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한국골프
전쟁과 한국골프
  • 남길우
  • 승인 2016.12.01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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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한국골프

태평양 전쟁 그리고 한국전쟁과 부침을 함께한 골프의 의미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 군자리 코스는 아침부터 골퍼들이 몰렸다. 태평양 전쟁으로 황폐해졌다가 이 땅에 7년가량 공백기를 잠자다가 겨우 코스에 나온 골퍼들이었으니 기대가 컸다. 아직 복구를 한지 1달도 채 되기 전의 일요일이었으니 말이다. 티에서 티샷을 날리던 순간 갑자기 공습공보와 방송에서 전쟁이 터졌다고 야단이었다. 또다시 전쟁의 소용돌이로 들어가면 이젠 공 칠 시간과 공간은 영영 없어지는 것은 아닌지, 전제와 더불어 골프장이 또 폐쇄 되기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이 땅에선 골프 암흑기에 돌입한다. 전쟁과 골프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골프는 평화의 키워드인가?

 

태평양전쟁으로 군자리 코스 황폐화

태평양전쟁은 이 땅의 골프코스를 모두 문 닫게 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전국의 골프코스는 전쟁 시설물로 모두 징발 당해 폐쇄됐다. 당시 전국에 있던 대구 코스, 평양 코스, 부산 코스, 원산 코스 등은 2․3년 전에 모두 군사 기지로 징발됐다. 1941년 최후로 남은 군자리 코스(지금의 어린이 대공원)에도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1941년 군자리 코스마저 군사시설로 징발되면서 코스의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잘리고 뿌리까지 뽑힌 채 실려 나갔다. 군용기용 연료의 원료로 송진을 따기 위해서였다.

참고로 당시 멤버는 5백여 명이고 그 중 한국인은 30여명이었다. 1할도 안 되는 수적 열세에도 골프 기량은 일본인들을 압도했었다. 일본인 멤버는 총독부고관, 은행간부, 회사 중역이었고 한국인 멤버는 토호(土豪) 실업가 그리고 은행 간부 등이었다. 김연수, 윤호병, 김흥조, 김계조, 조주영, 김동준, 윤치왕 등이 있었다. 또 선수급 플레이어들은 장병량, 박용균, 김건영과 대구의 서정식 등이 군자리 코스를 주름잡았던 인물들이다.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경성골프구락부 군자리 코스도 1943년 폐장됐다. 몇몇 페어웨이는 글라이더의 이착륙 연습장으로 쓰이고 나머지 코스는 농경지로 개간됐다. ‘식량 증산’을 위해 인근 농민들에게 소작으로 나눠주었다. 소작 농민들은 코스의 잔디를 걷어내고 논과 밭으로 만들었다. 순식간에 코스의 흔적은 사라지고 말았다.

농사를 짓기 시작해 1년여 남짓한 때 휴전이 되고 광복을 맞았다.

1945년 전쟁은 끝났고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면서 우리나라는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광복 후 국토의 양분과 함께 닥친 좌우익의 이념 충돌, 무질서한 사회상 속에서 군자리 골프코스는 갈기갈기 찢어발겨진 앙상한 모습이었다. 코스는 영영 농경지로 그 지목(地目)이 묶이는 암흑기를 맞았다. 그 혼란 속에서 누구도 골프장 복구라는 말을 꺼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 골프의 메카 군자리 코스는 사라졌고 1949년까지 7년을 골프코스 하나 없이 보내야만 했던 골프 암흑기였다.

군자리 코스 복구위원회 탄생

1949년 11월, 이 땅에 골프 회생의 길이 보였다. 이승만 대통령 때 ‘군자리 코스 복구위원회’가 비로소 탄생했다. 6월 농지개혁법이 공포, 시행되고 주한미군이 철수했으며 11월 지도자 김 구 선생이 피살되는 어수선한 국내 현실에서 골프장 복구를 시도한 이승만 대통령 등 몇몇은 이 땅에서 용감한 골프 선구자가 아닐 수 없다.

복구위원회 멤버는 당시 총무처장 김규홍 위원장, 이용설, 조주영, 전용순, 구자옥, 오한영, 김동준 등이었다. 실무는 상공회의소 회장 전용순, 간사는 총무처장 비서실장 최창규, 상공회의 사무국장 송병희 그리고 프로골퍼 연덕춘이 맡았다. 사무실도 상공회의소 안에 두었다.

군자리 코스 1차 복구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3주년인 1948년 광복기념식에 참석하면서 한국에 골프코스를 만들기로 작정했다. 내빈으로 참석한 미군 수뇌부들에게 인사차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묻자 그들은 “주말이면 골프를 즐기기 위해 군용기를 이용해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대답해 이 대통령은 깜짝 놀랐다. 불행히도 당시 한국엔 골프장이 하나도 없었다. 이념 충돌로 어수선한 국내 정세와 자칫 미군 수뇌부들이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북한군의 침략해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면서 함께 자리한 김규홍 총무처 장관에게 골프 코스를 만들라고 그 자리에서 지시를 내리게 된 것이다. 단연코 국가 방비 의도에서였다.

난데없이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김규홍은 골프를 잘 아는 김동준(합동통신사장)과 함께 여러 곳으로 코스 후보지를 물색했다. 물론 군자리 옛 코스도 몇 번 둘러보았고, 프로 연덕춘을 만나 상의했다. 연덕춘은 “군자리 옛 코스 자리가 가장 좋다”고 강력히 추천했다. “우선 위치나 지형이 좋고 저렴한 비용으로 단시일 내에 근사한 골프코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등 유리한 점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전규홍은 연덕춘의 의견을 접수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얻어냈다. ‘군자리 코스 자리가 가장 좋다’는 강력한 연덕춘의 견식과 소신이 아니었다면 사태는 어찌 진전됐을지 모르는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김규홍의 안내를 받아 군자리 후보지를 직접 시찰했는데 조금은 실망한 눈치였다고 한다. 골프장의 윤곽이라도 남아 있으려니 예상했던 이 대통령 눈앞에는 잡초가 우거진 황량한 논밭만이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주말이면 골프 하러 일본으로 가는 주한미군이나 외교사절들을 국내에 잡아두기 위해서 국내 골프코스는 필수요건이라고 믿은 이 대통령의 고집으로 군자리 코스 재건 작업은 급진전되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골프의 ‘대부(代父)’격이다.

그런데 문제가 불거졌다. 대한암흑기에 이 왕직(李 王職)이란 부서 이름이 구황실 재산관리국으로 바뀌고 군자리 코스의 부지도 구황실 재산관리국의 소유로 전환됐다. ‘언젠가는 우리 농지가 되겠지’하고 굳게 믿었던 소작 농민들은 “땅을 도로 내 놓으라”는 클럽의 요청에 크게 반발해서 연일 시위를 하면서 반대에 나섰다.

김규홍 총무처장은 이 같은 사정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상세히 보고하는 한편 소작농 대표를 만나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땅을 골프장에 내주면 생활 보장을 해주겠다”는 약속 아래 가까스로 동의를 얻어내 골프장 복구 작업은 급진전하게 됐다.

코스 설계는 연덕춘 프로가 대한암흑기 시절 플레이 경험과 감각을 되살려 골프장 설계도도 없이 눈짐작으로 레이아웃을 잡아 나갔다. 토량 작업에 미군의 장비까지 동원시키는 정도로 정부 주도 공사였다. ‘우리 함께 골프장을 만들어, 우리 함께 플레이 하자’는 캐치프레이즈가 먹혀 들어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몇 차례 현장시찰을 하는 등 격려에 힘입어 공사는 순조롭게 진척되어 1950년 5월 일단 마무리됐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바로 한 달 전이었다.

 

6·25로 다시 골프코스 황폐화

코스 복구공사라면 나무도 심고 벙커와 해저드도 제자리에 앉히고 러프가 있어야 코스의 맛이 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잔디가 넓게 심겨져 페어웨이가 초록빛이어야 하는데 1년여에 걸쳐 공사 완료된 모습은 골프코스의 형태만 갖추었을 뿐 만족스러운 골프 코스가 아니었다. 외교사절이나 방한하는 수반들에게 의전으로 내놓을 만한 골프장 하나 없는 나라라면 얼마나 초라한가. 하지만 한국에서 복구된 유일한 코스가 그들에게 보란 듯이 내놓을 만큼 자긍심 있는 코스환경은 아니었다.

잔디도 없고 러프도 없고 벙커도 제대로 된 것이 없어 중동의 사막 골프장을 방불케 하는 맨땅 코스였다. 그럼에도 현장을 찾아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은 마냥 흐뭇해했다.

맨땅 위에서의 플레이에도 골퍼들은 희희낙락 감격해 마지않았고 점차 익숙해 갔다. 생각하면 광복 후 처음이고 국내 골퍼들에겐 8년여만의 라운드였으니 그 기쁨은 헤아릴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의 예감이 딱 맞아떨어졌다. 코스가 복구된 지 채 한 달도되기 전에 6. 25 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 1월 한미 군사협정이 맺어지고, 4월 농지개혁법이 실시된 지 두 달 후인 6월 25일 북한군 남침의 한국동란이 발발한다. 이어 7월 유엔안보리 한국전 참전결의로 9월에 유엔군 출병으로 수도 서울이 탈환되고 10월 38선 돌파, 평양 점령 등 여기까지는 순조로운 ‘전진’이었다. 그러나 11월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으로 후진하면서 1951년 1월 서울을 다시 빼앗겼다가 2월에 재탈환하기에 이르는 이 기간 동안 군자리 코스는 다시 엉망이 되고 말았다. 적치(赤治) 4개월 동안에 군자리 코스는 복구 이전보다 더 철저하고 악랄하게 파헤쳐지고 메워져 완전 황무지가 되고 말았다는 게 코스 재복구에 관여했던 연덕춘 프로의 증언이었다.

‘이 땅은 우리의 논밭이니 우리가 되찾아야지’라는 소작 농민들의 거센 분풀이 삽질과 적 치하의 엉터리 농지 분배 실시로 형태뿐이던 골프코스마저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찢기다 못해 산산조각 난 처량한 모습으로 둔갑한 것이다.

6.25전쟁은 군자리 코스만이 아니라 1941년 일본오픈 챔피언 연덕춘까지도 황당하게 만들었다. 날로 그의 마음이 황폐해지고 지쳐만 가던 때 외자청장 이순용을 만나 심신이 일신된다. 염원해 오던 군자리 코스의 재건에 손대게 됐으니 그의 삶이 활기를 되찾게 된다.

“연 프로, 나하고 군자리 코스를 복구하자” 이순용의 이 한마디에 그는 온몸의 전율 같은 것을 느꼈고 이어 밀렸던 설움과 분노가 일거에 복받쳐 왈칵 눈물을 쏟았다. 하지만 사회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군자리 코스를 다시 복원하고 클럽을 만들기 위한 발기 위원들이 ‘복구’나 ‘재건’이란 말을 피하고 ‘창설’이란 어휘를 썼다. 그 심정이야 오죽했을까. 재복구 모임 명칭은 ‘서울CC 창설동의자’였다.

2차의 복구공사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미국 망명자 출신 이순용 외자청장을 필두로 김진형 한국은행 총재, 김동준 합동통신사장이 뜻을 모았다. 각계각층의 인사를 규합했다. 그들의 면면을 보면 강성태, 김유택, 김태선, 백두진, 손원일, 윤호병, 임문환, 임송본, 장기영, 전용순, 조정환, 조주영, 최순주, 한 홍, 이기붕 등 18명이 이른바 ‘창설동의자’이다.

이들은 골프를 하지 않고 해본 일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군자리 코스 용지가 구황실 재산관리국 소유여서 법적으로 다시 임대해야 하는 교섭을 비롯해 코스 복구 작업에 도움을 받기 위한 각계의 필요 인물들로 구성한 위원회이어서 실무진은 반도 안 되고, ‘얼굴마담’이 절반 이상으로 구성됐다.

복구 사무실은 한국은행 별관에 설치했다. 공사는 1953년 3월에 시작되어 1년 만에 완료됐다. 제1차 공사 그러니까 한국 동란전인 1949년에 시작, 1950년 5월에 끝낸 공사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규홍 총무처장 등 정부 측의 주도로 이루어진 케이스이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의 제2차 공사 즉 1953년 착공, 1954년 준공 된 공사는 정부 주도가 아니고 민간 주도로 진행됐다고 차별화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전쟁 잿더미가 말끔히 복구도 안 된 상황에서 대통령이 또 다시 직접 나서 골프장 재건 공사를 추진하기는 국민의 눈총도 있고 야당이나 신문의 비난도 예상되어 이순용을 대신 내세운 것뿐이다. 따라서 명분만 민간주도 일뿐 실질적으로는 그의 주도이었다. 그는 주한 미군이나 외교사절이 한국을 식민지화한 일본에 가서 골프를 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 불탄 나머지 정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영향력은 그의 오른팔인 이기붕이 코스 재건 발기인 명단에 들어가 있는 것만 보아도 짐작이 쉽게 된다. 거기에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고집쟁이’ 이순용의 불도저식 밀어붙이기식 헌신이 있었기에 전화(戰火)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인 이 땅에 골프 코스가 의젓하게 재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나라의 골프융성 여부는 그 나라 국가 원수의 골프 사랑 여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는 고사(故事)가 실증된 케이스이다.

드디어 1953년 11월 서울CC 창립이사회가 20명으로 구성됐다. 이순용 이사장은 물론 ‘창설동의자’ 주축에 실무자를 보탠 가감 집행부 구성이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정계 관계 11명, 은행계 6명, 상공회의소 2명 및 군부 1명이다.

이들 이사 및 감사 중 골프를 하는, 즉 골프 유경험자는 겨우 5명뿐이었다는 사실은 재미있는 이야기다.

이들 이사회 주도 아래 8개월 후 1954년 6월 11일 서울CC 군자리 코스는 공식 개장식을 가졌다. 광복된 한국 골프의 새장(章)이 열린 것이다.

 

서울컨트리클럽 발족과 주역들

역사적인 서울CC 창립총회는 1953년 11월 11일 오후 3시 반 광화문 중앙청사내 외자청장실에서 개최됐다. 바로 서울CC 복구의 주동인 이순용청장의 사무실에서 역사는 시작된 것이다.

서울CC ‘창설동의자’ 18명 중 10명만이 출석했다. 이순용, 윤호병, 조주영, 강성태, 장기영, 전용순, 임송본, 한 홍泓), 임문환, 김진형이었다.

발기인 대표 이순용이 개회의 인사말을 했다.

“오늘 역사적인 서울컨트리클럽 창립총회를 갖게 되어 감개무량하다. 자유진영 국가 치고 골프장을 하나도 갖지 않은 나라가 없다. 이제 우리도 그 골프장을 갖게 됐다. 골프는 심신 단련만이 아니라 고급 사교는 물론 국제간 외교에도 큰 몫을 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골프장 건설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본인에게 건설의 대임을 맡기셨다. 골프장은 국가 예산으로 건설할 성질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민간사업으로 추진돼야 할 국가적인 사업이기도 하다. 빠른 시일 안에 군자리 코스를 재건, 세계적인 명문 코스로 만들기 위해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하자.”

깡마른 중키의 체구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는 그의 모습에 정기가 감도는 듯 했다.

그의 말의 요지는 이러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에게 골프장 재건의 임무를 맡긴 것은 주한 미군 장교들이 휴일이면 비행기로 일본에 건너가서 골프를 즐기고 돌아오는 즉, 대통령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왔다. 그들이나 외국 외교관들이 일본의 골프장에 쏟아넣는 달러를 우리나라에 떨어뜨리게 해야 함은 물론이고 특히 군사적 유고시 고급 미군 장교들이 외국에 나가있게 해서야 말이 되겠느냐고 걱정이다. 그래서 서울의 골프장 재건은 시급을 요하는 국가적 과제라는 것이다.

골프장 건설은 단순히 국민 건강을 위한 스포츠적인 시설만이 아니고 국익을 위한 외교의 무대이자 외화를 벌 수 있는 관광 레저의 자원임이 강조됐다. 그는 발기인 일동은 국가적 사명의식과 자부심을 갖고 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해 만장의 박수를 받았다.

전쟁을 벗어난 뒤 서울CC는 1954년 4월 28일 사단법인으로 정식 인가 된다. 그리고 휴전상태의 대한민국에서 골프장은 500여개 가까이 늘어나면서 평화를 구가하는 키워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글 정노천(골프컬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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