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골프협회의 유래
우리나라 골프협회의 유래
  • 남길우
  • 승인 2016.12.29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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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골프협회의 유래

1937년 9월 23일 경성GC 주도 조선골프연맹 창립총회

1965년 한국골프협회, 1968년 프로골프협회, 1974년 골프장업협회 발족

1965년 한국골프협회가 서울CC의 주동으로 한양과 부산CC의 3개CC를 회원으로 결성되어 서울CC 박두병 이사장을 회장으로 추대하여 분가해 나갔다. 프로골프협회는 김형욱 회원의 후원으로 1968년 서울CC의 전 헤드프로 연덕춘 등 12명의 프로들로 조직되어 서울CC 허정구를 회장으로 떠받들고 분가해 나갔었다. 골프장업협회(현 한국골프장경영협회)도 1974년에 서울CC 허정구 회원을 회장으로 영입하고 발족했다.

글 정노천(골프컬럼니스트)

조선골프연맹의 창립

경성GC와 군자리 코스는 한반도 골프계의 심장이자 중심으로 굳혀졌다. 골프 발상지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루스의 올드 코스처럼 조선 반도의 골프 메카로 나날이 관록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 상징의 하나로 조선골프연맹의 창립을 들 수 있다. 1937년 9월 23일 경성GC의 주도아래 이 땅의 골프 사상 최초의 조선골프연맹의 창립총회가 개최된 것이다.

경성을 비롯 대구, 평양, 부산 및 원산 등 5개 골프클럽으로 조선골프연맹이 구성됐다. 미국골프협회(USGA)가 세인트 앤드루스(미국), 부르클린, 뉴포트, 시네콕크 힐즈 그리고 시카고의 6개 클럽으로 1894년에 창립된 때보다 23년 늦었다. 또 일본골프협회(JGA)가 고베 골프클럽 등 7개 클럽으로 1924년 창립된 것보다는 13년 늦은 발족이었다.

연맹은 그 설립 목적을 “조선 안의 각 골프클럽이 상호간의 연락을 긴밀하게 하여 사도(斯道)의 향상 발전을 꾀한다.(정관 제2조)”라고 밝혔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조선 아마선수권대회와 각 클럽 대항경기 등 2개의 경기회를 창시”하며 “통일된 핸디캡을 제정한다.(정관 제3조)”고 했다.

연맹이 창립되는 날, 1937년 9월 23일 경성GC 군자리 코스에서 연맹주최 제1회 전조선 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이 경기 또한 이 땅의 골프 사상 최초의 연맹 즉, 오늘로 치자면 골프협회가 주최하는 공식경기이다. 한반도 아마골프의 최대 강자를 뽑는, 최고 권위의 공식경기가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일본이 만주를 공략하여 이른바 ‘일지(日支)사변’을 일으켜 일본, 중국 간에 전투가 이어지던 비상시기여서 경성 이외의 각 지방으로부터 참가자가 매우 적었다. 그래서 조선골프연맹 창립을 기하여 창설한 뜻깊은 대회가 그다지 성황을 이루지 못했다.

‘유령’골프협회 시대

한국의 골프를 총괄할 조직체, 한국 골프의 국제 교류를 도맡아 처리할 단체 즉, 한국골프협회(KGA)를 설립키로 서울CC에서 논의되어 이사장에게 일임하기로 결의했다. 그동안 서울CC가 대행해온 ‘협회’의 일을 제대로 된 ‘협회’를 조직해 이관하자는 것이었다.

외국의 골프 단체들이 ‘한국골프협회 귀중’으로 보내온 갖가지 공문은 무조건 서울CC에 날아왔고 당시 서울CC가 처리해야만 했다. 우체당국은 겉봉에 ‘골프’라고 적힌 우편물이면 무조건 국내 유일의 골프단체인 서울CC로 배달했다. 외국 골프 단체들도 한국에도 의당 ‘골프협회’가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일단 ‘한국골프협회 서울, 코리아’라고 봉투에 써서 보냈고 그것은 어김없이 서울CC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협회 조직 작업은 지지부진, 진척되지 않았다. 서울CC와 부산CC의 2개 골프장만으로는 협회 조직이 어려웠던 것이다. 협회 운영을 위한 재정 확보도 큰 문제꺼리가 아닐 수 없는 일이다. 그보다도 2개의 골프CC 만으로 된 협회를 ‘한국 골프의 총 본산’ 또는 ‘대표 기관’으로 대내외에 내세우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다.

우선 서울CC 1백 50만환 그리고 부산CC 1백만환을 협회 창립기금으로 할당하는 한편 그동안 골프의 대외 관계 업무를 맡았던 홍진기 이사(당시 법무차관)에게 협회 조직의 준비 작업을 맡기는 한편 따로 예산을 받아 협회 일을 본격적으로 했었다.

이렇게 1957년 5월 19일 서울CC안에 서울CC 이사들로 한국골프협회를 일단 창설된 것으로 꾸미고 골프에 관한 대외 공문명의는 ‘한국골프협회 홍진기 회장’으로 하여 발송하도록 공식화 한 것이다. 임원진이며 정관 등이 있을 리 없지만 ‘홍진기 골프협회장’ 시대가 이어졌다.

골프장이 한 두 개 더 늘어나기까지 ‘진짜’ 협회의 조직은 지연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던 중 1960년 4·19혁명으로 홍진기 회장이 옥고를 치루면서 그나마 해온 협회 기능이 공백기에 접어들었다.

 

한국골프협회의 시작

진짜 골프협회 발족은 그로부터 7년 후로 미루어진다. 마침 1964년 경기도 고양에 조봉구가 한양CC를 건설하면서 1965년 9월 서울, 부산 및 한양의 3개 클럽으로 숙원의 한국골프협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당시는 박두병 이사장 시대였다. 진짜 협회가 탄생하면서 한국 골프의 대행 기관으로 재정적 부담에 시달려야 했던 서울CC가 무거운 짐을 덜어 홀가분해진 것이다.

서울CC 한국의 제1호로 골프단체인 한국골프협회(KGA)를 만들어 내는 산파역을 맡아 나중에 분가시킨 첫 케이스다.

서울CC가 앞장서서 어렵게 탄생시켜 분가까지 시켰다하여 모른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월드컵골프 선수 파견에 여비와 합숙비 비용 등 50만원 중 32만원을 서울CC, 13만원을 한양CC가 그리고 부산CC가 6만원씩을 각각 부담토록 협회가 요청해오자 즉각 승인했다. KGA를 만든 3개 클럽이 협회비 등을 공동 부담하는 만큼 이들 가맹클럽의 곤혹스러움은 오래 갔다.

그 후 골프장이 늘어나고 협회 가맹클럽도 늘었지만 가맹 골프장으로부터 협회비를 얻어 쓰는 일에 번잡함을 느낀 협회는 플레이어에게서 협회비를 걷는 안을 짜서 섭외를 펴서 성공했다. 1969년 봄 관악, 한양CC에서는 20원씩 그리고 안양CC에서는 1백원씩을 걷기 시작했다. 이것이 말썽 많은 KGA회비 즉 ‘협회비’의 시초이다.

 

한국프로골프협회 탄생

1965년 한국골프협회의 재건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분가’시킨 서울CC가 이번에는 프로골프협회(KPGA) 결성에 앞장섰다. 주도자는 김형욱(CIA부장) 회원이었다. 서울CC 허정구 회원이 연덕춘, 박명출 등 12명으로 구성된 프로골프협회 초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박정희와 함께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한 주체 세력 중에서도 진짜 주체이면서 골프에 깊이 얽힌 군 출신하면 중앙정보부장이자 KPGA 고문 김형욱과 청와대 경호실장에 서울CC 이사장까지 한 박종규 그리고 민간인(은행전무) 주체 세력으로 서울CC 이사장을 지낸 김종락 세 사람을 꼽게 된다.

이들 서울회원 3명이 골프계에 기여한 바는 결코 적지 않다. 은행가 출신 김종락은 서울CC의 클럽하우스 건립, 박종규는 서울CC 이사장, 부이사장으로 고양시 원당의 한양CC 코스 매수와 합병 그리고 서울CC 부지 불하, 그리고 김형욱은 프로에 대한 지원, 프로골프협회 창설 등에 각각 큰 힘을 쏟았었다. 이 중 김형욱의 KPGA 창립은 특기할만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1968년 여름 서울CC의 헤드프로 박명출과 홍덕산의 부탁을 받아들여 김형욱은 KPGA 설립 기금 각출에 발 벗고 나섰다. 그는 골프를 좋아하는 재계 인사 21명으로부터 각각 1백만원씩 모두 2천여만원을 거뜬히 거두어 프로들에게 주었다. 이 돈을 밑천으로 한국프로골프협회 즉, KPGA는 설립되어 서울CC에서 나가 딴 살림을 차리는 바 1968년 10월의 일이다. 박종규가 청와대 경호실장으로 있으면서 대한체육회 산하 사격연맹회장 직에 있을 때 태릉사격장의 건립 기금을 이병철 등 재계 인사 20명에게서 거의 반강제로 뜯어냈던 그 수법으로 김형욱은 자금을 모아 KPGA를 탄생시킨 것이다.

당시의 2천만원이면 서울 근교에 9홀 코스 쯤 만들 수 있는 큰돈이었다. 그런데 그 후 그 기금 운영이 부실하여 8·3조치라는 사채동결조치에 묶여 손실이 된데다가 회원끼리의 대부 대출 관리 소홀과 화폐 가치 하락 등으로 액면이 크게 줄었다. “KPGA 전용 코스 부지라도 그 때 샀더라면 KPGA는 전용 코스를 쉽게 가졌으리라”고 아쉬워하는 원로 프로들이 많다.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초대 이사

고 문          김형욱

이 사 장      허정구

부이사장     박용학

전무이사     김흥조

상무이사     연덕춘

이 사          구철회, 권철현, 김광균, 김종희, 김창원, 박건석, 유희춘, 이원천, 전택보,

                 정영호, 정주영, 정천석, 조봉구, 최준문, 하태

감 사          성상수, 장상태

 

골프장업협회와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의 역사

어떻든 김형욱이 아니었다면 한국프로골프협회의 역사는 수년 더 늦게 출범했으리라는 가정이 성립된다. 골프장업협회(현 한국골프장경영협회)도 1974년에 서울CC 허정구 회원을 회장으로 영입해서 발족했다. 또 현재 한국골프계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는 1978년 한국프로골프협회 내에 여자프로부로 시작해 1988년에 한국프로골프협회로부터 독립하여 정식으로 사단법인체로 출범했다. 강춘자, 한명헌, 구옥희, 안종현 4명의 창립멤버로 시작해 오늘날 세계골프무대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협회 창립에서 재미있는 것은 김형욱과 허정구의 관계다. 한국프로골프협회를 만든 후 김형욱은 서울CC 이사 허정구를 초대 이사장으로 앉혀 업무 일체를 맡기고는 기금 각출자들을 이사로 그리고 본인은 고문의 자리에 앉았다. 김형욱은 프로의 해외 원정 때 적극 편의를 보아주는 등 ‘프로의 은인’으로 추앙된다. 그러다 1973년 미국으로 도주하여 반(反) 박정희 운동을 하던 중 79년 프랑스(?)에서 실종됐다. 그는 한국의 골프사에 영욕의 획을 긋고 유명을 달리한 ‘골프광’이다.

1999년 9월 23일 84세를 일기로 작고하기까지 골프계에 미친 허정구의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그는 김형욱과는 반대의 각도에서 평가된다. 1956년 2월 그는 신용남, 조권중, 연덕춘, 박명출을 이끌고 필리핀오픈에 단장으로 출전한다. 광복 후 최초의 해외 원정이었다. 그때 선수들이 그를 ‘캡틴’이라고 불러 ‘캡틴’이란 애칭이 오래 그를 따라다닌다. 1961년 서울CC 부이사장으로 천거되어 장기영, 박두병 두 이사장을 도왔던 그가 여느 기업가나 재벌 골퍼처럼 골프장을 만들어 갖기를 열망하더니, 1971년 남서울CC를 탄생시켰으며 아시아 서키트 등 굵직한 토너먼트를 자주 열어 대내외로 ‘토너먼트 코스’로써 명성을 따냈다.

그는 1968년 프로골프협회가 창립되자 초대, 2대 이사장을 맡아 오늘의 KPGA의 기틀을 닦았다. 또한 1972년 대한골프협회 부회장으로 앉아 김형욱 이사장을 돕더니, 1974년에는 골프장 업주들의 모임인 한국골프장업협회(KGBA)를 조직 초대 회장 자리에 앉는 등 골프계의 큰 ‘마당발’이 됐다. 이어 1976년 박종규 회장을 뒤이어 대한골프협회 회장 자리 즉, 한국 골프의 총수자리까지 올라 6, 7, 8대에 걸쳐 9년 간 중임한 끝에 물러났다.

골프의 3대 단체 즉, KGA, KPGA 그리고 KGBA의 회장을 맡았고 1983년에는 아태골프연맹회장까지 휘어잡았고 말레이시아 국왕 및 대법원장의 섭외로 국내 유일의 R&A골프클럽의 멤버에도 뽑혔다. 그는 1989년 6월 74세 때 홈코스 남서울CC의 외국대사 송별경기에서 72타를 마크, 염원의 에이지슈트까지 했다.

한 골프라이터가 “‘캡틴 허야말로 기량(핸디캡5)·지식 그리고 매너로 따져 역대 골프협회장중 최적격자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그런가? 그리 보아주니 고맙구먼”하고 웃기만 했다고 한다.

그런 공로로 골프협회는 2003년부터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에 ‘허정구배’란 관명(冠名)을 붙여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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