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펼쳐진 골프대회를 논하다②
이 땅에서 펼쳐진 골프대회를 논하다②
  • 남길우
  • 승인 2016.09.0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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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골프대회의 역사

이 땅에서 펼쳐진 골프대회를 논하다②

88년 국내 골프경기의 역사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골프경기는 서울컨트리클럽에서 1958년 6월 12일부터 4일간 개최된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다. 1958년 6월 12일, 한국아마선수권대회보다 3개월 앞서 서울컨트리클럽 주관으로 치른 이 대회는 한국 최초의 프로공식경기인 셈이다.

한국여자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가 열린 것은 1976년이다. 남자선수권보다 22년이나 늦게 시작됐지만 영국의 여자오픈 첫 대회가 열린 해와 같은 해라고 한다. 프로와 아마가 함께 겨루는 여자오픈선수권대회는 1987년에야 대한 골프협회(KGA) 주최로 열렸다.

현재까지 88년째가 된 국내 공식대회의 역사가 펼쳐진다. 골프 토너먼트의 활성화는 골프 인구의 저변 확대, 선수양성은 물론, 골프 기량 향상 및 해외 진출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지난호에 이어 우리나라 골프대회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글 정노천(골프컬럼니스트)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골프경기는 서울컨트리클럽에서 1958년 6월 12일부터 4일간 개최된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다. 1958년 6월 12일, 한국아마선수권대회보다 3개월 앞서 서울컨트리클럽 주관으로 치른 이 대회는 한국 최초의 프로공식경기인 셈이다. 당시 프로 선수라고는 연덕춘, 신봉식, 박명출 등 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선수 양성을 목적으로 창설된 대회다. 1953년 서울컨트리클럽 발족 당시 연덕춘 프로 한 명밖에 없었던 것에 비하면 10명이나 늘어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이다. 이렇듯 프로계는 그동안 프로골퍼를 육성해 조촐하긴 하지만 대회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출전 선수는 이들 프로와 함께 프로를 준비하는 양성자 14명 등 총 17명이 참가했다. 대회 주관은 한국프로골프협회가 창설되지 않아 서울컨트리클럽에서 맡았다. 이 대회는 1968년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창립을 계기로 협회 주관으로 바뀌게 된다. 당시 프로 양성자로 이 대회에 출전한 선수는 김복만, 김성윤, 김학영, 문기수, 문홍래, 배용산, 이동출, 이일안, 조암길, 조한구, 차민재, 표영환, 한성재, 한장상(가나다순)의 14명이었다.

이 대회는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개최되는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대회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초창기에는 대회 출전 성적이 자연스럽게 프로 골퍼의 자격을 부여하는 기준이 됐다. 그런 연유로 1968년 5월 KPGA가 출범하기 전까지 이 대회를 통해 12명의 프로 골퍼를 탄생시켰고 이들은 KPGA 창립 회원이 됐다.

첫 대회에서는 한국프로골퍼 1호인 연덕춘이 4라운드 합계 306타로 우승했다. 제2회 대회에는 미국의 오빌 무디 선수가 출전해 우리나라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했다. 그러다 제3회부터 9회 대회까지는 우리선수들이 계속 제패해 한국프로골퍼의 기량 향상을 보여주었고 특히 한장상은 제11회부터 제14회 대회에 이르기까지 4연패의 기록을 세웠다. 이 대회는 서울CC 12번, 한양CC 8번, 휘닉스파크GC 4번, 뉴코리아CC 3번 등 전국의 골프장을 돌아가며 개최했으며 한장상, 김승학, 최상호, 박남신, 최경주, 신용진, 박노석, 김대섭, 김형성 등 국내 프로 골프계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꾸준히 배출했다.

최다승은 한장상이 4연패를 비롯해 7번(3, 5, 7, 11, 12, 13, 14회)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 뒤를 최상호가 6번(25, 28, 29, 32, 35, 37회), 최윤수가 3번(30, 31, 33회), 이일안(10, 16회), 김승학(19, 23회), 임진한(26, 27회), 박노석(43, 46회), 신용진(39, 44회), 김대섭(45, 48회)이 각각 2번에 걸쳐 타이틀을 차지했다. 주한 미군 무디(2, 9회)도 2번의 우승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역대 최저타 우승 기록은 2001년 신용진이 휘닉스파크GC에서 기록한 22언더 266타이고, 18홀 최저타는 44회 대회 2라운드인 2001년 8월31일 박도규가 기록한 62타다. 연장전을 통해 탄생한 우승자는 모두 여섯 명이다. 첫 번째 연장전 우승자는 조태호로 이일안과 1977년(20회) 안양CC(현 안양베네스트)에서 290타를 기록한 후 연장전에서 첫 승의 감격을 맛보았다.  

한국여자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

한국여자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가 열린 것은 1976년이다. 남자선수권보다 22년이나 늦게 시작됐지만 영국의 여자오픈 첫 대회가 열린 해와 같은 해라고 한다. 프로와 아마가 함께 겨루는 여자오픈선수권대회는 1987년에야 대한 골프협회(KGA) 주최로 열렸다. 그리고 여자프로선수권은 1990년에야 여자프로골프협회(LPGA) 단독 주최로 열렸으니 남자대회에 비해 30년에서 32년이나 늦다. 이것은 오랫동안 골프가 남성 중심, 남성 위주로 운영돼 왔음을 말해준다. 당시 골프계의 지도자라면 서울컨트리클럽 이사장 등 집행부의 인사들이다. 이들은 여성 골퍼 양성에 소홀했고 소극적이었다. 이순용 이사장조차도 여성골퍼 양성에는 그리 열의를 드러내지 않았었다.

1976년에야 여자아마선수권 대회가 창설되고 1979년에는 아주머니 선수단이 처음 해외원정길에 오르기도 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한국아마추어부녀골프선수권

골프 붐을 타고 여성들도 골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골프장은 물론 골프연습장에 여성들의 출입이 급격히 증가했다. 골프협회는 여성골퍼들의 활성화를 위해 아마추어부녀골프선수권대회를 신규종목으로 신설하고 1972년 10월 21일부터 22일까지 2일간 서울컨트리클럽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관련부서인 ‘문교부’측은 국내분위기를 핑계로 ‘여성 경기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지침으로 견제를 하여 제1회 대회는 무산됐다.

당시에는 협회주최 경기도 문교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협회가 ‘일본은 1907년에 주일외국인부녀골프경기를 1919년에는 神戶골프 클럽 주최로 제1회 부녀골프 경기를 개최했다는 사실, 그리고 오늘날 활성화하고 있는 세계여성골프계의 흐름에 합류해야 할 시점에 도달해 있음’을 강조하고 이해를 당국에 촉구했다.

마침내 협회는 1976년 10월 13일부터 14일까지 양일간에 수원컨트리 클럽에서 제1회 한국아마추어부녀골프선수권대회를 개최하게 됐다. 18홀 스트로크플레이의 경기방식으로 거행된 첫 경기에는 23명의 여성골퍼들이 참가했다.

한국의 여자 골프경기는 탄생부터 순탄치 않았다. 삼성가의 이인희, 명희 자매, 국화정, 조동순 등 ‘부녀’들이 주름잡던 무대에 정길자, 김애숙, 심세희 등 훗날 여자프로로 성장한 어린 여고 선수들이 뛰어들어 간단히 패권을 연거푸 낚아채 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제6회(1982) 및 제7회(1983) 대회에서는 육상선수를 거쳐 언론인 출신으로 훗날 소비자연맹회장으로 활약한 정광모가 81·86 그리고 79·82로 패권을 두 번이나 차지, 톱 부녀 골퍼로서 명성을 굳혔다. 또 배구선수 출신 서춘강은 남성을 뺨치는 2백40야드 롱드라이브로 페어웨이를 제압했다. 대우 김우중 총수의 부인 정희자도 제6회(1982) 대회와 제8회(1984) 대회에서 90·84 그리고 86·92로 톱 5와 톱 10에 들었다. 삼성가 이인희는 제2회(1978) 대회에서 심세희, 조동순에 이어 3위, 제4회(1980) 대회에서는 91·91로 또 2위 그리고 제5회(1981) 대회에서는 88·91로 3위에 입상했지만 우승을 끝내 못해 한을 남겼다.

한국 최초로 가진 부녀골프 대회에 대해 일부의 비판적이었던 때와는 달리 체육계 일각에서도 여성스포츠 생활화라는 측면에서 이해와 격려를 보내줌으로써 여성골프 선구자들에게 자신감과 함께 여성골퍼의 육성에 박차를 가하는 기폭제가 됐다. 제3회 대회(1978년)에는 30여명, 제5회 대회(1980년) 50여명, 그리고 제8회 대회(1984년)에는 일약 84명의 여성골퍼들이 참가하는 등 성황을 이루면서 한국여성골프 발전의 토대가 됐다. 이렇게 어렵게 출발한 여성골프가 이제는 세계무대를 제패하는 스포츠로 크게 발전했다.

 

한국여자오픈

아마추어선수권대회가 생긴 후 프로가 탄생하고 그래서 오픈 즉 프로와 아마가 함께 출전하는 대회가 열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프로가 탄생한 지 오래되어도 한국여자오픈대회는 좀체 열리지 못했다.

내셔널타이틀인 한국(남자)오픈을 주최하는 대한골프협회(KGA)는 역시 내셔널타이틀인 여자오픈 개최에 발 벗고 나서 마침내 1987년 대망의 제1회 한국여자오픈을 개최함으로써 한국의 여자골프경기가 비로소 제대로 체제를 갖추게 됐다. 여자아마추어선수권대회보다 11년이나 뒤졌지만,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가 독자 개최한 한국 여자프로선수권(1989년)보다는 2년 앞섰다.

클럽대항 골프팀경기

한국골프협회가 출범한지 3년이 되는 1968년 협회 주최로 제1회 클럽대항 골프팀 경기를 가졌다. 이 경기는 골프협회에 가입한 골프장 회원의 상호 친선과 우의를 돈독히 한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협회장배를 놓고 벌리는 이 경기는 단체상과 개인상으로 구분 시상했다. 해마다 대회장을 순회하며 경기를 개최하고 있어, 각 클럽의 시설과 코스 소개는 물론, 상호 정보교환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각 클럽에서 9명(현재는 4명)의 대표선수를 선발해 단체전에 출전하며, 경기장소는 각 클럽 골프코스를 순회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제1회 대회에는 서울·부산·한양·뉴코리아·관악·안양ㆍ태능 등 7개 클럽에서 63명의 선수들이 출전했다. 이 대회는 매년 개최 때마다, 클럽의 대표 챔피언 등이 전원 참가해 서로 기량과 우의를 다지는 각 골프장 멤버들의 전국 규모의 골프 대축제이기도 하다.

한국시니어골프선수권 대회

한국시니어골프선수권대회는 1972년 10월 7일 제1회 대회를 뉴코리아컨트리클럽에서 가졌다. 첫 대회는 15명의 노장들이 참가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대회 참가인원은 점차 늘어났다. 1975년 제4회 대회에는 30여명, 제8회 대회부터는 50여명으로 계속 증가했다. 한국시니어골프선수권대회는 세계시니어골프 연맹의 규칙에 준한, 협회회원 클럽의 추천을 받은 남자로서 만55세 이상의 아마추어골퍼들에게만 참가자격이 주어진다.

한국아마추어골프팀선수권

한국아마추어, 한국오픈 등 경기에 이어 한국골프협회 제45회 이사회(1976년 6월 28일)의 결의에 의해 신설된 한국아마추어골프팀선수권대회는 1976년 10월 5일부터 6일 양일간에 걸쳐 서울컨트리클럽에서 제1회 대회를 개최했다. 이 경기에는 국내의 시·도팀을 비롯하여 실향 5도민 팀, 해외동포팀이 참가하는 대회로서 국내외 동포골퍼들의 친선교류경기로 볼 수 있어 더욱 뜻 깊은 대회이기도 하다.

제1회 대회는 국내 시·도팀과 실향 5도팀, 그리고 해외팀으로는 재미 LA팀, 재일관동팀, 재일관서팀, 재일북해도팀 등 모두 21개팀이 참가하는 등 첫 대회부터 대성황을 이루었다. 제11회까지 개최해온 본 대회는 1986년도 전국체전경기 골프경기가 시작되면서 대회성격이 동일해 전환 폐지됐다.

매경오픈골프선수권 겸 아시아골프서킷

매경오픈골프선수권대회는 매일경제신문사가 1982년 4월에 창설했다. 골프협회 주최의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와 겸하고 있던 아시아골프 서킷 한국 대회를 인수해 이를 매경오픈골프선수권대회로 개칭 겸해서 개최하고 있다. 아시아골프서킷대회는 당초 필리핀, 홍콩, 싱가포르 등 3개국 오픈을 연결해 1962년에 창설됐다. 이어서 말레이시아, 일본, 태국, 자유중국이 가입했고 한국은 1970년에 인도와 함께 가입했다.

1974년에는 인도네시아가 가입, 모두 10개국으로 늘어났다. 아시아골프서킷대회는 매년 2월 중순에 필리핀오픈으로 시작해 일본에서의 경기를 끝으로 4월 말에 끝나는 단기 골프투어였다. 매경오픈의 아시아골프서킷 한국대회 인수는 종전 이 대회가 내셔널 챔피언십 한국오픈과 겸해 열리던 것을 스폰서 대회로 탈바꿈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것은 아시아골프서킷대회 각국경기가 종래의 내셔널 챔피언십 경기에서 점차로 스폰서 경기로 전환되는 추세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매일경제신문사가 1980년 아시아골프 서킷 대회의 한국경기를 겸한 한국오픈의 후원회사로 나섰으며 1981년에는 한국오픈의 총상금 중 50%를 부담했고 그 다음해인 1982년에는 단독으로 매경오픈골프선수권대회를 신설하여 협회와 공동주최하기에 이른 것이다. 매경오픈은 1982년 4월 15일부터 4일간 서울컨트리클럽에서 그 첫 대회를 개최했다. 미국을 비롯 13개국의 선수들이 참가한 이 아시아서킷 대회에는 프로 249명 아마추어 101명 총 350명이 예선을 거쳐, 본선에는 프로 150명, 아마추어 16명 등 모두 166명이 참가했으며 19세의 아마추어 선수 김주헌(재일한국인)이 우승컵을 차지, 한국인 최초의 오픈대회 우승의 아마선수로 기록되며 골프계를 놀라게 했었다.

  

한국주니어 및 학생골프선수권

1982년 인도 뉴델리에서 거행됐던 제9회 아시아경기의 최초의 골프 종목채택은 한국 골프 경기대회의 활성화를 촉진했으며 주니어 신인골퍼들의 대량 배출의 계기가 되어 차츰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경기에 출전했던 한국팀이 단체부문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이러한 고무적인 성과에 힘입어 1986 아시아 경기에 대비하는 대대적인 대표선수 육성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대한골프협회는 이런 추세를 포착하고 주니어골프 경기를 활성화하기로 하고 앞서 1983년에는 ‘주니어골프교실’을 신설, 70여명의 신인을 교육시킨 다음 제1회 주니어 골프 선수권대회를 창설하고 경기를 가졌다.

제1회 주니어 골프선수권대회는 1983년 8월 10일부터 11일까지 관악컨트리클럽서 36홀 스트로크플레이 경기로 진행됐다. 만 19세 미만의 아마추어골퍼로서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여자부로 구분해 참가자격을 부여했다.

이 경기에는 골프 교실 수강생들을 포함해 초등부 11명, 중등부 21명, 고등부 24명, 여자부 9명이 출전했다. 국내 최초로 주니어골퍼들이 공식경기에서 기량을 선보였다. 제2회 대회는 참가범위를 넓혀 대학부를 추가하고 명칭도 한국주니어 및 학생골프선수권대회로 바꾸었다. 한국골프의 장래를 걸머질 주니어골퍼 지망자는 예상외로 많았으며 제2회 주니어 및 학생골프 선수권대회에는 대학생을 포함하여 100명 가까운 선수들이 참가하는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한국시니어오픈 골프선수권

시니어 골프의 활성화를 위해 KGA가 창설한 본 대회는 제1회 대회가 1996년 10월 1일∼2일 오라CC에서 개최되어 김덕주 프로가 우승했다. 만 50세 이상의 프로 아마가 출전하는 본 대회는 해를 거듭할수록 참가선수 수가 늘어나고 있으며 2000년 제5회 대회까지 협회가 상금액까지 예산으로 충당하며 시니어 골프의 발전과 활성화에 노력하고 있다.

기타 스폰서대회

스폰서 대회로는 민간 오픈 경기의 효시인 오란씨오픈골프선수권대회가 있다. 제1회 대회는 1976년 10월 13일부터 16일까지 4일간에 걸쳐 프로 24명 아마12명이 참가한 가운데 관악컨트리클럽에서 출범함으로써 골프계의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상금 1,500만원을 지원한 동아식품주식회사는 이 경기의 창설 취지에서 ‘성장기에 들어 선 우리나라 골프의 육성과 골프붐을 위함’이라고 밝혔다. 13회 대회부터는 ‘포카리오픈’으로 개명되기도 했다.

1977년 10월 19일부터 22일까지 4일간 국내 두 번째 스폰서경기로 태평양화학공업주식회사가 쾌남오픈골프선수권대회가 개최됐다. 태평양화학측은 국내골프 전망이 밝음에 비추어 참가범위를 넓히기 위해 제5회 때부터는 국내 최초로 여자프로 부문을 신설하고 상금도 5백만 원을 증액했다.

그밖에도 연합오픈, 여주오픈, 부산오픈, 삼양오픈, 수원오픈, 동해오픈이 있다. 동해오픈골프선수권대회는 일본관서지방의 재일교포 골프 동호인들이 모국의 골프계와 친선을 도모하고 골프 인구의 저변 확대 및 국내 골프 기량 향상에 기여하고자 동해오픈골프선수권대회를 창설했다. 1981년도에 개최된 제1회 대회에는 국내남녀아마·프로와 재일교포선수 등 정상급과 일본, 자유중국선수 등 모두 107명(여자프로 9명 포함)이 참가함으로써 본 대회의 뜻을 빛내 주었다. 이 경기는 회를 거듭할수록 참가선수가 늘어남에 따라 경기내용도 충실해졌으며 그 후 여자부를 제외하고 남자 오픈대회로 발전, 신한동해오픈의 명칭으로 개최되고 있다. 또 정모오픈, 동성화학 부산오픈, 일간스포츠오픈, 이순용배아마추어골프선수권 등이 창설됐으나 대부분 사라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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