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펼쳐진 골프대회를 논하다①
이 땅에서 펼쳐진 골프대회를 논하다①
  • 남길우
  • 승인 2016.08.0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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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골프대회의 역사

이 땅에서 펼쳐진 골프대회를 논하다①

1928년 청량리 코스에서 ‘전조선골프대회’ 개최, 88년 경기역사

1928년 11월 3일부터 4일까지 2일간 청량리 코스에서 제1회 ‘전조선(全朝鮮)골프대회’가 개최됐다. 이것이 경성골프구락부 주최로 조선 최초 전국 규모 공식 골프경기의 시작이다. 8·15 광복이후 혼란한 정국으로 인해 골프는 공백기를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골퍼들은 골프의 명맥 유지를 위해 갖은 역경 속에서 서울컨트리클럽 군자리 코스를 복구해냈다.

서울컨트리클럽은 경기사업 운영을 촉구하기 위해 신인 골퍼 발굴과 육성을 서둘렀으며, 1954년 제1회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를 개최하게 된다. 현재까지 88년째가 된 국내 공식대회의 역사가 펼쳐진다. 골프 토너먼트의 활성화는 골프 인구의 저변 확대, 선수양성은 물론, 골프 기량 향상 및 해외 진출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 이번호부터 2회에 걸쳐 우리나라 골프대회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전조선(全朝鮮)골프대회

1928년 11월 3일부터 4일까지 2일간 청량리 코스에서 우리나라 최초 전국규모의 공식골프대회가 펼쳐졌다. 경성골프구락부가 주최한 제1회 ‘전조선(全朝鮮)골프대회’이다. 여기서부터 2016년 현재까지 한국골프대회 88년째의 역사를 갖게 됐다. 처음으로 전국골프대회를 시행한 것이 청량리 코스의 업적이다.

예상과는 달리 경성골프구락부의 재정난은 심각해 샌드그린을 고려잔디로 바꾸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어쩔 수 없이 야지로 깔아 울퉁불퉁한 그린 상황을 참아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1928년 11월 3일부터 4일까지 청량리 코스에서 경성골프구락부 주최로 제1회 ‘전조선골프대회’를 개최했다.

청량리 코스에서 열린 전조선골프대회에는 전국 골프장 소속의 선수들이 예선을 치른 후 참가한 쟁쟁한 선수들이었다. 1928년 당시 전국에는 경성골프구락부(청량리 코스), 평양 코스, 원산 코스, 대구 코스 선수들이 참석해서 전국대회라는 명분을 갖고 경기를 치렀다. 당시 대한암흑기(일제강점기)라 주로 일본인 선수들이 많았다.

경성골프구락부에서 약 50명 그리고 대구 코스, 원산 코스, 평양 코스 등 각 클럽에서 10여 명 등 약 60명이 출전한 제1회 대회는 큰 성황을 이루었다. 어쨌든 이 땅에서 전조선골프대회라는 이름으로 출전한 선수들이 2일간 열을 뿜는 격전 끝에 청량리코스의 나카무라(총독비서관)가 챔피언으로 등극했다. 그때 나카무라는 34세의 한창 나이였는데 대구 코스의 사이토와 일몰로 인해 18홀 승패를 못 내고 3일간 53홀 끝에 가까스로 이겼다는 진기록이 남아있다.

이듬해 1929년도 제2회 전조선골프대회는 10월 31일 평양 코스에서 개최됐다. 경성골프구락부에서 12명, 원산에서 4명 그리고 현지 평양에서 28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평양의 사카모트가 예상대로 우승했다. 전조선골프대회는 매년 경성, 평양, 원산 등 전국 각 골프장을 순회하며 10년간 개최됐다. 그러다가 1932년 부산 코스가 탄생하면서 경기 개최 코스는 5개로 늘어났다.

이 전조선골프대회는 1935, 1936년에도 열려 대구 코스의 고구찌와 무카이시카가 각각 우승, 대구 코스의 실력이 조선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청량리 코스에서 1930년 군자리 코스로 이전한 뒤 경성골프구락부가 한국 골프계의 중심으로 그 위치를 굳히고 ‘조선골프연맹’의 운영에도 앞장서게 된다.

전조선아마선수권대회

군자리 코스가 오픈한 1930년부터 1940년까지를 한국골프의 개화기로 잡는다. 경성골프구락부 군자리 코스는 한국 골프계의 심장이자 중심으로 굳혀졌다. 골프발상지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루스의 올드 코스처럼 한국의 골프 메카로 나날이 관록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 상징의 하나로 ‘조선골프연맹’의 창립을 들 수 있다. 1937년 9월 23일 경성골프구락부의 주도 아래 이 땅의 골프 사상 최초의 ‘조선골프연맹’ 창립총회가 개최됐다.

군자리 코스에서 경성, 대구, 평양, 원산, 부산 코스 등 전국 5개 골프장을 회원으로 하는 조선골프연맹 창립총회였다. 연맹 설립 목적을 ‘조선 안의 각 골프클럽이 상호간의 연락을 긴밀하게 하여 사도의 향상 발전을 꾀한다.(정관 제2조)’라고 밝혔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조선아마선수권대회와 각 클럽 대항경기 등 2개의 경기를 창시’하며 ‘통일된 핸디캡을 제정한다.(정관 제3조)’고 했다.

연맹이 창립된 1937년 9월 23일, 조선골프연맹의 주최로 경성골프구락부 군자리 코스에서 제1회 전조선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이 경기 또한 이 땅의 골프 사상 최초의 연맹 즉 오늘날 골프협회(GA)가 주최하는 공식 경기이다. 비록 대한암흑기에 치러지긴 하지만 한국 최초의 아마선수권대회가 됐다. 이 대회에 전국 각지에서 30명의 고수들이 출전했다. 36홀 스트로크플레이로 예선전을 치르고 상위 16명이 매치플레이로 우승자를 가려내는 경기 방식이었다.

예선 통과 16명 즉 16강중에 조선인 선수가 5명이나 들어갔다. 군자리 코스가 자랑하는 제1의 실력자 장병량과 강호 김종선, 노련파 박용균, 오한영 및 만주의 안동 코스에서 칼을 갈았던 임영식 등이다. 일본인 선수로는 당시 24세의 오바시, 54세의 사가타 및 육군대좌이며 47세의 하기하다 등 11명이었다.

치열한 열전 끝에 대구 코스의 오바시가 결승에서 경성골프구락부의 장병량을 눌러 제1회 전조선아마추어골프 챔피언이 됐다. 전국 규모 대회에서 조선인 선수가 처음 2강에 올랐다가 쓴잔을 마신 아쉬운 이야기다.

당시 일본이 만주를 공략한 ‘일지(日支)사변’을 일으켜 일본 중국 간에 전투가 이어지던 비상시기여서 경성 이외의 각 지방으로부터 참가자가 매우 적었다. 그래서 조선골프연맹 창립을 기하여 창설한 뜻 깊은 대회가 그다지 성황을 이루지 못한 채 다소 침체된 분위기에서 진행되어 유감스러웠다는 소문도 있다.

강호 선수를 많이 갖고 있기로 소문난 대구 코스의 대표 선수 오바시와 서울 출신 베테랑 장병량과의 결승전은 지역 대결의 성격을 띠어 대회 무드를 막바지에 가서 크게 고조시켰다. 경기 시작까지 비가 내려 코스 컨디션이 걱정됐으나 다행히 시작할 때는 비가 멎고 바람도 잦아들어 경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아쉬운 점은 인(IN)코스를 클로즈하고 아웃코스 나인(9) 홀만을 써서 행해지는 경기였다. 아카보시가 심혈을 기울여 개조한 인코스는 한여름 가뭄으로 잔디의 생육이 매우 나쁜데다가 빗물에 잠겨서 사용 불능 상태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웃코스 9홀만을 사용해야 했던 것이 제1회 전조선아마골프선수권대회의 흠으로 남았다.

재미있는 것은 30명이 벌인 예선전 36홀 스트로크 플레이에서 오바시, 장병량과 김종선 등 3명이 똑같이 173타로 타이스코어를 냈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우 다음 매치플레이의 시드를 배정하기 위해서 1위 즉 메달리스트를 가려내야 했다. 그래서 실시된 18홀의 플레이오프(연장전)에서도 오바시와 장병량은 또 타이가 됐다. 그래서 두 선수끼리만 다시 9홀 경기를 겨룬 끝에 24세의 오바시가 결국 이긴 것이다.

다음날 본선에 간 16명은 매치 플레이를 했다. 준결승에서 오바시가 고이즈미를 12ː11로 이겼고 장병량은 마쓰다를 2ː1로 이겼다. 결승에서 오바시는 33세의 장병량을 2ː1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장병량이 만일 이 땅에서 열린 바로 그 최초의 전국 규모 공식 내셔널타이틀경기인 제1회 전조선아마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더라면 ‘제1회 전조선아마 챔피언’으로 그의 업적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크게 달랐을 것이다.

한국인들에겐 그의 준우승은 두고두고 안타까운 민족적 울분이었다. 대신 장병량은 1주일 후 경성골프구락부 1937년도 클럽선수권대회의 결승에서 고이즈미를 물리치고 1936년 지난해에 이어 챔피언 2연패로 설욕하고 울분도 깨끗이 씻어냈다. 1936년 경성골프클럽선수권대회 경기에서 장병량 선수가 한국인 골퍼로서는 처음으로 클럽챔피언이 됐다. 장 선수는 첫 우승에서 자신을 얻은 여세를 몰아 1937년과 1938년 대회에도 계속 출전해 우승, 3연패를 수립함으로써 초창기의 우리나라 골프계에서 괄목할만한 활약과 기량을 보였다. 당시 장병량은 신의주에 골프코스가 없기 때문에 평양 골프코스를 왕래하거나 압록강철교를 건너서 만주땅 안동골프코스에서 골프를 했다. 그런 열성이 3연패의 위업을 안겨 주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대구출신인 서정식은 1939년도 경기에서 장병량을 물리치고 챔피언이 됐다. 그러나 1940년도 대회는 23세의 약관 김흥조가 서정식의 뒤를 이어 챔피언이 됨으로써 일제강점시대에 한국인 골퍼들이 일본선수들을 물리치고 아마골프경기를 계속 석권했던 것은 골프 초기의 쾌거로 골프사에 길이 남을만한 업적이다.

제4회 전조선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가 1940년 10월 15일 경성골프구락부 군자리 코스에서 시작됐다. 대회 첫날 경성을 비롯하여 대구, 부산, 평양클럽에서 30여 명의 싱글핸디캡플레이어들이 오전 9시에 티오프 했다. 오전, 오후 36홀 스트로크 플레이로 예선을 치르고 2일부터는 매치 플레이로 예선에 통과된 16명이 자웅을 겨루는 것은 종전과 다름없었다.

경성에서는 사카이 등 11명 그리고 조선인으로 장병량, 오한영, 김흥조, 박용균, 조주영, 윤치왕, 박용수 등 7명, 부산에서는 사와야마 등 6명, 대구에서는 1935년의 공식 전조선아마대회 우승자 고구치를 비롯 명선수 서정식, 정운용 그리고 평양에서는 명선수 김건영, 김운영 형제 등 전국의 강호가 총 출전했다.

결승전은 경성의 김흥조와 대구의 서정식 두 선수로 좁혀졌다. 예상은 서정식 우승으로 모아졌으나, 의외로 김흥조가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서정식은 1939년도 우승자이고 김흥조는 당시 23세의 애송이로 일본에서 기량을 쌓은 북한 부호의 아들이다. 김흥조가 준결승에서 천하제일의 장병량과 맞붙어 일진일퇴의 시소게임 끝에 물리침으로써 승세를 굳히게 된다. 겨우 1홀을 이기는 그야말로 신승이었다. 35세의 장병량은 젊은 김흥조의 예기에 눌린 셈이다.

약관의 김흥조는 그 여세를 몰아 다음날 결승(36홀)에서 강호 서정식도 무난히 물리칠 수 있었다. 김흥조는 그해 전조선아마챔피언에 경성골프구락부 챔피언 등 2관왕을 거머쥐고 된다.

1941년 경성골프구락부 챔피언에는 일본인 나카무라가 올랐다. 장병량, 김연만, 임연달, 정보라, 오한영 등 5명이 예선에 통과했었다.

1930년부터 1943년 군자리 코스 폐장까지 전조선아마골프선수권의 14년간 전반기는 일본인의 득세였으나, 후반기는 실력 향상을 꾀한 조선인 선수가 우세했다. 일본인 선수를 연거푸 제압하며 전조선 타이틀은 물론 경성골프구락부의 챔피언 자리까지 휩쓸게 된 것이다.

김흥조의 당시 핸디캡은 8이었다. 장병량은 3 그리고 서정식은 5였다. 1941년 경성골프구락부 챔피언인 김동준 합동통신사장·전 골프협회 이사)은 핸디캡 11에 서 아카보시와 담배내기에서 이겨 7로 조정됐다.

당시 회원은 5백여 명이고 그중 한국인은 30여 명이었다. 1할도 안 되는 수적 열세지만 골프 기량은 그들을 압도했다. 일본인 멤버는 총독부 고관, 은행 간부, 회사 중역이었고 한국인 회원은 토호 실업가 그리고 은행 간부 등이었다. 김연수, 윤호병, 김흥조, 김계조, 조주영, 김동준, 윤치왕에 선수급 장병량, 박용균, 김건영과 대구의 서정식 등이다.

 

1958년 한국 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를 마치고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

군자리 코스가 1943년 일본의 태평양전쟁에 수용된 후 복구가 됐다가 다시 6·25전쟁으로 다시 황폐화 됐다. 군자리 코스를 재복구한 서울컨트리클럽은 우리나라 골프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한국골프 사상 최초로 제1회 한국아마추어골프 선수권대회를 갖기로 했다. 이는 한국골프가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가 됐으며 특히 아마추어골퍼들의 긍지와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 ‘대통령배’를 수여할 정도로까지 급진전 했다.

1954년 10월 9일과 10일, 그리고 10월 16일과 17일까지 4일간 군자리 골프코스에서 열린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에는 한국 선수 13명과 외국인 선수 3명이 참가했다. 최초로 개최된 경기로 다소 빈약했지만 우승은 주한 ‘유솜’ 소속의 ‘매츠카’ 선수가 차지해 경무대에서 이승만대통령으로부터 우승배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1954년 제1회 골프대회를 개최할 때 이승만 대통령이 참관했을 정도로 관심이 지대했던 대회였다. 6·25전쟁 직후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골프장이 조성된 만큼 이 대회 마지막 날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해 우승 시상을 했다. 이 대회를 향후 ‘대통령배’라고 부르게 된 것도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최초로 대통령배를 수여한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는 한국골프 발전의 촉진제가 됐다. 특히 서울컨트리클럽은 골프계의 활성화사업으로 아마추어골퍼 육성을 위해 ‘아마추어 골프지도(委)’까지 두어 매주 화요일을 ‘아마추어 골프지도의 날’로 정하는 등 아마추어 골퍼 육성에 주력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남북이 대치한 당시 상황에서 미군들을 위한 레저시설 강화라는 이유가 서울컨트리클럽 창립에 크게 작용했다.

이 대통령이 골프를 즐긴 기록은 없다. 하지만 당시 주말이면 일본 오키나와로 가서 골프를 즐기는 미군 장교들을 국내에 머물게 하기 위해 전후 복구비용에서 골프장 조성 자금을 충당했으니, 60여 년 전 한국 골프란 군사외교를 위한 전유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매년 ‘대통령배’가 앞에 붙던 이 대회 명칭은 1975년 10월 ‘사회 특수층이 즐기는 골프에 대통령배 이름을 붙이는 건 위화감을 준다’는 당시 정권의 판단에 따라 변경된다. 이듬해 23회 대회부터 첫 이름인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으로 되돌아갔다.

한국아마대회는 1회부터 15회(1968)대회까지 서울컨트리클럽에서 경기를 가졌으며 그 후 각지에 골프장이 증설됨에 따라 코스를 옮겨 다니며 치렀다.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는 매년 개최되어 경기내용이 충실해지고 한국아마골프계의 역량이 커지면서 미국, 일본, 대만 등지의 외국인 선수들이 출전했다.

우리나라에는 1958년 9월 창설된 ‘한국오픈’이 내셔널타이틀 대회다. 물론 프로대회의 시작점을 두고 따지자면 58년 6월 시작한 ‘한국프로골프협회(KPGA)선수권’이 몇 달 앞서지만, 대회 상금과 전통, 출전 선수와 스폰서 등에서 한국오픈이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 대회는 2004년 50회 대회부터 대한골프협회장을 지낸 ‘허정구’ 삼양통상 창업자의 이름을 앞에 붙이면서 오늘날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전통과 역사를 따진다면 프로대회들보다 더 오래된 골프대회가 ‘허정구배 한국아마추어골프선수권’이다

 

1958년 한국오픈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

1958년 9월 11일, 군자리 코스에서 제1회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가 개최됐다.

당시 협회가 구성되지 않아 제1회 대회부터 서울컨트리클럽에서 주관했다. 초대 챔피언은 미국의 무디가 차지했다.

남북이 대치한 당시 상황에서 미군들을 위한 레저시설 강화라는 이유가 서울컨트리클럽 창립에 크게 작용했다.

이러한 중심에는 서울컨트리클럽의 설립자이자 초대 이사장인 이순용 씨의 노력이 있었다. 한국 골프에 기여한 것은 서울CC를 만든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한국아마추어선수권(1954년), 한국오픈(1958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1958년) 등의 골프대회를 만들어 국내 골프 저변 확대에 공헌했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에는 아마추어에 비해 프로가 연덕춘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골프의 활성화를 위해 프로골퍼의 육성이 절실히 시급한 상황이었다. 당시 서울컨트리클럽 이순용 이사장은 부임 초부터 프로골퍼 공백의 문제해결을 위해 고심했다. 이순용 이사장은 우리나라 골퍼의 수준이 국제적인 위치까지 올라서기 위해서는 국제 골프경기 교류만이 그 타개책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골프 국제교류를 위해서 무엇보다 선수가 있어야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 결과 프로골퍼의 육성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골프는 일반인들에게는 너무나 생소했고, 광복 후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회실정 때문에 누구도 선뜻 골프를 직업으로 삼겠다고 나설 수 없는 때였다.

이 이사장은 프로골퍼로서 국제무대경험이 있는 연덕춘에게 프로골퍼 육성을 맡기고 후원했다. 연덕춘 프로가 처음으로 발굴해 낸 골퍼는 신봉식, 박명출이었다. 뒤이어 김학영, 김복만, 한장상 등이 배출되어 실력을 발휘했으며 이때부터 한국프로골프의 전망이 엿보이기 시작하여 차츰 골프에 대한 인식도 변화되어 갔다. 이때를 포착해 서울컨트리클럽은 어려운 재정에도 불구하고 골프의 발전을 위해 오픈골프선수권대회 개최를 구상하게 됐다. 1958년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4일간 제1회 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첫 대회는 국내 선수를 비롯해 미국, 자유중국 등 3개국 선수들만이 참여하는 조촐한 출발이었지만, 1965년 한국골프협회가 창립되면서 점차 각국의 정상급 골퍼들이 참여하는 국제 규모의 대회로 발전했다. 해외에 홍보전도 펼쳐 나카무라,

이시이, 가쓰마다, 하야시 등 일본의 정상급골퍼와 진건충, 여양환, 사영욱 등 대만의 톱프로들이 출전해 국제 규모 경기로 발전했다. 그 후 뉴질랜드, 호주, 필리핀 등 아세아 태평양지역 선수들도 합류하여 규모를 늘려가면서 국제대회로 성황을 이뤘다.

한국오픈골프는 1966년 한국골프협회(현 대한골프협회)의 창립으로 그 주도권이 이양됐고 1970년부터는 이 대회가 아시아 골프서킷경기와 병행하여 거행하게 됨에 따라 대회명칭이 ‘한국오픈골프선수권 겸 아시아골프서킷대회’로 변경됐다. 1982년부터는 매일경제신문사에서 제정한 매경오픈골프선수권대회와 아시아골프서킷대회를 겸해 거행키로 결정함에 따라 한국오픈골프선수권대회는 독립경기로서의 위치로 되돌아왔다. 이로써 대회일정도 계절 중 가장 골프대회를 열기 좋은 9∼10월에 가질 수 있도록 변경했다.

1962년 한국오픈선수권대회는 5․16 군사정권 1주년을 맞아 대회를 크게 확대해서 개최키로 하는 협의가 당국자 사이에서 타결됐다. 개최 날짜도 6월 초로 잡혔다가 6월 중순으로 연기되다가 다시 10월 초순으로 확정됐다.

서울컨트리클럽 측은 허정구 부이사장을 준비위원장으로 위촉, 만반의 대회 준비를 서둘렀다.

일본오픈(9월 하순)에 참가한 국제 선수 즉 일본, 중국, 필리핀, 홍콩, 말레이시아, 호주,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 등 9개국의 선수를 모두 서울의 한국오픈에 불러들여 한국 오픈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하게 됐다. 초청장이 해외 주재 한국대사 및 공사관을 통해 해당 선수에게 제대로 전달되도록 외무부의 협조를 얻어냈다. 되도록 다수의 선수들이 참가토록 해달라고 서신을 통해 각국 한국 공사들에게 일일이 당부까지 했다. 총상금은 4천6백 달러, 단 외국의 일류급 선수가 다수 불참하면 상금액을 ‘재고’한다는 발표도 있었다. 서울골프클럽이 처음 치르게 되는 국제대회인 만큼 차질이 없도록 총무, 재정, 시설, 경기, 섭외, 접대 등 5개 위원회 별로 꼼꼼한 활동을 전개했다.

코스의 개선과 세팅, 개보수, 그린의 보호와 정비 및 클럽하우스 내외의 단장 등에서 캐디의 상하의 백색 복장에까지 자금이 투입됐다. 물론 당국의 보조가 있었다.

5·16 이후 한국의 골프를 해외에 널리 알리고 ‘개방적인 정부’라는 대외 인식 강화를 꾀했음에도 한국오픈에 참가한 외국선수는 일본과 중국 등 2∼3개국에 불가했다. 전년 대회 우승자 사영욱을 비롯 여양환, 진건충 등 중국과 나카무라, 이시이, 가쓰마다, 하야시 및 고노 외에 미8군의 R.P 엘리어트 등이 전부였다. 재일한국인 아마추어선수로 김인배와 박순조가 출전했다. 삼성물산의 10만 원 외 금성, 럭키, 동양 맥주의 5만 원 등 20개 기업체에서 1백60만원의 희사를 받는 등 서울컨트리클럽이 전력투구를 했는데 대회 결과 1∼3위(1위 나카무라)는 일본세가, 6위까지는 중국세가 모조리 석권했다. 한장상은 공동 6위, 연덕춘, 김학영이 공동 8위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1963년 한국오픈대회에도 이들 외국선수가 다시 초청되어 큰 성황을 이루었지만 1∼6위까지를 역시 일본과 중국 골퍼들이 차지하고 한장상이 공동 7위 이일안이 공동 10위로 한국 골프의 체면을 겨우 세우는 데 그쳤다.

1964년 외국 선수 초청이 없는 한국오픈대회는 순전히 국내 잔치로 치러져 마침내 한장상이 한국오픈 7회 대회에서 비로소 우승을 차지하며 ‘국내 1인자’로 자리 매김을 한다. 동시에 신용남이 ‘아마 베스트’의 영광을 누린다.

국내 잔치로 환원된 한국오픈에서 한장상은 내리 4연승을 하다가 1968, 69년의 국제화 한국오픈에서는 진건충, 사영욱의 중국세에 타이틀을 빼앗겼다. 1970년 사상 초유로 최대 다수국 강호들이 참가한 13회 한국오픈 겸 아시아서키트에서 필리핀의 영웅 벤 아르라가 앞서갔다. 하지만 한장상 프로가 7타 차를 뒤집고도 3타 차로 눌러 이기는 대역전극을 펼쳤다. 한장상 프로가 우승해 ‘국내용’이란 오명(?)을 확실한 벗고 ‘아시아의 한(韓)’으로 우뚝 올라섰다.

마침내 1970년보다 더 국제색이 짙은 아시아서키트 71, 72년 오픈에서도 한장상은 막강 중국세를 누르고 한국오픈 7승이란 공전의 대기록을 세운다. 서울골프클럽 군자리 코스에서 한장상 프로의 화려한 탄생이었다.

현재 대한골프협회 내셔녈 타이틀 경기인 한국오픈은 1990년부터 현재까지 ‘코오롱’이라는 타이틀 스폰서 날개를 달고 한국 최고 권위를 이어가며 나날이 발전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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