래서 도보파 골퍼들은 허름한 골프장 울타리를 뚫어 만들어진 지름길 소위 말해서 개구멍 을 이용하게 됐다.

장마철 비가 많이 내려 홍수가 나면 골프장 행이 막혔다. 광장리부터는 물바다였다. 광장교가 없던 때여서 강물이 불어나면 현재 한양대 옆 중량천에 가로 놓인 돌다리 살곶이 다리마저 수중에 잠겼다. 이쯤이면 배편을 이용할 수밖에 딴 도리가 없다. 근처를 지나가는 배를 빌려 타고 건너가야 한다. 이렇게 시내에서 군자리 코스로 가는 도중의 광장동 근처 길은 1970년대까지도 홍수 때면 길이 곧잘 잠겼던 것이다.

1945년에 광복이 되고 나서 10년 만인 1954년 경성GC 대신 서울CC라는 이름으로 출발하지만 교통수단은 오랜 동안 서울CC 멤버들의 골칫거리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1957년 11월 서울CC 이사회에서 안희경 후생위원장의 제안으로 묘안이 제기됐다. “OEC(경제협조처)에 교섭하여 그들의 버스 2대를 사서 운행하기로 하자. 그 자금이 6백만환 정도 드는데 예산을 승인해 달라.” 멤버들의 코스 왕래용 교통수단으로 버스 2대를 사서 해결하자는 이야기였다.

클럽 발족 4년째이고 회원 수도 3백40명으로 늘어나 클럽의 재정에 큰 보탬이 됐지만 교통수단이 좋아지면 더 많은 플레이어들이 유치되어 클럽의 수입 증대에 기여한다는 취지 설명에 모두가 찬성했다.

서울CC에 가입한 인사들은 이른바 고관이나 장안의 명사 또는 은행가 등 저명인들이었지만 당시의 사회적, 경제적 사정에서 자가용 승용차를 운행하는 사람 수는 아주 적었던 때이다.

그래서 군자리 코스에 가려면 동대문까지는 전차로 가고 동대문에서 기동차로 갈아타고 모진역에서 내려 한참 걸어야 했다. 아니면 광주 방면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멤버용 버스를 사서 멤버 전용으로 쓰자는 안 위원장의 제의는 이순용 이사장 등 모든 이사들의 찬동을 얻어 만장일치로 가결 통과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클럽에 그런 큰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버스 구입건은 차일피일 시행이 미뤄졌다.

마침내 이순용 이사장이 나섰다. 젊은 재벌 회원 박건석(미륭상사)을 만나 “전용 버스 한 대를 당신이 마련해 보오!”하고 요청했다. 이에 박건석은 “좋습니다. 제가 마련해 보지요” 하고 기꺼이 응락한 것이다.

당시 30대의 청년 박건석은 이리저리 뛰어다닌 끝에 왕십리의 한 기계 조립공장에서 엔진, 보디 등 자동차 부품을 여기저기서 모으고 드럼캔을 두드려 펴서 차체로 만드는 등 3백40만환을 들여 핸드메이드 버스 1대를 만들어 클럽에 납품하기에 이른다. 차체의 색은 초록색이고 버스 안에는 간이 냉장고까지 배치했다.

‘박건석 버스’가 달리기 시작했다. 시청 출발,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조선호텔을 경유해 군자리 코스까지 가는데 5백환, 왕복에는 1천환의 요금제인 이 셔틀버스의 인기가 매우 높아 자가용차를 가진 멤버들도 곧잘 애용했었다.

박건석은 2년 후 클럽으로부터 버스 제작비를 돌려받았으며 이듬해 1960년에는 최연소 이사로 발탁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 후 역대 이사장들의 눈에 들어 이사 또는 운영위원장직을 맡아 성실히 클럽 업무에 진력해 왔고 그래서 장차 유력한 이사장 후보였다.

그러나 1조 2천억원의 빚으로 검찰 조사를 받아 실의에 빠져 60세의 나이인 1987년 4월 두산빌딩 10층 자신의 사무실에서 투신자살하는 비극으로 삶을 마감했다.

셔틀버스 시간 맞춰 27홀, 36홀도 플레이  

서울CC는 군자리 코스를 1972년 자라나는 2세들에게 물려주고 경기도 원당의 한양컨트리클럽의 전 주식을 인수하면서 옮겨갔다. 한양골프장은 1964년 9월 28일 개장했다.

서울에서 서북방, 서삼릉의 주봉을 오른쪽에 보며 펼쳐진 나지막한 산줄기의 주변,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당리 산 38번지, 33만평의 산야가 그곳이다. 코스 설계는 일제 때부터 골프에 조예가 깊었던 안중희와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골퍼 연덕춘이 맡았다.

“골프장이 들어설 현장에 버스와 도보로 가야만 했다. 종로 5가에서 출발하는 일산행 버스를 타고 불광동 박석고개를 넘어 원당까지 갈 수 있었다. 원당에서부터는 걸어 들어가야 했는데 워낙 눈이 많이 온 때라 눈 속에 빠지며 현장까지 겨우 갈 수 가 있었고 골프장 부지인 산속을 여기저기 헤매 다녀야 했다.” 연덕춘 프로의 회고다.

그만큼 오지의 환경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오픈한 한양CC의 1차 회원은 2백명, 예탁금은 15만원이었다.

당시 서울의 골프 인구는 서울CC 회원을 포함, 불과 700∼800명에 불과했으므로 한양CC의 페어웨이는 텅텅 빌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교통편이었다. 주말에 한양CC를 찾는 골퍼들은 그랜드호텔 앞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골프장까지 가야 했다.

그 버스가 오후 늦게 시내로 들어오기 때문에 골퍼들은 버스 출발시간에 맞추기 위해 27홀도 했고 36홀도 했다.

당시 새로운 골프 풍속도가 생겼다. 앞에서 말했듯이 당시 서울 북방에는 미 제1군단, 미 제7사단, 미 제2기갑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주말이면 미군들이 헬리콥터를 타고 날아왔다.

클럽측은 14홀 티와 15홀 티의 중간지점에 헬리포트를 만들어 주기까지 했다.

이처럼 멀고도 험한 골프코스를 찾는 길엔 요즘은 승용차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과거엔 여러 가지 해프닝이 발생했다. 이렇게 어려움을 당했던 그 시절의 반작용으로 최근 우리나라의 교통망은 어디든 다 뚫렸고 자동차 산업도 엄청 발전했다. 골프의 덕택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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