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골퍼 등장은 언제
한국인 골퍼 등장은 언제
  • 남길우
  • 승인 2016.10.31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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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골퍼 등장은 언제

우리나라 골프 선각자들, 청량리코스부터 등장

한국의 골프는 1890년대 원산해관 업무를 위탁받은 영국인 세관원들로부터 도입됐고 간이식 코스는 그들만의 즐기는 우리에겐 생소한 놀이터가 됐다. 그리고 1921년 효창원에 처음 만들어진 9홀 규모의 효창원코스는 대한 암흑기에 만들어진 골프코스라 또한 그들만의 놀이터가 됐다. 그러다가 나라 잃은 조선인들은 그들의 눈치나 보고 빌붙어야 하는 근성을 갖게 됐다. 그런 유습은 아직까지도 남아, 이익이 된다면 자신의 자존인 양심도 져버리고 강자에게 붙어서 인간이하의 행태를 보이며 사는 인간들이 있다. 어쨌든 그런 와중 속에서도 청량리 코스로 옮겨가면서 한국인 골퍼들이 코스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글 정노천(골프컬럼니스트)

 

1921년 개장한 효창원 코스엔 한국인이 플레이 했었다는 기록이 언급되지 않고 있다. 물론 1890년대의 원산 해변 6홀 코스도 영국인들 세관원들만 플레이 했던 곳이다. 주변을 지나치다보면 이상한 작대기를 휘두르는 것만 목격했다고 인근 노인네들의 구전만 기록으로 내려오고 있었으니 조선인은 아예 접근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1921년 개장한 효창원코스가 공원으로 편입되면서 폐쇄됐고 1924년 옮긴 청량리코스에서야 한국인 골퍼들의 이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청량리 코스의 준공은 예정보다 늦어져 1924년 11월 하순이었다.

“경성골프클럽 청량리 코스는 그간 공사가 잘 진척되어 얼마 전 코스와 클럽하우스 등이 완성됐음으로 효창원 코스는 12월 2일로 폐장되고 12월 7일부터 청량리 코스에 이전케 됐다. 신설 청량리 코스는 경성 철도 청량리역에서 동북에 위치한 총 면적 약 10만평을 차지하는 고지역에 자리한다.”(京城日報 보도)

교통편이 매우 나빠 골프클럽 측은 자동차 회사와 계약을 맺어 동대문에서 코스까지 셔틀버스를 운행, 운임으로 4명 단위로 왕복 1원씩을 받았다.

청량리 코스 개장식은 12월 7일에 열렸다. 총독부 오쯔카(大塚) 내무국장을 비롯해 총독부 고위관리, 은행과 각종 기업체의 고위간부 골퍼 40명 그리고 신문기자들이 참석하여 테이프를 끊고 축하라운드도 했다. 이렇게 하여 청량리 코스 시절이 활짝 열린다. 총독부의 고위 간부나 관리들이 주말이면 떼 지어 청량리코스를 찾아 플레이를 즐겼다. 이들에 의한 골프 붐과 골프 열풍으로 이색적인 부작용이 생겼다.

‘××국장을 만나려면 청량리 골프장에 가야된다’, ‘제기랄, 집에 안 있고 무슨 골프람’ 등의 불만이 터져 나올 정도 였다. 일부 실업가나 친일로 득세 중인 정상배(政商輩)들의 사정이 어려워진 것이다. 주말에 총독부 고관의 사택을 방문해 진정이나 민원도 할 수 없게 되어 내뱉게 된 불평, 불만이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이들도 골프장으로 몰려가기도 했다.

한국인 골퍼의 등장

이 청량리 코스 시절 한국인 골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외국에서 골프를 배운 사람도 있지만 이들이 한국인 골프의 선구자인 셈이다.

당시 동일(東一)은행에 근무하던 윤호병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는 훗날 청량리 코스를 이렇게 평가했다. “좁고 짧은 코스였다. 그래서 우드로 치기가 어려웠고 아이언을 주로 써야하는 코스였다. 거기에 그린은 샌드그린이어서 모래 위에서 퍼트를 해야 하는 불편이 따랐다. 그보다 서울 도심에서 너무 먼 곳에 있어 한번 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청량리 코스의 샌드그린은 글자 그대로 모래그린이었다. 볼이 온 되면 볼은 모래에 파묻힌다. 벙커안의 조금 단단한 모래에 볼이 박힐 때와 같은 형태였다.

플레이어는 그 볼을 집어올리고 볼 마크(볼 낙하 자국)를 그린 주변에 비치된 고무래로 골라 평탄하게 수정한 후 볼을 리플레이스 하여 퍼트를 하는 시스템이다. 플레이어는 다시 고무래로 볼이 굴러간 자국까지 수정하고 나서 그린을 떠나야 했다.

청량리 코스는 부지가 좁아 홀이 16개인만큼 그린도 16개였다. 1번~16번 홀을 라운드 한 후 1~2번 홀을 돌아 18개 홀을 끝내는 시스템인 관계로 2개의 홀은 티마크를 각각 두 개씩 갖고 있었다.

16번 홀 라운드 후에 이어지는 ‘17번홀’, ‘18번홀’째의 티마크는 딴 위치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골프 코스는 이렇듯 결점이 있었으나 코스 전체의 경관은 뛰어났었다. 북한산 취악(翠岳)을 뒤로 불암산, 수락산 그리고 도봉산 등의 기봉(奇峰)을 낙송 나뭇가지 사이로 보는 경관은 웅대무비 했다. 소나무로 뒤덮인 코스 곳곳에 이름 모를 들꽃이 계절마다 빛을 달리하며 피어나서 정적 속의 진외경(塵外境)이었다”는 묘사가 있다. 고국을 떠나 식민지에서 근무하는 일본인 골퍼들은 주말이면 이 ‘진외경’에서의 골프에 취해 무료함을 달랬던 것이다.

이때쯤 플레이어들이 쓰는 클럽의 수는 늘어 나 우드 3개, 아이언 4~6개에 퍼터 1개 등 10개로 플레이했다. 7번 이하의 숏 아이언이 나오지 않았던 때이다. 그들은 6번 아이언으로 어프로치와 벙커 플레이도 해야 했다.

가장 실력이 좋았던 한국인 플레이어

한국인 플레이어 중 일찍이 외국인에게서 골프를 배운 세브란스병원 약품담당 박용균의 솜씨가 가장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첫 한국인 골퍼로 지목되는 윤호병과 함께 동일은행에 근무한 민대식, 임긍순, 김한규, 한상룡, 박용철 등이 있다. 솜씨는 애버리지 골퍼수준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정식멤버가 되려면 일본인 멤버의 추천을 받아야 했다.

청량리 코스 시절 이름난 쟁쟁한 골퍼로는 메시 이즈미(飯泉幹太) 조선은행 서무국장, 무샤(武者鍊三) 경성전기 사장 그리고 코스부지 해결의 공로자 시노다(篠田治策) 이왕직(李王職) 장관 등이 있었다.

멤버 40명 중 이들이 뛰어난 골프 솜씨로 클럽챔피언 등을 휩쓸었다. 동료 멤버들은 이들에게서 원포인트 레슨을 받았으며 그들의 플레이를 졸졸 따라가며 구경할 정도였다.

이러한 가운데서 전국의 선수들을 청량리 한곳에 모아 제1회 전조선선수권경기를 개최, 처음으로 전국 규모의 첫 대회를 가졌다. 1925年 제1회 전조선골프선수권대회, 즉 우리나라 첫 공식골프대회가 청량리코스에서 홀 매치플레이로 열려 대회는 예선과 결선의 방식으로 치러졌다. 첫 대회인 만큼 많은 화제를 낳았다. 이 대회는 이 땅의 골프대회 효시가 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무렵 활동했던 골퍼들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는 게 아쉽다. 그 중에서도 대구코스의 사이토(齊藤)와 경성코스의 나카무라(中村寅之助)가 열전 끝에 일몰로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3일간에 걸쳐 53홀의 플레이를 계속한 끝에 나카무라가 우승을 거둔 진기록이 남아있다. 골프대회가 골퍼확충에도 지대한 역할을 했다.

영친왕과 군자리 코스

불운의 왕, 볼모로 일본에 끌려간 영친왕(李垠)은 청년시절부터 골프를 했다. 일본에서 유명한 아카보시(赤星六郞)으로부터 골프를 배워 일본 황족들과 자주 골프를 했다. 또 고국 땅을 밟을 때마다 자신이 하사한 땅에 만든 군자리 골프코스를 찾았다.

1930년대 초반기의 어느 날 군자리코스를 찾아가는 영친왕을 수행한 朝鮮新聞(일어판)의 김정래 기자는 영친왕의 스윙모습을 촬영하여 앨범 한 권에 담았다.

코스에 나오면 영친왕은 대개 2~3시간 라운드를 했는데 그 표정은 운동을 즐기는 모습이 아닌, 어딘가 수심에 잠겨 있었다. 영친왕이 코스에 나가면 군자리 관할인 성동 경찰서장이 직접 나와서 플레이를 하고 있는 한국인 골퍼들의 접근을 막는 등 경호가 철저했었다. 라운드를 마치면 평복차림으로 나온 이방자 여사와 함께 조용히 수림사이를 산책하다가 돌아가곤 했다는 것이 김 기자의 목격담이다. 영친왕은 伊藤博文에 의해 1907년 11세 때 강제로 일본에 끌려간 뒤 1963년 11월에 귀국 1969년 7월에 타계했다.

 

영친왕

골프 선각자들

1921년 효창원에 건설된 골프코스가 우리나라 골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면 1924년도에 개장한 청량리 골프코스는 한국 골프사상 최초로 한국인 골퍼가 등장한 기념비적인 코스라고 할 수 있다. 1930년에 개장한 군자리 골프코스는 우리나라 골퍼들이 본격적으로 경기에 참가한 코스인 것이다.

당시 청량리 골프코스에 처음 모습을 보인 한국인 골퍼 윤호병(당시 49세, 전 재무부장관, 서울은행장 역임)은 청량리 골프코스를 가리켜 페어웨이가 짧고 좁았기 때문에 볼을 정확히 보내기 위해서는 아이언만 주로 사용하게 되는 코스였다고 했다. 골프클럽측도 코스가 협소하다는 이유를 들어 정규규모 코스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군자리에 넓은 골프 코스건설을 서둘렀다고 한다.

1930년에 개장한 군자리 코스에는 한국인골퍼들의 수가 급증하여 30여명으로 늘어났고 최초로 경기에도 출전할 수 있을 정도로 기량면에서 향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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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그 당시의 골퍼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가나다순)

金漢奎(서울),金東濬(서울),金淵洙(서울),羅容均(서울)

閔大植(서울),朴容均(서울),박동철(서울),尹白皐炳(서울)

尹致旺(서울),吳漢泳(서울),趙柱永(서울),韓相龍(서울)

金晩洙(원산),李象玉(원산),林英植(원산),安重熙(신의주)

張秉良(신의주),金健永(평양),金運永(평양),徐廷植(대구)

鄭雲用(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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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골프경기서 한국인 선수 부상

1936년 경성골프클럽선수권대회 경기에서 장병량 선수가 한국인 골퍼로서는 처음으로 클럽 챔피언이 됐다. 장 선수는 첫 우승에서 자신을 얻은 여세를 몰아 1937년과 1938년 대회에도 계속 출전해 우승, 3연패를 수립함으로써 초창기의 우리나라 골프계에서 괄목할만한 활약과 기량을 보였다.

당시 장병량은 신의주에 골프코스가 없기 때문에 평양 골프코스를 왕래하거나 압록강 철교를 건너서 만주 땅 안동골프코스에서 골프를 했다. 그런 열성이 3연패의 위업을 안겨 주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대구출신인 서정식은 1939년도 경기에서 장병량 선수를 물리치고 챔피언이 됐다. 그러나 1940년도 대회는 23세의 약관 김흥조 선수가 서정식의 뒤를 이어 챔피언이 됨으로써 일제강점기에 한국인 골퍼들이 일본선수들을 물리치고 아마골프경기를 계속 석권했던 것은 골프 초기의 쾌거로서 골프사에 길이 남을만한 업적이다.

 

서정식

군자리 코스 1930년 초창기 멤버 중 조선인 골퍼 50여명

1930년대 초 경성GC의 멤버는 1백70명 내외로 그중 조선인 회원의 수는 50명에 이르렀다. 앞에서 언급한 윤호병을 비롯 김동준, 김흥조 등도 있었다. 그중 뛰어난 기량을 가진 조선인 골퍼로 박용균과 장병량 두 사람이다. 박용균은 세브란스병원(현 연세대부속병원)의 의약 공급업자였다. 당시 서양인 의사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일찍이 골프를 배워 함께 라운드 할 기회를 많이 가졌던 그는 열심히 골프를 했기에 ‘새가 울지 않는 날은 있어도 코스에 박용균이 안 보이는 날은 없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한국골프의 선각자로써 팔자 좋은 중년 실업가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마추어 선수로 두각을 나타냈던 장병량은 1934년에서 태평양전쟁이 서서히 끝나가는 무렵의 1943년까지 조선 제일의 명 플레이어로 명성을 날렸다. 북녘 신의주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경성GC의 멤버 중 조선인 골퍼 유일의 핸디캡 3의 무서운 솜씨를 자랑한 로우 핸디골퍼였다.

이들에 의하여 자극 받아 실력 있는 조선인 플레이어들이 차츰 증가해 가는 추세를 보였다.

아마추어 골퍼 증가

국내 도처에 골프 코스가 늘어감에 따라 주종을 이룬 골퍼들은 일본인들이었으나 이들에 뒤따라 한국인 골퍼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가 한국인 골퍼들의 워밍업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 경성·평양·원산·대구·부산·신의주(안동 코스 이용) 등지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골퍼들은 때로는 일본인들로부터 수모와 차별을 받으면서도 그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분발했음은 훗날 골프 실력이나 기량 면에서 일본인들을 앞지른 기록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골프의 역사에서 대한암흑기를 전후로 나눈다면 전반기가 일본인들의 독무대였다면 후반기는 한국인들이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고 평가된다. 매년 10월에 열린 ‘조선아마추어선수권경기’에서 박용균·장병량·김흥조 씨 등이 챔피언을 쟁취한 기록이라던가, 연덕춘 프로가 ‘일본오픈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한국 골프계의 앞날이 밝음을 증명하는 징조였다.

100타 넘기는 회원 많아

당시 골퍼들의 솜씨는 ‘100대’를 치는 수준이었다. 군자리 코스가 개장할 무렵 즉 1954년대 관록을 쌓은 골퍼하면 이순용, 김동준, 김흥조, 김건영, 한 홍, 이상옥, 조주영, 전용순, 김정렬, 김진형, 윤호병, 오한영 정도였고 ‘극성’골퍼 임문환을 헤아렸다.

“골프를 잘 한 선배 골퍼로는 김동준, 이상옥, 한 홍, 김진형, 김정렬이었다”고 송인상은 꼽는다. 나머지는 모두 애버리지 골퍼수준 이하였다는 이야기다.

부산CC를 1970년에 건설한 서울CC 멤버 임문환은 1950~1960년대의 대표적 극성 골프광의 한명이었다. 새벽에 군자리 코스에 나와 서울CC 멤버 신태화, 한용선과 함께 하루 74홀을 라운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어느 해인가 1년 3백 10일 코스에 나와 골프를 하고 자신이 한 시즌 최다 출장 1위라고 뽐냈다. 그러나 조권중이 2일쯤 더 돌아 수위를 빼앗기고 2위를 감수해야 했다.

그보다 조금 늦게 골프를 시작한 신용남이 3위를 차지했으리라는 이야기다. 임문환은 80세까지 33년 간 6천 라운드를 했다고 밝혔다. 1라운드 7km 잡고 통산 4만km를 걸었다는 것으로 이 길이는 서울·부산 100회 왕복, 지구 적도를 1주한 거리이다.

“한국 화학의 김종희도 1년에 3백 65회 개근한 적 있다.”는 손기원의 증언이 맞는다면 김종희의 기록은 기네스북 감이 된다.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대통령배)

군자리 코스를 재복구한 서울컨트리클럽은 우리나라 골프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한국골프 사상 최초로 제1회 한국아마추어골프 선수권대회를 갖기로 했다. 이는 한국골프가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가 됐으며 특히 아마추어골퍼들의 긍지와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대통령배’를 수여할 정도로까지 급진전 했다.

1954년 10월 9일과 10일, 그리고 10월 16일과 17일까지 4일간 군자리 코스에서 열린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에는 한국 선수 13명과 외국인 선수 3명이 참가했다. 최초로 개최된 경기로 다소 빈약했지만 우승은 주한 ‘유솜’ 소속의 ‘매츠카’ 선수가 차지해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우승배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최초로 대통령배를 수여한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는 한국골프 발전의 촉진제가 됐다. 특히 서울컨트리클럽은 골프계의 활성화사업으로 아마추어골퍼 육성을 위해 ‘아마추어 골프지도(委)’까지 두어 매주 화요일을 ‘아마추어 골프지도의 날’로 정하는 등 아마추어 골퍼 육성에 주력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한국아마대회는 1회부터 15회(1968)대회까지 서울컨트리클럽에서 경기를 가졌으며 그 후 각지에 골프장이 증설됨에 따라 코스를 옮겨 다니며 치렀다.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는 매년 개최되어 경기내용이 충실해지고 한국아마골프계의 역량이 커지면서 미국, 일본, 대만 등지의 외국인선수들까지 출전하는 등 국제규모의 대회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제1회 대회(1954)부터 제10회 대회(1963)까지 참가했던 선수명단(대회순)

金興祚 韓 泓 朴順兆 金鎭炯 趙權重 李象玉 安仁相 金貞烈

趙柱泳 金柱震 全用淳 千炳圭 朴斗秉 金東濬 金健永 安重熙

徐廷稙 任文桓 金成坤 劉載興 愼鏞南 丁基鏞 閔鏞圭 兪昶濬

金淵洙 朴基燮 金慶浩 金元會 許鼎九 崔世璜 崔億鎰 白雲祚

朴勝燦 朴健碩 蘇尙永 韓相元 崔錫昌 趙平載 韓鏞善 白仁燁

金景業 申泰和 金用雨 閔丙瓚 李贄衡 李載瀅 李海明 徐廷翼

李勝珣 申英秀 方永憲 李溶燮 姜亨錫 李鳳益 金纘洙 趙奉九

金再龜 都基柱 李時東 河信澤 文洪祚 高甲春 金敎鶴 金尙榮

李相烈 金鍾哲 金廷柱 宋基復 李炳俊 李鍾喆 陳永述 韓泰慶

權鳳聲 黃孔煥 張三徹 金永圭 金仁培 朴忠緖 姜永萬 金致烈

林春善 崔昌善 郭乙得 朴勝璨 金在億 金 太 李鍾律 李炳善

金英原 崔在奉 李鍾鎭 朴敬福 韓格富 金秉勳 朴平遇 高性奎

張炳贊 李鍾國 金永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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